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49화 (149/262)

제6장. 응원할 거예요! (1)

8월 8일이었다.

저녁에 느닷없이 내린 소나기 때문에, 서울은 저녁 내내 습식 사우나 안에 던져 놓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토요일 늦은 시간, 거리는 한산했는데 대신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커피 전문점들은 시원한 음료나 빙수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리고 대목을 맞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

밤 11시 경기였다.

그런데도 맥주를 파는 가게마다 TV 앞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초저녁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동양인 최초라니까!”

“그럼 뭐하냐? 오늘 망신당하면 오히려 최초 안 하는 게 낫지! 잘못하면 중국이나 일본에 웃음거리만 되는데?”

“앞에 기록을 좀 봐라. 무실점이었잖아.”

“챔피언십이랑 프리미어리그는 하늘과 땅 차이야!”

“모르는 소리 하네! FA컵 4강에 4부 리그 팀도 올라오는 게 영국 리그야. 우승팀도 16강에서 4부 리그 팀에게 잡힌다고.”

스포츠 전문 채널에서 앵커와 해설자들이 나와 잠시 뒤에 있을 경기를 분석하는 동안, 축구를 좀 안다는 남자들이 목청을 높였다.

군데군데 여자 손님들도 있었다.

“정지우 말이야. 난 왜 그렇게 눈매가 가슴에 박히는지 모르겠어. 독해 보일 때도 있잖아, 난 그게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여.”

“너도 그래? 지난 경기에서 높다랗게 떠서 공 막는 장면 있었잖아. 난 며칠 동안 그 장면이 머리에서 안 떠나. 미치겠어!”

경기 분석보다는 선수들에 대한 감정이 주로 오가고 있었다.

“데이빗! 주장! 점잖게 생기지 않았니?”

“성격도 그런 거 같잖아!”

“난 오늘 정지우 선수가 세 골만 넣었으면 좋겠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친구가 엉뚱한 희망을 쏟아 내며, 함께 앉은 친구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따라오긴 했는데 축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호프집들의 분위기는 그랬다.

“으아! 결국 해내는구나!”

장진모는 역시나 캔 맥주를 잔뜩 쌓아 놓고 부장의 방에 앉아 있었다.

“그만 좀 해라! 밖에 있는 애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왜 그래? 내가 못 들어오게 했어? 자기들끼리 보는 게 편하니까 그런 거 아냐?”

“그게 아니라, 인마! 명색이 기자란 놈이 너무 편파적으로 한 선수를 응원하니까 그렇지.”

부장의 말에 장진모가 입술을 고약하게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형이 몰라서 그런 거야. 현지에 가 보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니까. 여기서 느끼는 게 5면, 현장에선 12 정도? 그 정도로 대단한 선수라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렇게 대단한 선수랑 인터뷰나 좀 따 봐라. 진모야, 지금까지 너 마신 맥주 전부 내가 산 거라는 것도 좀 기억하고.”

“어? 형, 왜 그래? 이거! 이건 내가 산 거야!”

장진모가 빼빼 마른 노가리를 부장의 앞으로 디밀었다.

“하이고! 말라 비틀어져서 대가리만 있는 노가리?”

“참! 아니, 살찐 노가리 봤어요? 이건 원래 말려서 이렇게 먹는 거야!”

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인 TV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잘하겠지?”

“사람 눈 보고서 감동 먹기가 쉽지 않잖아요.”

뜻밖에도 착 가라앉은 장진모의 답이 나왔다.

장난이 아니란 의미였다.

“정지우가 나를 똑바로 보는데, 이 선수는 진짜구나 싶더라구요. 그런 거 있잖우. 하겠다고 결심한 건 반드시 해내는 사람. 정지우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럼 평생 인터뷰는 물 건너간 거네? 절대 인터뷰 안 한다고 했다던데?”

“어허! 내가 누구요? 나 거머리 장진모요! 내가 착 달라붙으면 절대 뗄 수가 없다니까요!”

“어디 소금이 있을 텐데? 일단 나한테서라도 떼어 놔야 인터뷰를 따더라도 딸 텐데.”

장진모가 웃으며 맥주 캔을 들었다.

“형, 나 바다 거머리요. 소금이 힘이 됩니다.”

부장이 졌다는 투로 맥주 캔을 들어서 장진모와 부딪쳤다.

흥분과 긴장이 꽈배기처럼 뒤엉켜 레드 블레이트를 감싼 느낌이었다.

FA컵 결승전과 커뮤니티 실드가 이벤트 느낌이었다면, 오늘 경기는 진검 승부를 시작하는 날인 거였다.

방송국 카메라를 앞세운 리포터들이 경기 시작 전 관중들을 붙들고 인터뷰를 진행했고,

“컴 온!”

카메라가 지날 때 알통을 자랑하는 것처럼 양팔을 들어 보인 젊은 남자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유니온 시티 관중인가요?”

“당연하죠!”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유니폼에 새겨진 엠블렌을 잡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가장 활약할 선수를 꼽아 주세요.”

“두말할 것 없이 Ji가 최고의 활약을 보일 겁니다! 그는 우리의 수호신이에요! Ji가 골대를 지키는 모든 게임에서 우리 팀은 승리를 이루어 냈어요!”

“예에!”

남자의 뒤에서 구경하던 관중들이 다 함께 고함을 질러 댔다.

“다들 오늘 가장 활약할 선수로 Ji를 꼽는 거지요?”

“그는 미스터 어메이징이에요! 그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줄 거예요!”

앞에 있던 소년이 당차게 외친 말에 리포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은 미스터 어메이징이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상, 레드 블레이트에서 마크 렘드웰이었습니다.”

“이야호- 오!”

인터뷰가 끝나는 순간에 관중들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러 댔다.

서브 선수들이 먼저 벤치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라커룸에 앉은 선수들은 긴장을 이기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역시나 가장 흔한 것은 헤드셋을 이용해 음악을 듣는 것이었고, 다음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정지우는 허벅지에 팔을 올린 자세로 들고 있는 골키퍼 장갑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기고 싶다. 이겨야 할 게임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터무니없는 목표라고 말하는 무실점 게임, 그것을 이뤄 낼 거다.

몸값을 높여서 그 돈이 다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릴리를 살려 낼 거고, 경기를 지켜보는 전 세계의 모든 축구 팬들에게 얼마나 제대로 배웠는지를 알릴 거다.

“행복해질 거다. 이제 다시는 뺏기지 않을 거야.”

한국말이었다.

정지우는 골키퍼 장갑을 향해 다짐을 건넸다.

“릴리를 지켜 낼 거고, 감독님과 나를 밀어낸 이들에게 우리의 실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려 줄 거다.”

데이빗과 카알이 정지우를 힐끔 보았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 난 반드시 그 자리에 오른다. 프리미어리그 무실점 기록이 그 시작이다. 할 수 있다, 정지우. 넌 분명하게 해낼 수 있다. 감독님께 그렇게 배웠다.”

장갑이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 정지우는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경기를 위해 출발할 때, ‘오늘 엄마가 응원할게.’ 하며 안아 준 전은주의 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릴리를 높다랗게 들었을 때 느꼈던 무게.

그게 행복이다.

다시는 뺏기고 싶지 않은 행복.

“후.”

정지우가 상체를 세우자 수비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달려왔다.

“무둔바! 오늘 우리의 목표는!”

“푸흐흐! 무실점이지!”

꽈악!

정지우가 내민 손을 무둔바가 굵은 팔을 뻗어 맞잡았다.

단순한 촐랑이 레믹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믹! 개막전 해트트릭 어때?”

“맡겨 달라고.”

“역습이니까 계속 수비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알지?”

“수비는 한 번만 실수해도 골을 먹으니까. 그렇지?”

정지우가 픽 웃으며 일어나자 레믹이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꽈악! 쿵!

녀석과 손을 맞잡은 정지우는 이어서 오른쪽 가슴을 요란하게 부딪쳤다.

동기 셋을 서브로 뺀 것이 기존의 선수들에게 안정감을 심어 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라커룸은 개막전을 앞두고 그나마 편안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마스코트가 한국의 전통 복장을 하고 벤치 바로 위에 있을 거다.”

정지우는 라커룸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생명을 건 수술을 앞뒀다. 오늘 난 우리의 마스코트를 위해 경기를 뛴다. 그래서 리그가 끝났을 때, 릴리가 웃는 모습으로 함께 우승컵을 들게 할 거다!”

릴리를 팔아서 승리하겠다는 거냐고?

아니.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위험한 수술을 앞둔 릴리에게 승리라는 용기를 선물하고 싶은 욕심에서 나온 거다.

“내가 릴리를 지킬 수 있게 도와줘.”

“그건 아니지.”

정지우의 말을 물고 들어온 것처럼 데이빗이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 릴리를 지키는 거지. 그녀가 우리의 마스코트이니까. 그렇지?”

정지우가 돌아본 곳에서 데이빗이 동료들을 향해 의지를 전하고 있었다.

“어때? 오늘 골을 넣으면 우리 모두 릴리에게 달려가서 세레머니를 하는 거야! 레믹! 그렇게 할 수 있겠지?”

“몇 골을 원해?”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며 라커룸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지금부터 유니온 시티와 선덜랜드, 선덜랜드와 유니온 시티의 프리미어리그 1라운드 경기를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이 그라운드를 비추며 앵커의 멘트가 나왔다.

화면 왼쪽 위로 ‘정지우 선발 출전’이란 글자가 또렷하게 올라와 있었다.

『양 팀 선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유니온 시티입니다. 4-2-3-1의 포메이션을 사용하며, 최전방에 레믹, 이어서 꼼빠니, 맥슨, 데니.』

레믹이 혼자 돌아서며 그 아래로 이름이 떠올랐고, 다음으로 이름이 불린 3명의 선수가 동시에 돌아서며 이름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마지막 순서였다.

『오늘 골키퍼 장갑은 정지우 선수가 꼈습니다.』

그라운드를 배경으로 정지우가 뒤로 돌아 뒷짐을 졌다.

『동양인 최초 개막전과 리그 선발입니다.』

『그러네요. 영국 리그가 그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이어질 대단한 기록입니다.』

『다음으로 선덜랜드 선수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있어서 앵커는 바로 선덜랜드 AFC 선수들을 알려 주었다.

정지우가 돌아서서 뒷짐을 지는 장면이 나온 직후였다.

“어머! 어머! 어머!”

“꺄악!”

요란한 소리를 질렀던 여자 손님들이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는 좋았다.

월드컵 예선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통쾌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좋아!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오늘 유니온 시티가 이기면 우리 2차 가자!”

“세 골 이상 넣으면 내가 여기 테이블마다 닭 쏜다!”

“우와-!”

맥주를 마시던 중년 남자들의 고함에 호프집에서 느닷없는 함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선수 소개를 마친 카메라가 릴리를 분명하게 잡아 주었다.

비니 위에 족두리를 쓰고, 색이 고운 한복을 입은 릴리가 앙증맞은 손으로 박수를 치는 모습이었다.

『한복을 입은 영국 소녀입니다.』

『그러네요!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잘 어울립니다. 아마 정지우 선수를 응원하는 현지 팬이 아닌가 싶은데요?』

『하하! 모자, 저걸 비니라고 하죠. 족두리를 그 위에 올렸네요. 옆에서 누가 좀 알려 줬으면 싶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앵커가 엉뚱한 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오늘 선덜랜드와 유니온 시티는 비슷한 포메이션으로 대결합니다. 선덜랜드는 4-5-1인데요, 데포를 가장 앞에 혼자 세우고, 그 뒤로 스코틀랜드 출신 공격수 플레처를 두었어요.』

파란색 바탕에 선덜랜드 선수들의 이름이 포메이션별로 떠올랐다.

『유니온 시티는 4-2-3-1인데요, 역시 레믹을 원톱 공격수로 세웠구요, 그 바로 뒤에 맥슨이 받치는 모습입니다. 양 팀 모두 허리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인데요.』

파란색 위아래에 어깨부터 시작된 녹색 삼선 줄무늬의 선덜랜드, 하얀색 상의에 파란색 세로줄, 그리고 하얀색 반바지를 입은 유니온 시티의 대결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양팔을 쭉 내밀고 부르는 응원가가 요란스럽게 레드 블레이트를 메우고 있었다.

나갈 시간이었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을 나섰다.

스태프의 손짓에 따라 통로에서 기다리는 동안, 방송 카메라가 선수들의 모습을 바쁘게 담고 있었다.

“하이!”

정지우는 옆에 선 아이에게 인사하고 손을 잡았다.

작고 약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두렵지 않아요?”

“응?”

이럴 때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은 없었다.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함성이 워낙 요란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지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남자아이가 잘못한 일을 지적받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어서 정지우는 얼른 자세를 낮췄다.

“미안해. 밖이 시끄러워서 못 들었어. 뭐라고 했었는지 다시 말해 줄 수 있어?”

아이가 주변 눈치를 본 다음 조그맣게 말을 건넸다.

“두렵지 않냐고 물었어요.”

“이름이 뭐니?”

“톰이요.”

“톰, 밖에서 들리는 함성을 들어 봐. 저 관중들이 다 우리 편이야. 가끔 두려워지려고 하면 난 톰처럼 우릴 응원해 주는 관중들을 떠올려. 우린 함께 뛰는 거니까.”

선수들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어서 더는 대화를 잇기 어려웠다.

정지우가 일어서서 앞으로 걸을 때 톰이 커다랗게 외쳤다.

“응원할 거예요! Ji가 두렵지 않게요!”

통로를 통해 눈부신 여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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