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48화 (148/262)

제5장. 개막전 (3)

왜 어머니란 말이 이렇게 느닷없이 튀어나왔지?

병원에서 하늘을 보며 했던 말이 남아서였을까?

달그락.

전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에 있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을 집었다.

“그래, 아들! 우리 비벼 먹자.”

박상민이 눈치를 살피는 앞이었다.

“사모님보다 훨씬 듣기 좋다! 당신 오늘 한턱내야겠는데? 아들 생긴 날이잖아!”

“그러지, 뭐! 지우야, 이제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러 줄 거지?”

“예?”

“뭘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해? 서운하다, 아들아!”

전은주의 미소가 얼마나 따듯하던지 어색하던 침묵이 스르륵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불고기와 김치를 밥에 얹었고, 고추장, 참기름을 더했으며, 정지우가 만든 달걀 프라이를 2개나 넣었다.

“여보!”

주걱에 밥을 듬뿍 떠서 그릇에 담아 주자 박용근이 픽 하고 웃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뭐야? 이런 건 다 같이 먹자고 만드는 거야. 합숙 봐 놓고 그래?”

박용근이 커다랗게 밥을 담은 숟가락을 왼손으로 받친 채 입으로 가져갔다.

넷이서 한 그릇에 숟가락을 집어넣어 가며 밥을 먹었다.

세상 그 어떤 비싼 음식보다 맛있는 저녁이었다.

“저리 가!”

“왜 이러세요?”

“어어? 얘들 봐!”

말리는 전은주에게 넉살 좋게 달려들어 함께 설거지를 마쳤고, 보약을 먹었으며, 소파에 앉아 홍삼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박상민이 못다 한 질문을 던지며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낸 다음이었다.

정지우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나직하게 꺼냈다.

“우리 돈으로 8억까지 들 수 있다는데 꼭 돕고 싶어요.”

전은주와 박상민이 박용근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이었다.

“너,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는 알아?”

박용근이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돈 때문에 릴리의 치료를 외면할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엄청난 연봉을 받게 된 것이 꼭 릴리를 치료하라는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했구요.”

박용근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부족하면 나도 좀 보태마.”

정지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박용근은 넉넉하게 웃고 있었다.

“왜? 너만큼은 아니어도 나 제법 벌어.”

“그런 게 아니라.”

“이 녀석아, 아무렴 내가 그 돈 아끼라고 할 것 같았냐? 뭐 그리 죄지은 얼굴로 그래?”

박용근은 전은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 아들이 계산은 좀 둔한데? 이러다가 이 녀석 통장에 한 푼도 안 남아나겠어.”

“그러게. 그래도 우리 지우가 난 정말 멋있어 보이는데?”

그 뒤로 릴리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다음 날 훈련은 몸풀기 수준이었고, 그다음으로 미팅룸에서 포메이션을 점검하는 것으로 마쳤다.

유니온 시티의 포메이션은 4-2-3-1이었다.

정지우

웨스 모건 무둔바 라파엘 스웰던

카알 데이빗

데니 맥슨 꼼빠니

레믹

“개막전이다.”

전술 설명을 마친 마틴이 선수들을 둘러보며 말을 건넸다.

“지난 시즌에서 우리는 FA컵을 손에 넣었고,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뤘다. 내일은 프리미어리그 첫 경기다. 지난 시즌을 함께했던 동료들을 믿고, 동료들의 믿음에 답해라.”

마틴은 전술판에 손을 걸고 선수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어려운 싸움이다.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말고 달려드는 상대에게 동료와 함께 맞서라. 우리는 FA컵 대회에서 해 왔던 것처럼 팀으로 싸운다. 그리고 내일 경기가 끝났을 때!”

마틴이 한쪽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승리를 거머쥐고 홈 팬 앞에 서 있을 거다!”

평소 같으면 누군가, 혹은 주장 데이빗이 고함 한 번쯤은 질렀을 멋진 말이었다. 그러나 미팅룸에 있는 선수들 모두 굳은 얼굴로 마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개막전이 주는 부담은 그런 느낌이었다.

“자! 내일 보자!”

마틴의 마지막 말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팅룸을 나온 정지우는 골키퍼 코치를 찾아가 부탁했던 영상들을 받았다.

정지우가 식당으로 움직이기 위해 복도를 걸을 때였다.

“Ji!”

홍보 담당관 에이미가 정지우를 부르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인터뷰를 싫어하는 것은 잘 알아.”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그리고 선발 첫 동양인 골키퍼란 이슈 때문에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기타 아시아 국가들에서 인터뷰 요청이 엄청나게 들어와.”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얼굴로 에이미가 말을 이었다.

“거기에 우리 팀 단체 광고가 가능한지의 문의도 계속 들어오고. 어때? 우선 인터뷰는?”

정지우가 고개를 젓자 에이미는 직장의 반쯤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럼 광고는? 아마 우리 선수들 몇 명을 동시에 출연시키고 싶은 모양이야.”

정지우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번 광고와 인터뷰 신청은 구단 이사진에서도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

“에이미, 내 계약서에 인터뷰나 광고에 대한 의무 조항은 없는 거로 아는데?”

“물론이야. 내가 한 말이 강압적으로 들렸다면 사과할게.”

굳이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지만, 에이미가 구단 이사진을 들먹일 이유도 전혀 없는 문제였다.

“앞으로 어떤 이유에서든 내게 요구하는 일 앞에 구단 이사진이나 회장을 들먹이는 일이 없었으면 해.”

“미안해, Ji. 그 점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사과할게.”

벌써 두 번째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다시는 이런 일로 피곤하지 않도록 적정한 수준의 경고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이 시간 이후로 믹스트존을 제외한 인터뷰를 또 요청한다면, 내게 다른 팀을 알아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었으면 싶어.”

“Ji, 구단의 이사진을 말한 건 전적으로 내 실수야. 절대로,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을 강제하려던 건 아냐.”

“그 점은 알아들었어. 그러니 내가 한 말도 확실하게 기억해 줘. 난 유니온 시티에서 좀 더 생활하고 싶고, 있는 동안은 내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후! 알았어. 그러나 이번 인터뷰 요청 중에는 Lee가 먼저 동의해서 진행했던 TV 쇼와 스포츠 뉴스 건도 있었어. 그것만은 분명하게 알아줬으면 싶어.”

유정호에게서 이정렬 부친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당황할 뻔했다.

그런데도 정지우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사람이 좋은 것과 차별을 하는 건 전혀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에이미, 분명하게 다시 말해 봐.”

그녀의 얼굴에 스친 후회가 정지우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놓았다.

“Lee가 TV와 스포츠 뉴스 인터뷰를 신청한 것을 내가 알아야 하는 이유. 한국에서 온 동료니까 그것에 내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Ji, 방송국에서 Ji를 포함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서 말했던 거야. 나는 내가 믿는 신께 맹세코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아.”

“내가 오해한 거라는 거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에이미의 눈동자에 또다시 후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인터뷰 요청을 조절하는 업무를 맡았고, 홍보 성과가 곧 내 능력을 평가하는 거라서 내가 좀 예민했어.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하는데, 난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좋아. 그럼 이 시간 이후로 인터뷰 때문에 더 불편해지는 일은 없는 거지?”

“알았어.”

커다란 한숨에 섞인 답이 들렸다.

정지우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식당으로 움직였다.

동기 셋 중 이정렬은 확실히 눈치를 살피는 얼굴이었다.

놈의 부친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 녀석까지 왜 이러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정렬아, 너 인터뷰 요청 들어왔었어?”

“응. 들었어?”

정지우는 이정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거절했다.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아!”

이정렬이 아쉬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인마! 그런 일이 있으면 오는 길에 네가 말하지, 왜 에이미를 통해서 듣게 해?”

“미안해서 그랬지. 아버지 쪽에서 거절하기 어려운 분 요청이기도 했고.”

말을 마친 이정렬이 미련이 남은 눈길로 정지우를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축구 외의 일로 관심받고 싶지 않다. 거기에 어머니 일도 있고.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딱 한 번만 하면 안 되겠냐?”

정지우는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이정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았다, 알았어!”

한 번 불편한 게 두고두고 꼬투리를 만드는 것보다 백배쯤 나은 거다.

정지우는 인터뷰 건을 그렇게 정리했다.

아직 점심을 먹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웨스!”

한쪽에서 데니, 무둔바와 잡담을 나누고 있던 웨스가 고개를 돌렸다가 이쪽 테이블로 다가왔다.

“내일 상대해야 할 선수들 영상 확인했어?”

“물론이지.”

“선덜랜드가 공격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Ji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

“다음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마크가 붙지 않은 상대 팀 선수 확인.”

“라인은?”

“라파엘을 기준으로 할 것.”

기분 나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지우는 이제 막 축구를 시작한 선수를 상대하는 것처럼 웨스 모건에게 질문을 던졌고, 답을 들었다.

이어서 상대 공격수의 특징까지를 확인했는데, 놈은 그다지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수비 라인이 될 거다. 내일 기대할게.”

정지우의 칭찬을 받은 웨스 모건이 만족한 듯 웃었다.

“라파엘과 무둔바, 그리고 스웰던이 오전 내내 알려 줬어. Ji의 지시대로 하라고. 그리고 클레이의 조언도 있었고.”

“클레이와 친분이 있어?”

“유소년 팀에서부터 리저브 팀에 올라올 때까지 함께 뛰었어. 클레이가 나보다 좀 더 빨랐던 거지.”

어쩐지 질문을 받는 태도가 고분고분하더라니.

웨스 모건이 내민 손을 정지우가 꽉 잡아 주었다.

“내 꿈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어. Ji와 함께 뛸 수 있어서 영광이야.”

동기 세 놈이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로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다들 Ji가 세계 최고의 팀에 갈 수 있는데도 유니온을 위해 남았다고 말해. 우리끼리 말할 때 수비수들은 그래서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다짐해. 특히 무둔바가…….”

웨스 모건이 말하다 말고 무둔바를 슬쩍 돌아보았다.

“Ji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잘못하면 큰일 난다는 것처럼 웨스 모건이 몸서리를 쳤다.

과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정지우가 웃었고, 동기 세 놈은 단순히 웨스의 표정을 보고 따라 웃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점심 어떻게 할래?”

“먹고 가자.”

신준석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다들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박상민과 함께 선덜랜드의 영상을 다시 보았다.

“이게 무섭다. 이제는 영상 다음 장면이 어떤 건지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올라.”

“더 봐. 그럼 사전 동작과 실제 동작이 연결될 거다. 슈팅을 날리기 전에 잔발을 몇 번 뛰는지, 디딤발을 공의 어디에 놓았을 때 공이 뜨는지까지 전부 보인다.”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우리 빼고 19개 팀이다. 모두 38게임이니까 리그에서 선덜랜드와 마주치는 건 두 게임이 전부지. 그런데 선덜랜드를 악착같이 눈에 익히면 저 팀에게 패하는 팀, 혹은 승리하는 팀의 약점과 강점이 자연스럽게 보여.”

정말 그렇게까지 될까?

박상민이 준 시선에 담긴 질문은 그랬다.

“다음은 우리 팀의 강점과 약점이 보이고, 그다음으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지도 바로바로 느껴질 거다.”

“준석이랑 정렬이가 같이 지냈어야 하네!”

뜬금없는 감탄이었다.

“그 녀석들이 집에 가서 이 영상을 보기나 하겠냐?”

“이게 꼭 옳은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야! 해 보니까 이게 최고야! 그리고 처음 겪는 리그에서 이만한 공부가 어딨냐?”

박상민은 영상 분석에 푹 빠져 있었다.

미드필드에서 공을 놓고 달릴 때 녀석의 다리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피식!

정지우는 모른 척하며 영상에 시선을 돌렸다.

처음 영상을 볼 때 정지우 역시 몸이 반응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에 실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리미어리그의 시작이었다.

간식을 준비하는 전은주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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