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35화 (135/262)

제9장. 승리를 안겨주고 싶다. (2)

고등학교 시절에 합숙하던 분위기였다.

버릇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모친들은 박용근과 정지우, 동기 셋의 식사를 먼저 챙겨 주었다.

보약을 혼자 먹지 않는 것도 좋았다.

식사를 끝내면 다 같이 보약과 홍삼 봉지를 주르륵 입에 물었다.

“어머니! 그만하시고 관광이라도 다녀오세요.”

“싫다. 자식들 땀 뻘뻘 흘리면서 이 고생 하는데 무슨 관광이냐? 난 너희 잘되는 거 보는 게 최고다.”

움직일 때마다 끙끙대면서도 이정렬의 모친은 손을 멈추지 않았고, 신준석의 모친은 경쟁이라도 하듯 쉬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정지우와 박상민의 등을 수시로 다독여 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희 둘은 꼭 잘돼야 한다.”

전에는 잘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운동선수의 가족이란 게 정말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훈련은 리저브 팀과 함께했다.

마틴과 박용근은 라인 간격과 패스, 이 두 가지에 집중했는데, 특히 패스 방식의 변화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강하게 차! 더!”

긴 패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짧은 패스는 거의 슈팅처럼 보일 정도로 마틴은 빠르고 강한 패스를 요구했다.

삐이익!

15분쯤 자체 경기가 흘렀을 때였다.

마틴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고, 박용근이 전술판 앞에 섰다.

“코너로 빠져나간 이후에 다시 골대 앞으로 공이 들어오거든.”

박용근은 하얀색으로 수비 라인을 만든 뒤에 검은색 동그라미를 움직여서 공격수들을 표시했다.

“센터링의 각도가 이렇게 날아와야 하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 실패하더라도 수비수가 함부로 머리를 대기 무섭게 빠르게 넘겨! 만약 앞에서 잘라먹지 못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뒤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포지션을 잡고!”

검지와 중지로 검은색의 공격수를 움직여 보인 박용근이 시선을 들었다.

“레믹, 너는 헤더도 노릴 수 있어야 돼. 그럴 때면 이정렬! 네가 뒤를 받쳐 주고.”

키가 크지 않은 레믹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박용근을 본 직후였다.

“낮고 빠른 크로스에서 골을 만들기 위해선 슈팅 감각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런 선수로 우리 팀에선 네가 가장 제격이고. 다른 팀들이 설마 할 때 헤더로 골을 만들어 내는 거야.”

단순하기가 팽팽하게 당긴 라텍스 밴드 같은 레믹이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박용근의 지시를 주워 담고 있었다.

“첼시와 맨유, 아스널, 그리고 토트넘의 패스에 비해 우리 팀은 패스가 확실히 느리다. 공을 확실히 지키고, 빠르고 간결한 패스로 넘겨주는 것! 이것이 초반 승부수다!”

박용근의 지시가 끝나자 이번에는 마틴이 수비 라인 전체와 미드필드 진영에서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다.

“라파엘.”

“예.”

“라인을 조절하고, 대인 마크는 Ji와 의논해. 그리고 우리가 살아날 길은 역습밖에 없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고. 수비가 흔들려서는 역습도 없다.”

확실하게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훈련으로 역습의 패턴을 익혔고, 무둔바가 좀 더 유연해졌으며, 새로운 선수의 영입으로 스쿼드가 보강되었다.

“데이빗! 4-2-3-1에서 4-4-2로 전환하거나, 4-1-4-1로 변화할 때 중심을 좀 더 분명하게 잡아 줘. 상대의 전술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것 잊지 말고. Sang!”

유정호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박상민이 ‘예, 감독님.’ 하고 답을 했다.

“데이빗이 공을 잡으면 카알과 함께 주변을 반드시 지켜 주고. 그 뒤에 역습인 건 알고 있겠지?”

“예.”

“좋아. 20분을 더 뛰어 보자.”

리저브 팀의 선수들까지 함께 듣고 있어서, 1군과 2군 선수들 전체가 이번 시즌 유니온 시티의 경기 방식에 대해 분명하게 익히고 있었다.

오전 훈련이 끝나고 정지우는 얀센, 기예르모와 함께 골키퍼 훈련을 따로 가졌다.

“얀센, 공만 바라봐서는 힘들어. 라파엘이나 무둔바, 아니면 Jun에게 비는 곳을 맡게 해야 실점 위험을 줄일 수 있어.”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런지, 난 그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공에 집중하기도 벅차거든.”

축구에서 골키퍼만큼 경험이 중요한 포지션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얀센은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상황이었는데, 다만 그동안 쌓인 습관이 문제였다.

정지우는 무둔바와 라파엘, 그리고 신준석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30분쯤 뒤에 데이빗과 이정렬, 그리고 레믹에게까지 협조를 부탁했다.

거의 한 시간 반가량 훈련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골대 뒤편에 다 같이 주저앉아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Ji, 이상하게 들릴 질문이지만, 포지션 경쟁자인 얀센과 기예르모를 이렇게까지 돕는 이유가 뭐야?”

오해할 여지가 충분한 질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질문을 던졌던 데이빗이 얼른 뒷말을 달았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다. 그동안 내가 봐 왔던 그 어떤 선수들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이적을 생각하는 건가 싶다가도 이적할 마당에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이적 제안을 마다했던 레믹이 데이빗보다 더 눈을 반짝이며 정지우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

“유니온 시티? 그게 뭐?”

정지우의 짧은 답을 레믹이 얼른 받아 들고서 다시 물었다.

“오래전, 할아버지 때부터 유니온 시티를 응원해 준 관중들이 우리가 훈련하는 지금도 우리만큼 간절히 승리를 바라고 있을 거다. 노동의 대가로 표를 사면서.”

물을 마시던 라파엘이 힐끔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관중들에게 최선을 다한 경기와 승리를 안겨 주고 싶다. 비록 내가 서브로 있더라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레믹과 데이빗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긴, 어떤 선수가 서브로 앉아 있고 싶겠나.

“레믹, 골을 넣고 난 이후에 관중들이 네게 주는 환호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냐?”

레믹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

“우리는 그 환호에 답할 의무가 있어. 최선을 다한 경기와 승리는 그런 의미인 거지. 내가 골을 넣을 수는 없지만 레믹, 네가 넣은 골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것.”

레믹을 비롯한 선수들이 멍하거나, 혹은 감동한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여기 얀센, 혹은 기예르모가 나서도 네가 넣은 골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하고 싶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동료를 도와야 하지 않을까?”

“관중들을 위해서?”

“아니, 유니온 시티 FC를 위해서. 관중, 스태프, 동료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유니온 시티를 지켜 내고 있으니까. 축구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촐랑이 레믹이 정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악!

정지우가 그의 손을 마주쳐 준 다음이었다.

“내가 반드시 헤더로 골을 만들어 주지!”

놈이 엉뚱한 각오를 꺼내 들어서 정지우를 웃게 만들었다.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금요일에 마틴은 선발 선수와 포지션을 발표했다.

얀센

웨스 모건 라파엘 무둔바 스웰던

데니 카알 데이빗 꼼빠니

레믹 맥슨

정지우를 비롯한 동기 셋 모두 선발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신준석과 이정렬의 가족들이 서운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 서브에 전부 이름이 올라 있는 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경기 전날은 가능한 한 기름기를 뺀 음식을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부터 동기 셋은 긴장이 조금씩 올라오는 눈치였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거다.

게다가 그냥 개막전도 아니고, 축구의 성지라는 웸블리에서 벌어지는 커뮤니티 실드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 동시 중계되는 경기인 만큼, 전날 긴장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밤 11시에 중계한다고 하더라고. 우리 어머니도 보시겠대. 벤치에 있을 테니까 얼굴 한 번은 나오겠지?”

운동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서 박상민은 어쩐지 할 일 없이 배회하는 덩치 큰 놈팡이 느낌이었다.

“웸블리에서 첼시랑 경기를 하다니.”

이정렬 역시 흥분이 올라오는지 자꾸만 커다랗게 숨을 들이켰다.

이 시골 쥐들이 제대로 적응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마당에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을 때, 신준석과 이정렬의 가족들 역시 눈에 담긴 긴장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출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얼굴이기도 했고, 혹시나 교체로 들어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담겼다.

들어가지 않아도 걱정, 교체돼서 들어가도 걱정인 게 가족의 심정인 모양이었다.

하긴, 정지우도 FA컵 결승에 갈 때만큼은 긴장했었다.

역시 경험만큼 커다란 재산은 없다.

신윤희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는데 포도주였다.

박용근과 정지우를 제외하고 다들 한 잔씩 마시는 것으로 경기 전날 저녁을 견뎠다.

웃으며 평소와 같이 맞은 아침이었다.

그러나 오가는 대화에 꼬투리처럼 긴장이 달라붙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2시 경기여서 집에서 9시에 나가야 하고, 남은 가족들은 10시쯤 출발해야 했다.

동기 셋은 혹시나 몰라서 보약을 마다하고 홍삼 봉지만 입에 물었고, 주머니에 하나씩 여분을 넣었다.

경기 중에 마시는 물에 비타민을 넣는 시대이고, 약물 검사에 문제없는 수준이니 굳이 말릴 일은 아니었다.

밴 두 대로 움직이는 길이었다.

정지우와 박용근, 유정호가 바튼이 운전하는 밴에, 그리고 동기 3명이 앤디 킴의 밴에 올랐다.

구단에 도착한 정지우는 바로 준비된 버스로 움직였다.

선발 선수들을 위해 한 대, 그리고 서브 선수들과 스태프들을 위해 또 한 대, 그 외에 다시 스태프들과 장비를 위한 버스가 한 대.

총 세 대로 움직이는 길이었다.

오후 2시 경기였다.

오늘 누가 교체로 들어가게 될지 모른다.

어떤 스코어,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알 수 없다.

정지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들었다.

차창 밖으로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있었는데, FA컵 결승전 날과는 다른 느낌으로 보였다.

박상민의 모친은 거칠게 튼 손을 자꾸만 주물렀다.

영국에 간 아들이 오늘 경기에 후보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돈을 많이 받게 되었단다.

함께 일하던 이들이 축하한다고 해서 순댓국으로 한턱내기도 했다.

더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몸 건강하게, 하고 싶던 축구 원 없이 하면서 돈 벌어 좋은 배필 만나 잘 살면 그거로 만족한다.

아직 TV에서는 광고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박상민의 모친은 거실에서 울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눈가를 훔쳤다.

날이 밝을 때쯤 들어와 다시 오후 느지막이 나이트클럽으로 출근했었던 아들이다.

오죽이나 축구가 하고 싶었으면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그때 TV 화면에 웸블리의 모습이 가득 떠올랐다.

3층까지 가득 메운 관중들, 엄청난 함성.

박상민의 모친은 죄지은 것도 없는데 TV를 향해 손을 비벼 댔다.

“그저 우리 아들놈,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못 배웠어도 TV에 빌어 봐야 소용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렇지만 이런 정성이라도 보여야 마음이 놓이는 걸 어쩌겠나.

『유니온 시티 선수단이 웸블리에 도착했습니다.』

통로 앞에 버스가 멈춰 섰고, 선수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박상민의 모친은 얼른 고개를 디밀었다.

서양 선수들이 줄줄이 내렸다.

“여보! 여보!”

그때 안에서 박상민의 부친이 그녀를 불렀다.

TV 소리가 시끄러웠나?

모친이 힘겨운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박상민의 부친은 낡은 침대에서 상체를 세운 뒤였다.

“화장실 때문에 그래요?”

“나 좀 잡아 줘. 우리 상민이 시합 아니야?”

희끗희끗한 수염을 더부룩하게 단 박상민의 부친이 간절한 눈빛으로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자요! 여기 앉아요.”

모친은 바닥에 얇은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 남편을 부축해 그 위에 앉게 하고는 담요를 힘겹게 끌었다.

한 사람은 끌고, 다른 한 사람은 아픈 몸으로 노를 젓듯 해서 방문의 턱도 넘었다.

거실에 도착한 박상민의 모친이 남편을 소파에 기대게 하고 이불 하나를 덮어 준 다음이었다.

“어! 어!”

박상민의 부친이 손으로 화면을 가리켜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정지우였다.

양복 차림의 정지우가 덤덤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왜 그런지 박상민의 모친은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가슴이 채 진정되기 전이었다.

신준석이 그 뒤를 따라 내렸고, 이어서 이정렬이 화면에 보였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 때문에 박상민의 모친이 가슴에 손을 얹었을 때였다.

양복을 차려입은 박상민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버스에서 내렸다.

나이트클럽에 나가면서도 못나고 부족한 부모 원망 한마디 안 하던 아들, 그리고 저렇게나 큰 경기에 뽑혀 나갈 정도로 축구를 잘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박상민의 모친은 TV를 향해 손을 모으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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