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33화 (133/262)

제8장. 그거 말고 우리가 하던 축구. (2)

월요일에 정지우는 3명의 동기들과 함께 성 마테오 병원으로 향했다.

구단이 통역 직원을 보내 주어서 솔직히 정지우가 굳이 갈 이유는 없었다.

좋게 말하면 배려이고, 나쁘게 생각하자면 혹시나 동기들의 답변을 정지우가 유리하게 답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거 철저해서 나쁠 거 전혀 없는 거니까.

메디컬 테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정지우는 릴리의 병실로 움직였다.

복도에 메기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녀가 복도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 보이면 또 안 보여서 걱정되긴 한 거다.

창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고개를 돌렸던 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릴리가 코를 찡긋하는 미소와 함께 정지우에게 손을 뻗었다.

“들어가도 돼?”

안에 아무도 없어서 창을 통해 질문을 던졌고, 릴리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정지우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어때? 공주님?”

“좋아.”

릴리의 팔에 걸린 링거줄이 애처롭게 보였지만 정지우는 내색하지 않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왜 혼자 있어?”

“병원에서 사인을 필요로 하는 게 있대.”

릴리의 엄마인 메기는 업무과에 갔던 모양이었다.

이런 건 별로 좋지 않다.

수술이나 특별한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서였다.

“Ji, 커뮤니티 실드와 새로운 시즌이야.”

“커뮤니티 실드도 알아?”

“응. 닥터 데이지가 알려 줬어. 그 경기를 시작으로 유니온 시티 정규 리그가 이어진다고.”

또랑또랑 말을 하는 파란 눈의 아가씨다.

가끔 코가 가려워서 손등으로 문지르는 숙녀.

“Ji, 나…….”

“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고?”

“응.”

릴리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니 바깥으로 그나마 내려왔던 머리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응원도 듣고 싶고, Ji의 플레이도 직접 보고 싶어.”

“엄마와 닥터 데이지에게 의논해 볼게.”

“닥터 데이지는 요즘 기분이 안 좋아.”

“왜?”

“몰라. 마미 말로는 여자는 가끔 신경질적으로 변할 때가 있대. 그건 물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서, 나도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될 거라고 했어.”

“그렇구나. 나는 뭐……?”

“맞아. Ji는 남자니까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야.”

정지우는 그만 흐느끼는 것처럼 웃고 말았다.

살리고 싶다. 정말이지 20대의 릴리와 30대의 나이가 된 릴리를 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쯤 지금의 대화를 들려주며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Ji, 마미와 닥터 데이지에게 꼭 의논해 줘.”

“알았어. 꼭 그럴게.”

정지우가 답을 할 때였다.

메기가 조금은 지친 눈빛으로 병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이에요.”

“반가워, Ji.”

가볍게 인사를 나눴고, 동기들의 메디컬 테스트가 있다는 등의 대화를 나눴다.

릴리가 자꾸만 눈짓을 해서 정지우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메기,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지금?”

“잠깐이면 돼요.”

메기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 릴리가 일부러 만든 게 분명한 미소를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 가 봐야 할 것 같아. 또 올게.”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마.”

“오케이.”

릴리를 가볍게 안아 준 정지우는 메기와 함께 복도 한쪽의 휴게실로 걸었다.

“릴리가 경기장에 오고 싶다고 메기에게 물어봐 달래요.”

메기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닥터 데이지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 백혈구 수치와 호르몬 수치들이 갑자기 이상해져서 요즘 신경을 부쩍 쓰고 있거든. 어려워, Ji.”

힘겨움과 서러움이 폭발한 것처럼 메기가 느닷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그저 도움이 될까 하고 물었던 건데, 상처가 됐다면 사과할게요.”

“아냐. 절대로 Ji에게 서운한 것 없어. 오히려 이렇게 찾아와 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 절대, 절대로 미안할 일 없어.”

정지우는 팔을 뻗어 눈물을 닦아 내는 메기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나도 릴리와 피크닉 가고 싶어. 함께 경기장 가고 싶고. 지난 외출 때 릴리가 기뻐하던 얼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Ji!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젠 잘 모르겠어.”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충분히 잘해 내고 있는 거예요.”

5분쯤 지난 뒤에 메기는 후련해진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고마워, Ji.”

“릴리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어요. 내가 릴리를 내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알죠?”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눈 정지우는 메기와 헤어져 동기들에게 움직였다.

다음 날인 화요일에 유니온 시티는 한국인 선수 4명의 영입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우리는 이미 Ji와 함께 지난 시즌을 보냈고, FA컵 우승을 이뤄 냈습니다. 나와 우리 구단의 모든 관계자는 Ji의 헌신과 능력에 감동했으며, 이번 영입을 통해 좀 더 나은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마틴의 말이 끝나고, 엄청난 숫자의 기자들 앞에서 정지우를 비롯한 3명의 동기들이 유니온 시티의 유니폼을 입었다.

터지는 플래시와 쏟아지는 질문들.

국내 기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영국을 비롯한 외신 기자들의 반응 역시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확실히 질문은 정지우에게 집중되었다.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기대가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각오나 목표를 말해 주겠습니까?”

“지난 6개월간 나는 훌륭한 코치, 스태프, 동료들, 홈 관중들과 함께 환상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시즌 역시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꽤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정지우는 시종일관 모범적인 답으로 기자들을 상대했다.

정식 기자회견이 끝났다.

한국의 방송국과 신문사들이 구단에 별도의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정지우는 모두 거절했다.

신준석과 박상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정렬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알던 기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에이미가 정해 준 장소에서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의 방송과 신문, 인터넷 포털의 메인이 유니온 시티와 4명의 한국 선수들 계약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줄줄이 새로운 기사가 달라붙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최초 동양인 골키퍼 기록을 세울 것이라는 기사는 그나마 좀 낫다.

최근 커뮤니티 실드가 새롭게 영입한 선수들의 시험 무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선수 4명이 동시에 뛰는 것을 볼 가능성이 매우 높다란 기사까지도 봐줄 만했다.

그러나 예상 포지션과 포메이션을 설명하며, 평가전에서 골을 넣은 것으로 봐서 이정렬의 멀티 골을 기대할 수 있다는 기사부터는 좀 너무 나간다 싶은 느낌이었다.

좋은 기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박상민의 집을 덮치다시피 찾아가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소감을 묻고, 어머니에게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올린 기사도 있었다.

그것까지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박상민의 모친이 빌딩의 계단과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사실까지 들추면서 청소 반장을 별도로 인터뷰하는가 하면,

‘돈이 있다면 이 건물 사시겠죠?’

하는 질문을 핑계로, 박상민이 모친을 위해 그 빌딩을 매입할 거라는 기사까지 올렸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지?”

노트북을 통해 기사를 접한 동기들이 아예 고개를 저어 댔다.

기사만이 아니었다.

계약일 오후부터 구단 홍보실로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 프로그램에서의 취재 요청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었다.

구단 홍보 차원에서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취재 요청에 정지우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3명의 동기, 혹은 박용근과의 인터뷰를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가 있는 게 문제였다.

당연하게 모두 거절하는 것으로 끝냈다.

신준석과 이정렬의 가족들은 알고 지내던 이들을 통한 출연과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반응은 죽여줬는데, 그만큼 당사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곤혹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 날부터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구단에서 단체로 중계방송에 사용한다는 사진 촬영도 마쳤다.

훈련 중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 협조 요청 없이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제지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은 없었다.

역습의 패턴이 어느 정도 익혀졌다고 여겼는지 평가전 이후에는 수비 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라인! 라인을 보라고!”

한 팀을 6명으로 해서 하는 미니 게임이었다.

공수가 바뀔 때마다 마틴은 흐트러지는 수비 라인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무둔바! 왼쪽의 Jun을 기준으로 라인을 잡아!”

“스웰던! 혼자서 내려가면 다른 동료들이 모두 뚫리잖아!”

그렇게 30분가량 수비 훈련을 마친 뒤에는 전술판을 가져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설명해 주고 다시 훈련을 반복했다.

커뮤니티 실드를 열흘쯤 남긴 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동기들이 방으로 올라가자, 정지우는 서재에 있는 박용근에게 움직였다.

리저브 팀 훈련이 별도로 진행되면서부터 낮에는 얼굴 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

탁자 위에 전술판이 그려진 A4 용지가 수북하게 놓였는데, 프리미어리그에서 만나게 될 팀들의 이름이 쭉 적혀 있었다.

“경기 분석하시는 거예요?”

“음! 챔피언십과는 달라서 아무리 해도 넘기 어려운 팀들이 있다. 상위 네 개 팀의 경우에는 실점도 각오해야 할 거고.”

골키퍼인 정지우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상위 팀들의 공격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로 들렸다.

“그나마 네가 있어서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만, 그만큼 너에게 부담이 너무 집중돼. 거기에 리그 경기 전체를 골키퍼의 능력에 의지하게 되면 수비가 결국 나태해지기도 한다.”

“아! 그래서 커뮤니티 실드에 얀센을 내보내려고 하셨던 건가요?”

박용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안했다. 네가 없는 경기에서 첼시란 강팀이 어떤 느낌인지 수비수들이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단판으로 끝나는 토너먼트와 리그의 차이점을 실감할 필요도 있고.”

말을 마친 박용근이 정지우의 앞으로 전술판이 그려진 용지를 몇 장 놓아 주었다.

“이번 시즌은 초반에 절대 강자 없이 물고 물리는 시즌이 될 확률이 제법 높다. 그런 의미에서 승격 팀인 우리에겐 초반이 무척 유리하지.”

정지우가 전술판에 그려진 포메이션과 명단을 살피는 앞에서 박용근이 말을 이었다.

“그렇더라도 올라갈 팀은 결국 올라가고, 떨어질 팀은 분명 떨어진다. 그러니 우리 같은 승격 팀은 초반에 일정 승점 이상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밀어붙여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거다.”

“다른 팀들이 우리의 역습 패턴에 적응할 때까지 몇 경기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경기력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인데, 선수층이 엷은 데다 부상 선수가 나올 것도 감안해야 하고. 그러니저러니 해도 우선 초반에 승부를 걸고 벌어지는 상황을 체크하며 대응해야겠지.”

박용근의 말에 틀린 것이 없어서 정지우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지우야.”

“예, 감독님.”

“이번 시즌에 수비수들을 조절하는 것은 네 능력이다만, 무실점을 위해 수비수들을 무리하게 몰아붙이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박용근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이야기를 건넬 때 흔히 하는 버릇 중 하나였다.

“상위 다섯 개 팀의 공격력이 10이라고 가정할 때, 내가 판단하는 너의 골키퍼 능력 역시 10이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 수비 라인에 대해 점수를 매기라면 솔직히 말해 6이고, 잘 줘야 8을 넘기지 못한다.”

정지우의 예상보다 좀 더 야박한 평가였다.

“너의 지시에 따라 8 이상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을 계속 강요하면 어느 순간에 퍼져 버리게 된다. 지난 동영상을 보면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만약 수비수들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보이면 다음 경기의 골키퍼를 교체하자고 내가 조언할 거다.”

“예. 최선을 다해서 조절해 볼게요.”

“그래.”

박용근과 앞으로 마주칠 팀들에 대한 자료들을 추리면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준석과 박상민이 난처한 얼굴로 들어섰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정지우의 질문에 신준석이 입을 열었다.

“기사가 좀 이상한 게 나서. 어차피 보게 되실 거니까 미리 말씀드리려고.”

정지우는 서재 한쪽의 컴퓨터를 켠 후에 신준석이 알려 주는 한국의 포탈을 열었다.

딸각, 딸각.

그리고 스포츠 부분을 찾아 마우스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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