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32화 (132/262)

제8장. 그거 말고 우리가 하던 축구. (1)

공을 잡은 정지우는 페널티 에어리어 끝으로 달렸다.

이전에는 레믹이 중앙선 부근까지 내려와 받았고, 그렇게 역습 골을 만들었었다.

페널티 에어리어 끝까지 달려간 정지우는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휘이이이익!

공은 박상민을 맞힐 것처럼 일직선으로 낮고 빠르게 날아갔다.

터억!

공을 받은 박상민이 바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퍼어어어엉!

이정렬을 향해 강하게 차 주었다.

쭉 날아가던 공이 절묘하게 휘며 바넷 FC의 진영 왼편으로 떨어졌고,

“우와아아아아-!”

그 순간, 엄청난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지켜보던 유니온 시티 동료들마저 탄성을 터트릴 만큼 강하고 멋진 패스였다.

투우욱!

공을 잡은 것은 이정렬이었다.

레믹과 카알, 데이빗이 골대를 향해 달려들었는데, 이정렬까지 공격수 넷에 수비수 셋의 상황이었다.

투우욱!

이정렬은 데이빗에게 공을 넘기고 골대로 뛰었다.

수비수 한 명이 레믹을,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이 카알과 데이빗을 향해 달려들었다.

투우욱!

데이빗은 농구처럼 공을 위로 훌쩍 띄웠다.

터억!

이정렬이었다. 그가 가슴으로 공을 받아 떨어트렸고,

퍼어어엉!

공이 그라운드에 닿기도 전에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골키퍼가 발을 뻗었지만, 공은 완벽하게 코너를 파고들었다.

철렁!

“이예에에에에-!”

관중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골을 넣어서가 아니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빠른 역습과 환상적인 패스를 통한 골이라는 것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동료들이 달려가 이정렬의 머리를 감싸 안을 때, 평가전에 어울리지 않는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뜨겁게 달궜다.

신준석은 이정렬에게 달려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솔직히 멋진 골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신준석이 그런 패스를 받았더라도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슈팅이기도 했다.

스크립터가 분명 있음에도 박용근은 조금 전에 펼쳐졌던 환상적인 역습을 작은 수첩에 메모했다. 그러면서 공격에 참여했던 네 선수의 동선을 X 자를 이용해 그려 냈다.

좀 더 빨라야 한다.

그가 보았던 프리미어리그 경기 영상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FA컵에서 아스널과 리버풀까지를 이겨 낸 유니온 시티다. 그러나 그것은 단판 승부였다. 리그에서 감당해야 할 38경기를 계산한다면 유니온 시티는 아직 객관적으로 그들에게 밀린다.

수비도 문제다.

박용근은 날카롭게 시선을 들어 신준석을 살폈다.

그래서 그는 마틴이 흐뭇한 속내를 감추고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정렬의 골이 주는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였을까?

바넷 FC는 그때부터 투지가 꺾였고, 거칠던 플레이마저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역습의 효과는 또 있었다.

자신을 얻은 이정렬과 레믹이 좌우로 위치를 바꾸어 가며 휘저어 댔는데, 이게 정말 효과가 죽여줬다.

잘될 땐 뭘 해도 잘되는 거다.

이정렬과 레믹을 따라 데이빗과 카알 역시 위치를 수시로 바꾸었는데, 4명이 동시에 위치를 바꿀 때면 정지우마저 놀라서 바라볼 정도였다.

경기가 잘 풀리고, 저렇게 의도했던 플레이가 딱딱 먹혀들면 뛰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심지어 뛰면 뛸수록 쾌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이예에에에에!”

또다시 골이 터졌다.

바넷 FC의 수비수 6명을 상대로 카알, 레믹, 데이빗, 이정렬이 짤막한 패스들을 주고받았고, 마지막에 공을 받은 레믹이 골을 성공시킨 거였다.

“준석아!”

정지우는 레믹에게 움직이려는 신준석을 불러 세웠다.

“뭘 그렇게 매번 뛰어가?”

“가야 되는 거 아냐?”

“나랑 하이파이브하는 거로 때워!”

정지우는 다가가서 신준석의 머리통을 툭 때려 주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긴 수비수도 봐주냐? 나 전에 있던 팀은 골키퍼 빼곤 무조건 가서 축하해 줘야 했는데?”

세레머니를 마친 동료들이 중앙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도 그래. 너 이제 벌금 맞는 거야.”

“뭐?”

“세레머니 빠졌잖아!”

“야, 이 씨……!”

“멋진 수비 한 번은 펼쳐 줘야 봐주지 않겠냐?”

정지우가 짓궂게 웃는 것을 본 신준석이 기가 막힌 얼굴로 따라 웃었다.

“야! 우리 축구하자!”

“지금 하는 건 축구가 아니고 뭐냐?”

“그거 말고 우리가 하던 축구.”

중앙선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마주 서고 있어서 더 긴 이야기를 하는 건 어려웠다.

“전국대회 우승할 때 했던 축구, 우리 그거 하자. 준석아, 나 프리미어리그 우승하고 싶다.”

말을 마친 정지우가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왜 그런 걸까?

정지우의 말을 듣는 순간 신준석은 울컥하기도 했고, 목 뒤에서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했으며, 뭔가 짜릿한 것이 가슴 안에서 폭발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축구?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때 했던?

기억난다.

정말이지 악착같이 뛰던 그때가.

프로 선수가 돼서 해외에 나갈 정도로 실력이 늘긴 했지만, 그때처럼 열정적으로 뛰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 브라질전 전반에서 잠시 그랬었다.

신준석이 멍하니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야! 신준석!”

정지우의 고함이 버럭 그를 흔들었다.

“우-!”

그리고 그의 시선 앞에서 바넷의 10번 선수가 공을 몰고 달려오고 있었다.

신준석은 중앙에서 달려드는 바넷 FC의 선수를 손으로 가리키며 10번 선수의 앞을 막아섰다.

콰악! 터억!

상대 선수는 대번에 신준석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우리! 우리 축구할 거다!’

신준석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넌 내 보상금이야! 내가 내야 할 벌금!’

툭툭!

보인다. 상대 선수가 어떻게 공을 빼내려고 하는지!

거칠게 팔로 밀치는 것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패스하려는 거다!

투욱! 콰아악!

10번 선수가 안쪽으로 차 주는 공을 향해 신준석이 몸을 날렸다.

터억!

“우와아아아-!”

발끝에 공이 걸렸고, 흘러 나간 공을 무둔바가 가로채고 있었다.

신준석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움직였다.

투욱!

그래서 무둔바가 건네주는 공을 받았다.

터억! 퍼어어엉!

연습한 그대로였다.

신준석은 박상민을 향해 공을 바로 넘겨주었다.

퍼어어어엉!

그리고 그 공이 길게 넘어가 이정렬 앞에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예에에-!”

관중들의 함성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같은 함성인데도 상황에 따라 소리가 조금씩 다른 거였다.

투욱!

이정렬이 공을 받아서 몸을 한 번 틀었고,

퍼어어엉!

그대로 슛을 날렸다.

철렁!

골대 구석을 파고든 멋진 골이었다.

“이예에에에에에에-!”

고개를 돌린 곳에서 정지우가 피식 웃고 있었다.

“이거 하자고! 이런 거 하자고 그랬던 거지!”

“빨리 가서 세레머니나 해! 벌금 두 번 내지 말고!”

아차차!

벌금보다 동료들에게 오해받기 싫어서라도 세레머니는 빠지면 안 되는 거다.

신준석이 이정렬을 향해 몸을 돌릴 때였다.

무둔바가 커다란 얼굴로 신준석에게 다가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이빗, 카알, 그리고 데니까지 모조리 신준석에게 다가와 머리를 기분 나쁠 정도로 세게 때리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잘할 걸 그동안 왜 그렇게 이상하게 뛰었어?’ 하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묘해서 고개를 돌린 곳에서 정지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다음에 또 빌빌거리면 그때는 확 깨물어 버린다!”

정지우가 두 손으로 신준석의 머리를 잡아서 이마를 들이댔다.

번들거리는 눈!

어떤 위기에서도 골대를 지켜 주는 골키퍼!

이런 선수와 한편인 거다.

기분 죽여준다! 맞아! 이런 거였지!

브라질전 전반과 같은 경기, 이렇게 동료들과 함께 무언가를 이루는 경기를 하고 싶었었지!

그래서 영국에 오고 싶어서 그렇게 졸랐던 거잖아!

“이야호오!”

신준석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미친놈처럼 터트렸다.

투우욱!

정지우가 세차게 뒤통수를 갈겨 주고는 골대로 돌아갔다.

내내 속내를 감추던 마틴이 결국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팀 스크립터가 내민 스톱워치를 보고 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신준석의 패스부터 골을 넣을 때까지 꼭 4.1초가 걸렸다.

소름이 쭉쭉 끼치는 일이었다.

더 미칠 것 같은 것은 그 역습 과정에서 보여 준 레믹과 데이빗, 카알, 데니의 움직임이었다.

빠르다.

저놈들이 원래 저렇게 빨랐던 놈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움직임에 바넷 FC의 수비수들이 분산되어서 이정렬이 골을 넣기 좀 더 수월한 것도 있었다.

마틴은 관중들이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았다.

기대하는 거다.

얼른 리그가 시작되어서 조금 전에 보았던 멋지고 환상적인 플레이를 프리미어리그에서 보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 흥분이었다.

지금의 마틴처럼 말이다.

평가전은 6 대 0으로 끝났다.

경기를 마치고 그라운드를 빠져나올 때, ‘Ji! 프리미어리그야! 그곳에서도 우릴 지켜 줘!’ 하는 목청 큰 남자의 고함이 들렸다.

라커룸의 분위기야 당연히 최고였다.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곧 맞을 프리미어리그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정지우는 샤워를 마치고 동기들과 함께 밴으로 향했다.

동기 셋이 흥분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실력이 과연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먹힐까?

아직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단판 승부에서 경험했었던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실력이 그만큼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굳이 동기 셋의 바람을 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리그에 가면 매주 마주쳐야 할 팀들이어서 곧 알게 될 일이었다.

평가전 다음 날, 빌의 가족이 정지우의 집을 방문했다.

평소보다 차려입은 것이 분명했지만, 아직 영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동기 셋과 신윤희가 보기에는 편안해 보일 복장이었다.

“Ji! 선물을 가져왔어.”

빌의 아버지 토미가 종이 박스에 담긴 맥주를 건넸다.

6병씩 담긴 상자가 2개이니 12병이었다.

거기에 그의 부인 샌디가 양초를 내밀었다.

“정말 고마워요!”

정지우는 약간은 과장한 표정으로 선물들을 받았다.

“인사하세요.”

그리고 박용근부터 함께 지내는 일행들을 소개해 주었다.

김밥, 전, 잡채, 불고기, 그리고 몇 가지 마른반찬, 김치를 각각 커다란 접시에 담아 놓아서, 각자 접시에 적당하게 덜어 먹는 저녁이었다.

축구 이야기가 식탁을 떠돌았다.

정지우가 토미와 빌의 질문을 우리말로 던지면 박용근과 동기 셋이 답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Ji가 오고 나서 나는 일이 힘든 걸 전혀 느끼지 못하지요.”

입을 우물거리며 불고기를 삼킨 토미가 건넨 말이었다.

“나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랍니다. FA컵에서 아스널을 꺾었을 때 나도 그렇지만 우리 동료들 모두 눈물이 났었습니다. 결승은 말할 필요도 없었구요.”

토미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그때의 감정을 표현했다.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유니온 시티를 응원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샌디, 빌과 함께 응원합니다. 그래서 유니온 시티 축구팀은 나의 인생과 늘 함께였습니다.”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다.

그런데 말을 듣는 박용근과 동기 셋에게는 숙연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경기를 통해 Ji가 전해 준 감동은 우리 세 사람에게 절대로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입니다. 우리 동료들 모두 한국에서 온 영웅들이 보여 줄 경기를 기대합니다.”

번역하기 낯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이 정도에서 그만하라고 말릴 만도 한데, 샌디는 오히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토미의 말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어제의 평가전을 보고 난 후, 동료 몇 명과 모여 파티를 했었지요. 우리 모두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분위기가 가라앉기 전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토미! 다음 시즌을 위해 건배할까요?”

정지우가 맥주를 들며 제안한 말이었다.

가벼운 수준이었는데 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며 맥주병을 앞으로 들었다.

“내 생애 최고의 시즌을 기대합니다! 이런 희망을 가져다준 Ji와 마스터,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Lee, Sang, Jun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정지우가 한국말로 다시 전달하는 동안 토미가 잠시 기다렸다.

정지우가 토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건배!”

그가 맥주병을 내밀었고, 다 같이 들고 있던 병을 움직여 그와 마주쳤다.

식사가 끝났다.

차를 마셨고,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빌! 내가 선물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정지우는 방에 들어가서 준비했던 선물을 들고 나왔다.

빌은 아직 작은 아이다. 그래서 정지우는 빌의 눈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췄다.

“이건 FA컵 결승에서 내가 사용했던 장갑.”

“세상에! Ji! 이건…….”

빌이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정지우는 서양식 종이봉투를 하나 더 건넸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빌이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커뮤니티 결승전 티켓과.”

“오우!”

샌디가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다음이었다.

“유니온 시티 시즌 티켓.”

“오 마이 갓!”

토미의 굵직한 놀라움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왜 그래? 빌? 우리 친구잖아.”

눈물이 고인 빌이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힘들 때 힘이 되어 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야. 설마 이런 걸로 울거나 하는 건 아니지?”

“난 Ji가 너무 위대한 선수가 돼서 날 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소리가 어딨어? 우리 친구라면서?”

그토록 어른스럽던 빌이 정지우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헤이, 친구! 설마 울어?”

정지우가 빌을 안고 일어서자, 토미와 샌디가 팔을 커다랗게 벌리며 다가왔다.

“고마워요, 토미. 고마워요, 샌디.”

“우린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우린 그저 Ji의 플레이를 보면서 감사했을 뿐이야!”

토미의 말을 유정호가 나직하게 전해 주었다.

동기 셋이 엄청나게 감동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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