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2)
순조롭게 모든 것이 흘러갔다.
이정렬의 이적이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어왔고, 두 번째 평가전 선발에 동기 셋이 또다시 포함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게 사흘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버렸다.
그리고 돌아온 두 번째 평가전은 레드 블레이트에서 열렸다.
토요일 오후였다.
주말 오후라 그런 걸까? 아니면 경기가 고파서였을까?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예상보다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고, 정규 시즌 같은 응원을 펼쳤다.
바넷 FC 선수들과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우와아아-!”
짝짝짝짝짝짝짝짝.
커다란 함성과 박수 소리가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심장이 얼마나 커다랗게 뛰는지, 박상민은 귀에서 핏줄 울리는 소리가 ‘뚝뚝’ 하고 들리는 지경이었다.
동료들을 따라 라커룸을 나설 때까지는 홈그라운드라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노츠 카운티와의 평가전을 경험하며 ‘응원이 엄청나다더니 별거 없네!’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선수 통로를 나올 때 들려오는 엄청난 함성에 심장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더니, 그라운드로 나섰을 때는 아예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덩치가 커다란 영국 남자들이 팔을 앞으로 뻗어 내고 응원 구호를 불러 댄다.
TV에서 봤었다. 안다.
그런데 직접 서서 그런 응원을 받고 있으려니 심장이 ‘쿵쾅쿵쾅’거리고, 자꾸만 호흡이 거칠어졌다.
“후! 후!”
박상민은 짧게 짧게 숨을 뱉어 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긴장을 털어 내고 싶었다.
짧은 행사가 끝나고 바넷 FC 선수들이 줄줄이 지나가며 악수를 나누는 것처럼 손을 잡아 줬다.
“우와아아아-!”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향해 움직이자 관중들이 또다시 함성을 터트렸다.
벤치에서 보기에 오른쪽이 유니온 시티, 왼쪽이 바넷 FC였다.
바넷 FC 선수들이 어딘가를 힐끔거렸는데 정확히 어디를 보는 건지를 알기는 어려웠다.
‘이런 거 별거 아냐. 예전에 뛰었던 경기랑 다를 거 없어.’
박상민은 몇 번이나 숨을 토해 내면서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동안 소속 팀에서 경기를 해 왔던 경험 덕분일까?
이정렬과 신준석은 제법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포르투갈 리그에 있었던 신준석이 좀 더 편안해 보였다.
삐이이이익!
그때 주심이 부는 휘슬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우와아아아-!”
이곳 관중들은 목청이 특별한 건가?
박상민은 공을 향해 움직였다.
정지우는 박상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몸이 굳은 것처럼 보이더니 실제로도 뛰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이 정도는 웃으며 이겨 내야 해!’
오늘 홈 관중들이 터트린 함성은 응원 연습처럼 느껴질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동안 경기를 뛰지 못했던 탓인지 박상민은 관중들의 함성에 짓눌린 모양이었다.
오늘 수준의 응원에서 저 상태라면 정규 리그에서, 그것도 중요한 승부처에서는 아예 얼이 빠져 버린다.
우습지만, 이런 긴장감을 못 이겨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라운드를 떠나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연습 때는 펄펄 날던 선수가 막상 경기에 내보내면 패스 하나 자신 있게 차 주지 못하는 거다.
설마 박상민이? 저 통뼈가?
정지우는 박상민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콰아악!
박상민이 공을 잡는 순간이었다. 바넷의 9번 선수가 거칠게 달려들어서 어깨를 들이받았다.
콰다당!
“우-!”
제대로 버티기는커녕 박상민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공은 이미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날아간 뒤였다.
‘이게 반칙이 아니라고?’
박상민이 주심을 보았는데 그는 벌써 공을 따라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주심만이 아니다. 동료 선수들조차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젠장!
박상민이 일어나 공을 향해 뛰어갈 때였다.
콰악! 털썩!
수비를 향해 달려든 신준석이 얼굴을 감싸고 옆으로 쓰러졌다. 분명 상대 선수의 팔꿈치에 맞았다.
“우-!”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던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어 댔다.
그런데도 주심은 또 ‘무슨 엄살을 그렇게 부려?’ 하는 태도로 무시했고, 당연하게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헉헉!”
박상민은 수비를 돕기 위해 골대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 직후에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바넷의 7번 선수와 무둔바가 서로의 팔과 어깨를 끼운 자세로 공을 뺏으려 다투는 모습이었다.
격투기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한다고?’
박상민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사이 공이 흘렀고, 라파엘이 빠르게 걷어 냈다.
와락! 와라락!
박상민과 바넷 FC 선수 둘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공은 박상민이 먼저 잡았다.
콰아아악!
그리고 그 직후에 섬뜩한 태클이 박상민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휘이이익!
박상민이 몸을 솟구쳤는데,
터억!
상대 선수의 발바닥에 발목이 걸려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끄으응!”
끔찍한 고통이었다.
삐이이익!
박상민이 발목을 잡고 그라운드를 뒹굴 때,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무섭다. 억울하다. 그리고 서럽다.
이 정도라면 바로 퇴장을 줘야 하는 수준의 반칙인 거다.
“우우-!”
관중들의 야유가 귀를 파고들 때 팀 닥터와 어시스턴트, 그리고 유정호가 뛰어왔다.
“상민아! 통증을 설명해 봐!”
유정호의 음성이 들릴 때쯤에야 박상민은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발목을 찍힌 것 같아요.”
“돌아간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팀 닥터가 유정호의 말을 전해 들으며 박상민의 발목 몇 곳을 눌렀다.
주심이 다가와서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가라는 의미로 팔을 뻗었다.
“일단 나가자. 나한테 기대.”
박상민은 유정호와 어시스턴트의 어깨에 양팔을 걸고 쩔뚝거리며 그라운드를 빠져나왔다.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우와아아아-!”
함성이 들렸고,
“우우-!”
하는 야유도 터져 나왔다.
처음 느꼈던 것과 달리 통증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팀 닥터가 스프레이 형태의 근육 진통제를 뿌려 준 뒤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갈게요. 괜찮은 거 같아요.”
팀 닥터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본 박상민은 터치라인 앞에 서서 주심의 신호를 기다렸다.
공은 바넷 FC 진영에서 돌고 있었다.
레믹이 카알에게, 카알이 데이빗에게 공을 건네주었고, 데이빗은 반대편에 있던 데니에게 기다랗게 공을 차 주었다.
툭툭!
공을 받은 데니가 잠시 시간을 끌다가 아예 수비수인 라파엘을 향해 공을 넘겼다.
그때 주심이 들어와도 좋다는 손짓을 보였다.
박상민은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데이빗이 그에 맞춰 움직여서 포메이션을 바로잡았다.
라파엘은 골키퍼 얀센에게 공을 넘겨주었고, 얀센이 웨스 모건에게, 웨스가 바로 앞에 있던 데니에게 공을 돌리며 유니온 시티는 진영을 가다듬었다.
바넷 FC 선수들이 공을 잡은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다가 뒤로 물러나곤 했다.
정지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미드필드에서부터 바넷 FC에 조금씩 밀린다.
상대 팀의 거친 플레이에 위축된 탓이었다.
박용근이 우려했던 바로 그런 모습이기도 했다.
수비에서 스웰던이 했던 것처럼 박상민이 중앙 지역에서 버텨 주길 바랐다. 그런데 녀석이 오히려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거였다.
평가전이 아니라 정규 리그였다면?
잔인한 답이겠지만, 바로 교체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공은 데이빗과 카알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만 있었다.
축구란 참 묘하다.
한 번 분위기를 타면 그것을 꺾기가 정말 어렵다.
골키퍼인 얀센은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스웰던마저 서브로 앉아 있는 상황이어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선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투욱!
무둔바가 신준석에게 공을 넘겼다.
투우욱!
신준석은 훈련했던 것을 보이겠다는 것처럼 박상민에게 바로 공을 차 주었다.
터억!
박상민이 공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정렬과 레믹이 상대 팀의 골대를 향해 달렸다.
‘패스해!’
주춤!
이정렬에게 공을 넘기기는 늦었다. 그렇다면 카알에게라도 공을 보내 주었어야 했다.
그렇게 하면 레믹과 이정렬에게 공을 넘길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라도 있었다.
콰아악!
그러나 박상민이 몸을 돌리는 그 짧은 틈에 또다시 태클이 들어왔다.
터억!
박상민이 움찔하는 사이 공을 빼앗겼고, 바넷 FC 선수가 공을 얻어서 달렸다.
마틴이 유정호를 통해 박용근과 대화하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되면 교체밖에 없는 거였다.
그라운드에 리더가 없었다.
평소에 팀을 이끌던 데이빗은 공수를 연결하기에도 버거운 모습이었다.
하긴! 한국에서 온 동기 셋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데다 웨스와 데니라는 새로운 선수와 함께이니, 당장은 호흡을 조율하기도 바쁠 거였다.
전반이 20분쯤 흐른 시간이었다.
팀 스크립터에게 무언가를 지시한 마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에 앉아 있는 선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상민이 이렇게 교체되는 건가?
“Ji! 몸을 풀어!”
그런데 뜻밖에도 마틴은 정지우의 출전을 지시하고 있었다.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복 상의의 지퍼를 내렸다.
“오오-!”
벤치 근처의 관중들이 기대에 찬 함성을 터트린 직후였다.
팀 스크립터가 대기심에게 다가가는 동안, 정지우는 골키퍼 장갑을 끼고 벤치를 벗어났다.
마틴이 정지우를 붙든 것처럼 잡고는 터치라인으로 함께 걸었다.
“다음 경기가 커뮤니티 실드다! 이대로라면 Sang(상)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려! Lee나 Jun(준)도 그렇고! 영국 리그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쳐 줘!”
“우와아아-!”
관중들의 함성을 뚫고 마틴의 말이 들렸다.
정지우의 귀에 대고 고함치듯 뜻을 전한 마틴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공이 골라인 밖으로 나가자 대기심이 붉은색 숫자 1과 파란색 숫자 13이 적힌 패드를 높게 들었다.
“와아아아아-!”
얀센이 걸어 나오는 동안 함성이 좀 더 커졌다.
얀센과 손을 마주친 정지우가 그라운드로 들어선 직후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홈 관중들이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지금까지의 응원이 애교처럼 보일 정도로 광적인 정지우의 응원가였다.
박상민은 허리에 손을 올린 자세로 바넷 FC 선수들을 살폈다. 그리고 알았다.
바넷 FC 선수들이 뭘 그렇게 힐끔거렸는지 말이다.
정지우였다!
그들이 골대를 향해 움직이는 정지우를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야박하게 굴던 주심까지 존중한다는 표정으로 정지우가 골대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거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레드 블레이트에 메아리치는 광적인 응원가를 들으며 박상민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정지우는 혼자 지냈다.
당연하게 다른 동기들이나 박용근이 없었다.
그런데도 외롭고 힘들었을 이곳에서 홀로 저런 위치를 만들어 냈다.
소름이 쫙 끼치는 듯한 짜릿한 충격이 박상민을 덮쳤다.
정지우가 골포스트 양쪽을 차례로 걸었고,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응원가가 끝나는 그 멋진 타이밍에 맞춘 것처럼 몸을 솟구쳐 크로스바를 툭 쳤다.
“이예에에에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함성이었다.
골대 앞에 선 정지우가 공을 받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서 선수들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피식!
정지우와 눈이 스쳤을 때 박상민은 분명하게 저런 느낌의 웃음을 보았다.
‘뭐가 그렇게 겁나? 고작 4부 리그인데?’
박상민의 가슴에서 커다란 다이너마이트가 쾅 하고 터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속이 후끈 달아올랐다.
투욱!
정지우가 라파엘을 향해서 공을 차 주었다.
고작 수비수에게 패스한 게 전부였다.
“이예에에-!”
그런데도 골이 터진 것처럼 홈 관중들이 소리를 질렀고,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박상민이 처음 듣는 또 다른 응원을 펼쳐 냈다.
몸이 굳냐고?
아니!
박상민은 후끈 달아올라서 공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헤이!”
정지우가 버럭 지른 고함이 들렸다.
왜? 뭐? 이제 막 수비에서 공이 나오고 있는데?
박상민이 움직인 저 앞쪽에서 레믹이 빠르게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저놈들 때문에?
투욱! 툭!
레믹을 따라 이정렬까지 미드필드까지 내려와 공을 받았다.
왜 그런지 라파엘이 이끄는 수비 라인도 부쩍 올라왔다.
바넷 FC 선수들은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이럴 때 괜히 뿌듯하고 그런 거 있잖냐!
친구 믿고 설칠 때.
‘부천의 미친개가 내 친구거든!’
투욱!
카알이 박상민에게 패스를 건네준 순간이었다.
‘거칠게? 좋아! 한번 해 보자!’
박상민은 달려드는 바넷의 7번 선수를 제치며 이정렬을 힐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