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29화 (129/262)

제7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1)

무둔바의 초대에 기예르모와 얀센이 끼어들더니, 데이빗이 일을 크게 만들어서 인원이 갑자기 불어났다.

완전히 선수 단합 대회 같은 분위기였다.

그의 집이 좁지 않은 단독주택이었는데도 그 많은 숫자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기로 했던 처음의 계획은 나중으로 미루고 간단한 간식과 맥주, 그리고 음료수만 준비하는 수준에서 모임을 가졌다.

동기 셋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용근과 함께 집에 남았다.

정지우가 바튼과 함께 도착하자, 토고 출신 무둔바가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을 정지우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부인과 아이들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어쩐지 스타를 만난 일반인 모양인 거다.

그 집의 가장인 무둔바가 바로 유니온 시티의 축구 선수인데 말이다.

“미스터, 정! 이렇게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Ji라고 부르세요.”

“아이들과 사진 한 장 찍어 줄 수 있어요?”

아니, 운동장만 나오면 언제고 볼 얼굴인데?

정지우는 무둔바의 아이 둘과 함께, 한 명씩 따로, 그리고 동료들과 몰려서 사진을 찍었다.

들뜬 부인과 아이들에게 10장쯤 사진을 찍어 준 정지우가 슬쩍 무둔바에게 다가갔다.

“이봐, 무슨 일이야?”

정지우가 고개로 가리키자 무둔바가 그 커다란 얼굴에 멋쩍게 웃음을 담았다.

“학교에서 아빠가 Ji와 친하다고 자랑했었나 봐. 그런데 왜 사진 한 장 없냐고 놀린다고. 나더러 Ji가 아빠하고는 안 놀아 주는 거 아니냐고 해서.”

정지우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자 무둔바가 얼른 부인과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귀찮게 했다면 미안해.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어쩐지 아이들이 따돌림 당할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어.”

“무둔바, 우리 동료 맞지?”

“그거야 당연하지.”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아예 하루쯤 학교 발표회에 불러 줘.”

감격한 무둔바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는데, 이럴 때 웃는 건 또 좀 반칙 같은 거였다.

“둘이서 뭐가 이렇게 즐거워?”

데이빗과 얀센이 다가왔다.

WAGs(Wives And Girlfriends)라 부르는 축구 선수들의 부인과 여자 친구들이 한쪽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백인들을 차별할 방법을 연구 중이었지.”

“오! 이거 징계 위원회에 얼른 찔러 넣어야겠군!”

데이빗이 정지우의 농담을 멋지게 받아 주면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알과 라파엘까지 선수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이번 시즌은 느낌이 좋아.”

데이빗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맥주를 높다랗게 들었다.

“이봐! 이번 시즌 Ji의 목표를 한번 들어 보고 싶지 않나?”

개구리가 가득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소란이 단숨에 뚝 잘렸다.

데이빗의 목소리가 크기도 했지만, 새로 승격한 팀의 선수들과 가족들이라서 모두 답을 원하는 느낌이었다.

“하필이면 왜 나에게 묻는지는 모르겠는데.”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돌아보았을 때, 부인들까지 진지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목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우-!”

서양인 특유의 탄성이 울려 나온 직후였다.

“38라운드 전 경기 무패 우승을 원해!”

“우우우-!”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탄성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평가전을 앞두고 1군 명단이 발표되었다.

지난 시즌 1군에 포함되었던 선수 전원에 한국에서 온 동기 셋, 웨스 모건, 리치 드랫, 그리고 놀랍게도 데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평가전의 첫 상대는 노츠 카운티였고, 장소 역시 노츠 카운티의 홈그라운드로 결정되었다.

기예르모

웨스 모건 라파엘 무둔바 신준석

데니 카알 데이빗 박상민

레믹 이정렬

지역 4부 리그 소속 팀과의 평가전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틴은 완벽하게 테스트하는 의미의 선발을 내세웠다.

정지우는 서브 선수들과 함께 벤치에 앉았다.

동기 셋이 유니온 시티 소속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있고, 바로 앞 마틴의 옆자리에 박용근이 앉아 있는 경기였다.

엄청난 감동이 몰려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해서 좀 웃겼다.

삐이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찾아오긴 했는데, 정말 피크닉 분위기로 와서 삼삼오오 앉아 편안하게 관람하는 분위기였다.

패배한다고 해서 탓하거나 실망하지도 않는다.

테스트 이외에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관중들 역시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저 이런 경기를 통해 새로운 선수가 누가 있는지, 돌아오는 시즌에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를 짐작하는 정도가 평가전이 갖는 유일한 의미인 거였다.

정지우는 레믹의 움직임을 주로 보았다.

저놈이 이정렬과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시즌 내내 불편해진다.

전반이 15분쯤 지났을 때였다.

데니가 수비수 사이를 가로지르는 멋진 패스를 이정렬에게 넘겨주었다.

“오!”

벤치에서 탄성이 나올 만큼 빠르고 정교한 패스였다.

‘슛을 날려!’

정지우가 나오려는 고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골대를 향해 몸을 돌린 이정렬이 왼발 안쪽으로 공을 밀었다.

골키퍼 앞을 스친 패스였다.

그래서 안 넣기가 더 어려워 보이는 찬스이기도 했다.

투욱! 철렁!

골을 넣은 레믹이 검지로 이정렬을 가리키며 달려갔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동료들이 다가와 레믹과 이정렬의 뒤통수를 두드려 주고 돌아갔는데, 관중들 역시 박수를 쳐 주는 정도로 가볍게 지켜보았다.

4부 리그 소속팀 노츠 카운티와 프리미어리그 유니온 시티의 평가전이다.

가볍게 가볍게 하는 경기여서 노츠 카운티 역시 무리하지 않는 수준에서 달려들었다.

정지우가 보기에 유니온 시티는 지난 시즌보다 허리가 엄청나게 강해졌고, 수비 라인에 제법 탄력이 생겼다.

힘을 바탕으로 하는 무둔바, 센스와 발재간을 갖춘 라파엘, 185에 93의 체형으로 무둔바와 라파엘을 섞어 놓은 듯한 웨스 모건, 그리고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이어 주는 신준석.

단순히 일회성 테스트일까 싶을 정도로 효과적인 조합이었다. 거기에 중앙 수비를 섰던 카알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세운 점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데이빗과 호흡이 척척 맞던 카알이었다.

그는 데이빗이 앞으로 나설 때면 뒤를 멋지게 받쳐 주었고, 수비 시에는 라파엘과 무둔바를 효과적으로 도왔다.

선수들끼리의 스위칭도 예사롭지 않았다.

박상민이 이정렬과 수시로 위치를 바꾸면서 상대를 흔들었는데, 덕분에 레믹이 좀 더 자유롭게 노츠 카운티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휘저을 수 있었다.

데니의 일이 있어서인지 3명의 동기들이 그라운드에서 좀 더 존중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저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거였다.

정지우는 신준석을 지켜보았다.

많이 편안해졌지만, 아직은 브라질전에서 보여 주었던 플레이만큼을 펼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거칠게 굴어!’

그는 공격수를 마크할 때 너무 점잖았는데, 저런 건 적응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강해졌다.

그러나 아직 손발이 척척 맞지는 않는다.

그 증거로 레믹의 골 뒤에 세 골 정도는 더 얻었어야 하는 멋진 기회가 있었는데, 불행하게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기에 어딘가 아쉬운 수준이었다.

전반은 그렇게 1 대 0으로 끝났다.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들어가자 정지우는 얀센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가 몸을 풀었다.

“좋아 보이지?”

“뭐가?”

둘이서 옆걸음으로 뛰면서 몸을 푸는 동안 얀센이 질문을 던졌고, 정지우가 받았다.

“강해진 거 같잖아. 새로운 선수들이 올라와서 활력도 느껴지고. 조금은 기대해도 될 것 같은데?”

정지우는 피식 웃기만 했다.

후반에도 교체 선수는 없었다.

빨리 익숙하게 발을 맞추라는 마틴의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평가전이었다.

빠르고 거친 영국 리그 특유의 경기가 펼쳐지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아무래도 강도가 조금은 약한 느낌이었다.

후반에 뜻밖에도 카알이 멋진 중거리 슛으로 한 골을 더 얻어 내서 결과는 2 대 0으로 끝났다.

다 함께 레드 블레이트로 이동했고, 특별한 일 없이 집으로 향했다.

“첫 경기를 마친 소감이 어때?”

“그냥 시작했구나, 정도?”

바튼이 운전하는 밴에서부터는 동기 셋과 편안하게 한국말을 주고받는다. 라커룸이나 다른 동료들이 있을 때는 긴 대화를 가능하면 피하곤 했다.

이정렬의 일 이후에 얻은 교훈에 따른 것이었다.

“준석아, 수비할 때 손이라도 써. 거칠게 밀어붙여야 하는데 아직은 좀 조심하는 느낌이던데?”

“그게 버릇이 안 들어서 그런지 자꾸만 위축돼. 확 밀었다가 페널티킥이라도 뺏기면 어쩌나 싶고. 아무래도 리그가 바뀌니까 그런 게 제일 어렵다.”

박용근이 빤히 듣고 있는 자리였다.

무언가 조언을 해 줄 법도 한데 박용근은 끝까지 신준석의 플레이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신윤희는 경기 결과를 기다리며 긴장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들어서는 신준석과 동기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나쁘지 않았어요. 세 명 모두 선발로 나왔고, 풀타임으로 뛰었거든요.”

“그래? 정말 잘됐다.”

선수 가족은 참 못할 짓이다.

경기에 나설 수 있기를 목 빼고 기다리다가, 막상 나가게 되면 결과가 좋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여야 한다.

다음 날, 리저브 팀은 유니온 파크 그라운드로 회복 훈련을 나섰고, 정지우는 레드 블레이트에서 오전 훈련을 마쳤다.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Ji, 코치가 찾아!”

클락이 머리를 쑥 디밀고 정지우에게 말을 전했다.

오후 훈련이 끝나고 만나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정지우가 마틴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그는 이젠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익숙해진 책상 앞 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Lee의 소속팀과 이적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쥬피터 회장은 당장 오늘에라도 자네와 동료들의 계약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하던데, 일정을 정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건넨 마틴이 책상에 놓인 일정표를 들여다보았다.

“사흘 뒤에 평가전이 있으니까 그 뒤쪽? 아니면 일주일 뒤. 이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어떤가?”

“어차피 할 계약이라면 내일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말해 버리면 아무래도 가치가 좀 부족해 보이지 않겠나? 기자들을 불러 모을 시간도 필요하고.”

“내 의견은 전했으니 나머지는 코치가 알아서 정하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마틴이 검지로 콕 찍는 것처럼 일정표의 한곳을 짚었다.

“다음 평가전 이틀 뒤로 하지. 미스터 유에게 따로 일정을 알려 주겠지만, 일단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날로 하자.”

“알겠습니다.”

일정표를 확인한 마틴이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두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시즌이 시작되면 나는 박 감독이 제안한 전술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그러나 관중들이나 구단의 최대 인내치는 일곱 게임이 한계라고 봐야 한다.”

“일곱 경기까지 승리가 없을 수 있다는 계산인 겁니까?”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습 이전에 우리 팀 수비 라인이 프리미어리그 팀들을 상대로 무실점을 기록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안 서. 그래서 더욱 자네의 활약이 간절하지.”

굳이 마틴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지우 역시 앞으로 상대해야 할 팀들이 챔피언십 팀들보다 확연하게 강하다는 것쯤 짐작하고 있었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무리할 필요 없다. 그래서 그 경기 선발을 얀센에게 맡길까도 생각 중이다.”

“그거야 코치가 결정할 일입니다.”

마틴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뮤니티 실드 전에 포메이션이 좀 더 단단해지면 결정이 바뀔 수도 있다.”

마틴이 문을 힐끔 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박 감독과 한국에서 온 선수 세 명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들을 1군에 바로 포함시킨 것, 이 일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면 한다.”

정지우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자네는 단순한 골키퍼가 아니다. 한국에서 온 스승, 그리고 한국 출신의 선수 셋을 지원해 주었으니 이제 나와 우리 관중, 그리고 유니온 시티 팀을 위해서 그라운드를 확실하게 지배해 주기 바란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알았다고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마틴의 말마따나 박용근과 동기 셋이 함께하는 시즌인 거다.

세상 사람들에게 실력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지지 않는 경기가 목표입니다.”

“당장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조금 지나서 좀 더 욕심을 부릴지는 모르지만. 이제 훈련할 시간이지?”

마틴이 나가도 좋다는 것처럼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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