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안 된 일이네요. (3)
“가 봐야겠네요.”
“그래요. 몸 관리 잘하고요.”
바튼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정지우는 당연하게 클레이의 병실로 향했다.
정지우가 들어서자 침대 아래쪽에 다리를 매달고 있던,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그가 웃었다.
“몸은 좀 어때?”
“보시다시피! Ji, 혹시 어제 부상 때문에 온 거야?”
“2주 아웃.”
클레이의 얼굴에 담겼던 웃음이 한순간에 싹 달아났다.
“근육을 좀 다쳤을 뿐이야.”
“중요한 시기잖아. FA컵 4강전도 있고.”
한숨이 푹 나오는 말이었지만, 상황이 이래서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깜박 잊었네. 이 친구는 새로 일하게 된 팀 매니저 바튼, 이쪽은 클레이.”
“만나서 반가워요.”
“경기 다 봤습니다. 멋진 플레이였는데 아쉽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가 아니라 바튼은 진심으로 클레이의 부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제 있었던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10분이 훌쩍 지나갔다.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래에서 닥터 스미스와 클락이 기다리거든. 며칠 내로 다시 올게.”
“와 줘서 고마워. 몸 관리에 신경 쓰고.”
그렇게 클레이의 병실을 나선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
사람이 간사한 건지, 사는 것이 간사하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박용근의 전화기가 종일 울려 댔고, 심지어 꽃집에도 서너 명이 찾아왔다.
신준석 가족들의 축하 전화야 그렇다고 치자.
박용근 키즈라고 불리는 선수들의 전화나, 그 가족들의 전화도 십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전에 김문호 축구 교실에서 가르쳤었던 아이들 부모의 전화나, 꽃집 방문은 솔직히 좀 놀랄 정도였다.
[감독님! 저 유성이 엄마예요! 박유성! 기억하시죠?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런데 감독님! 저희 아이요, 유니온 시티 축구 교실에 꼭 좀 넣어 주세요! 저희 잊으시면 안 돼요!]
도대체 알려 준 적도 없는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오전을 그렇게 시달린 박용근은 점심을 먹고 나서 한 시간쯤 뒤에 카페에 앉아서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정지우 선수가 구단에 제안했던 내용인가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어제 그런 인터뷰 내용이 나왔다는 것도 기사를 통해 알았으니까요.”
기자들이 웃으며 기사를 받아 적었다.
“유니온 시티 구단의 제안이 정식으로 협회에 접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축구 교실을 맡으실 의향은 있으십니까?”
“협회에서 유니온 시티와 의논할 것이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정식으로 제안받은 것이 아니고, 협회의 결정이 난 것도 아니라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기자들이 빠르게 받아 적고는 박용근을 보았다.
“유니온 시티가 설립 비용과 운영 비용을 전부 부담하는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박 감독님의 결정만 남은 것 같은데요?”
박용근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아직 제안받은 것이 없습니다. 제안을 받게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용근의 답이 틀린 것이 아니어서 기자들은 그 점에 대해 더 파고들지 못했다.
“감독님, 기사 안 쓰는 조건으로 우리 툭 터놓고 이야기 좀 하죠.”
이럴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저래 놓고 ‘속내를 비쳤다.’라거나 ‘이러이러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이 기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정지우와 개인적으로 연락하시죠?”
박용근은 그냥 웃고 말았다.
축구 교실에 대해 사전에 들은 바가 있느냐는 질문과 이게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웃음을 보니 연락하고 계시네.”
이런 때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더 웃긴다.
박용근은 덤덤한 얼굴로 거의 비어 있는 녹차 잔을 들었다.
“만약 정식으로 연락이 오면 감독직을 맡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거절하실 겁니까?”
“기자님,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해요?”
“그냥 알고 싶어서요. 기사 안 쓴다니까요.”
말을 한 기자가 주변을 둘러볼 때, 옆에 있던 기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와 박용근의 관계를 모를 리 없는 기자들이 말이다.
“영국의 구단 회장이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 내겐 전부요. 아직 어떤 연락도 없었고. 그런데 내가 한다, 안 한다, 하는 건 좀 우습잖소? 그냥 좀 더 지켜보고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박용근의 말에 뻘쭘했는지 기자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유니온 시티의 제안이 있어서인지 기자들이 조금은 공손해진 느낌이었는데, 이런 건 절대 믿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한 정지우는 곧바로 마틴의 방으로 향했다. 회복 훈련을 위해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그라운드에 나가 있어서 사무실 주변은 조용했다.
마틴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정지우는 바로 그와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그만하길 다행이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무리하는 일이 없도록 좀 더 주의해 주게.”
“그러죠.”
마틴은 책상 왼편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하나 꺼내 정지우 앞에 놓아 주었다.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들에 대한 자료들이다. 새로 집을 마련했다니까 조금 뒤에 그곳을 둘러보고, 그리로 옮길지를 결정하는 대로 경기 영상들도 보내 주겠다. 2주 동안 자료를 검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승격이 확정되었으니 당연히 준비해야 할 일이다.
마틴과 나누었던 대화가 아니었다면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고 물어봤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코치, 어제 쥬피터 회장의 인터뷰 말인데요.”
“한국에 축구 교실을 만들겠다는 거 말인가?”
마틴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쥬피터의 마음이 급한 거겠지. 자네를 노리는 팀들은 많아지는데, 가계약 수준인 자네에 대한 소유권은 주장해야겠고, 뭐 그런 이유 아니겠나?”
“그렇다면 오늘 보라는 집과 밖에서 기다리는 바튼도 그런 의미인 겁니까?”
“물론이지. 자네가 지금 독한 마음을 먹으면 쥬피터는 헛물만 켠 꼴이 되니까. 나에게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는지 새로운 감동이 올라올 정도라니까.”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는 마틴의 모습이 웃겨서 정지우가 먼저 웃었고, 마틴이 따라 웃었다.
“축구 교실을 만드는 건 좋은데, 한국에 있는 감독님은 그걸 맡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흐음, 이유는?”
“협회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건 짐작하실 테고. 아마 그런 이유로 협회가 감독님을 거부하는 데 따른 잡음을 피하고 싶은 느낌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유니온 시티가 전액 비용을 대는 일인데, 왜 협회의 승인이 필요하지? 원한다면 쥬피터와 의논해서 협회와 별개로 진행해 달라고 요청하겠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을 바꿔서 곤란하게 했다면 그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마틴이 잠시 입을 다물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유니온 시티와 계약을 완료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거지?”
“동료들과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자고 했습니다. 계약에 관해서는 코치에게 모든 걸 일임하겠다고 했었구요. 적어도 그 약속을 제 손으로 먼저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신뢰 때문인가? 프로 선수가?”
정지우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강한 팀들과 대결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정지우는 한국에서 있었던 브라질과의 평가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그런 선수들과 승부를 겨뤄 보고 싶습니다. 좀 더 높은 수준의 팀들과 겨루려면 상위 팀으로 옮겨서 챔피언스 리그에도 나가야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유로 코치나 동료들과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제고 부상이 생길지 몰라. 자네도 이미 26살이다. 그런 바람을 지녔다면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나은 팀으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마틴의 질문에 정지우는 바로 답을 꺼냈다.
“누구에게나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 않을까요? 코치와 함께 전술을 의논하고, 동료들과 최선을 다해 강한 팀을 상대하는 것이 현재의 내겐 좀 더 행복한 일입니다.”
마틴이 픽 하고 웃었다.
넌 아직 세상을 모른다, 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너 같은 놈이 아직도 있구나 하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자넨 박 감독이 다시 축구할 수 있기를 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명예를 회복했으면 하는 거고?”
“확실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이 두 번째로 픽 하고 웃었다.
그는 그를 바라보는 정지우의 눈빛이 걸렸던 모양이었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는 어쩐지 내가 상상하던 동양인과 다른 거 같았는데, 예전에 가르침을 준 스승? 그래, 그 표현이 적당하겠군. 스승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 나도 나중에 그렇게 대해 줄까 해서 웃은 거네.”
“제게는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분들이십니다.”
마틴이 잠시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의 부모님과 다를 바 없다는 분들께 내가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해 볼까?”
정지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마틴이 또 한 번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저녁에 쥬피터 회장을 만나기로 했으니, 먼저 그와 의논하고 내일쯤 답을 주지. 자네는 오늘 새로 구했다는 집을 둘러보는 게 좋겠네.”
궁금하긴 했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두고 내용이 뭐냐고 묻는 것도 이상해서 정지우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출발하지.”
“점심을 먹고 가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정지우도 몸을 일으켰다.
회복 훈련을 마친 동료들을 만나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멋진 휴가인데?”
“부러우면 내가 좀 쉴 수 있도록 도움을 줄까?”
“오우! 그건 사양하고 싶군.”
FA컵 4강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동료들은 농담만 할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지우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이거나, 아니면 게임에 나서야 하는 얀센, 기예르모를 무시하는 의미가 될까를 염려하는 눈치였다.
점심을 먹은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새롭게 제공해 주겠다는 주택을 보러 움직였다.
레드 블레이트에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와 정반대 방향으로 20분쯤 떨어진 곳이었다.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주변에 있는 주택이나 건물들이 ‘우린 좀 살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깁니다.”
바튼은 예상하던 것보다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2층 주택 앞 도로에 차를 세웠다.
하얀 외벽, 커튼이 드리워진 거실 창과 2층 창, 그 외에 다락방이 분명한 볼록 나온 지붕 중간의 창까지.
“방이 모두 여섯 개입니다.”
“나 혼자 쓸 거라면서?”
“임대와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구단에서 부담합니다.”
능숙한 부동산 업자처럼 집을 소개한 바튼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정지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소파, 그 아래 깔린 카펫, 엄청난 크기의 TV와 오디오, 조명을 위한 스탠드, 식탁, 주방 시설까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살다 잠시 나간 건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꾸며진 집이었다.
“욕실과 침실을 보시겠습니까?”
“바튼, 이 가구들은?”
“임대에 포함된 것들입니다. 원하는 것들이 따로 있다면 가구나 가전제품들은 지정해 주는 것으로 교체하겠습니다.”
그냥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쪽에 서재가 딸린 침실이 있고, 위층에 따로 거실이 있습니다.”
주택이라고 들어왔는데 안은 완벽하게 아파트 느낌이었다.
대략 아래층만 330평방미터쯤 되어 보이니까, 우리 표현으로 100평짜리 복층 아파트 개념이었다.
“침대에 좀 더 신경 썼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하우스 키퍼가 방문할 텐데, 요일을 정해 주면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바튼이 고개를 기울이며 정지우의 표정을 살폈다. 정지우가 고개를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좀 더 넓은 곳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로 가 보죠. 그리고 참! 차량은 SUV와 세단 중에서 고르면 됩니다.”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부담스러워서 그래.”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바튼이 진지한 얼굴로 정지우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움직여 탁자에 놓인 의자를 가져왔다.
“Ji, 나도 전에 선수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맡은 일에 정말 만족합니다. 지금 내가 Ji에게 충고를 할 수 있다면, Ji에게는 충분히 이 정도를 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둘이서 휑할 정도로 커다란 거실에 마주 앉아서 하는 대화였다. 바튼이 너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네고 있어서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인 게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유니온 시티 구단이 Ji를 통해서 벌어들일 수입을 계산한다면 이건 아무런 부담이 되질 않습니다. 솔직히 나에게는 어떡해서든 Ji를 설득해서 본 계약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임무가 있습니다.”
“그걸 말하면 곤란해지는 거 아냐?”
바튼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서양 놈 특유의 짙고 깊은 눈매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Ji, 원한다면 상위 팀으로 옮기는 거 나쁘지 않습니다. Ji의 실력이라면.”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게 다리를 꼰 자세로 바튼이 전한 말이었다.
“그럼 바튼은?”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는 거지요. 좀 더 높은 곳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이는 Ji를 응원할 겁니다. 내가 보았던 Ji의 플레이에는 나를 감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으니까요.”
정지우가 피식 웃는 것을 본 바튼이 또 멋진 눈꼬리를 그려 내며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