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안 된 일이네요. (2)
자고 일어났을 때 오른쪽 정강이는 어젯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지우는 부기가 빠지지 않아서 팽팽하게 당겨진 정강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거 괜히 버텼나?’
시커먼 멍이 무릎과 발목까지 번진 것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제 병원에 가 볼 걸 하는 것이었다.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돌린 정지우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뎌 보았다.
필드 플레이어만큼은 아니더라도, 축구 선수인 정지우에게 부상은 늘 주변을 맴돌다가 말없이 다가오는 질 나쁜 친구와 같았다.
‘뼈는 괜찮은 거 같은데?’
어지간한 부상은 통증이나 상태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느껴지면 일단은 조심하는 게 최고였다.
정지우는 천천히 걸어서 거실로 나와 물과 우유를 마신 뒤에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hello?’ 하는 팀 스크립터 클락의 음성이 들렸다.
“클락, 나 정지우인데, 오른쪽 다리 부상이 염려돼서 오늘 회복 훈련 빠지고 병원에 가 보려고 해. 감독에게 그렇게 전해 줘.”
평소라면 ‘오케이. 혹시 도와줄 것 있어?’ 하는 답이 나오는 게 정상이었다.
[다리 부상이 심해? 알았어.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이번 반응은 전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뭐, ‘클레이 다리 부러진 것에 놀란 가슴, 정지우 정강이 보고 놀란다’일 수도 있으니까.
전화기를 내려놓은 정지우는 다시 조심스럽게 걸어서 샐러드와 치즈, 바나나, 연어 등을 꺼내 아침을 준비했다.
컴퓨터가 하나쯤 필요한 거지?
“인터넷 세상이니까!”
누군가 앞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어깨까지 들썩이며 장난스럽게 말을 뱉은 정지우가 포크를 손에 들고 자리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전화가 울렸다.
번거롭기는 한데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걸어서 전화기를 든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hello?”
[Ji, 지금 출발할 거야. 병원에도 연락해 놨고. 20분쯤 뒤에 도착할 것 같아.]
클락이었다.
“여길 오려고? 내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무슨 소리야? 일단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나머지는 도착해서 설명할게. 절대 무리하지 말고 기다려 줘.]
“그러지.”
유난 떨기는! 경기가 없는 날이라 이런 일에라도 최선을 다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몸값이 올라서 이렇게 특별하게 대해 주나?’
어딘가 낯간지러운 생각에 몸을 움찔한 정지우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런데 그 순간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식사를 방해하려고 작정들을 했나?
정지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아예 탁자를 향해 움직였다.
[스미스일세. 부상의 정도가 심하다고? 내가 클락과 함께 갈 테니까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가능하면 다리를 올린 자세로 있어.]
“그 정도로 심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런 속단은 부상을 대하는 좋은 태도가 아니야, Ji. 아무튼 기다려.]
정말 이게 무슨 일이지? 정강이에 부기와 멍이 좀 안 빠진 걸 가지고? 정말 몸값이 올라서 이러는 건가?
정지우는 탁자에 앉아 그럭저럭 식사를 마쳤다.
스미스와 클락이 오고 있는 데다 병원에도 가야 한다.
접시를 싱크대에 넣은 정지우는 샤워실로 들어가 양치와 세수만 간단하게 하고 나왔다.
찌르르르릉! 찌르르르릉!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맞았다.
현관문을 열어 준 정지우가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계단으로 3명의 남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왜 서 있어?”
“문을 열어야지.”
클락이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들어섰고, 그 뒤로 스미스와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있었다.
“앉아 봐.”
병원에 갈 거라면서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정지우는 팀 닥터 스미스의 지시대로 의자에 앉았다.
꾸욱!
“아!”
“아픈가?”
“그렇게 세게 누르면 멀쩡한 곳도 아플 거 같은데요?”
스미스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정지우의 다리에서 시선을 들었다.
“병원까지 가는 건 깁스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늘은 좀 유난스러운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가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자네가 부상에 둔하게 대처한 거야. 아! 그리고 이 친구와 인사하지.”
말을 마친 스미스가 고개를 돌리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튼입니다. 크로울 바튼. 어제부터 Ji의 전담 매니저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뭔 매니저?
“구단에 요구할 것이나 불편한 일들이 있다면 모두 내게 지시하면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인터뷰든 저와 팀의 미디어 담당관을 통해서 진행하게 됩니다. 이 일을 맡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얼떨결에 바튼과 악수를 나눈 정지우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클락을 돌아볼 때였다.
“자네가 이용할 주택과 차가 준비되었다고 하더군. 그건 병원에 먼저 들른 다음에 확인하기로 하고, 우선 일어나지.”
스미스가 몸을 일으키며 병원으로 향할 것을 재촉했다.
***
회의실에 예상보다 많은 기자들은 몰려들더니, 조금 지나서는 방송 카메라까지 등장했다.
조동익은 직원을 시켜 간단한 자료를 먼저 배포하게 했고, 그로부터 20분쯤 뒤에 회의실로 들어섰다.
얼굴을 아는 기자들에게 눈인사를 한 조동익이 자리에 앉자, 방송 카메라의 눈부신 조명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배포해 드린 자료는 다들 보셨을 거고. 우리 협회는 일단 유니온 시티의 축구 교실 설립을 전적으로 환영합니다.”
그는 단단하게 정리된 머리를 자랑하듯 고개를 치켜들고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내부 검토에 시간이 필요하고,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해 유니온 시티에 자료를 요청할 예정이어서 당장 축구 교실을 개설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지는 동안, 사진 찍기 편하도록 조동익은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 주었다.
“이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 상의 없이 발표되어 그 점이 좀 유감스럽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질문을 받겠습니다.”
기자들이 조금은 맥 빠진다는 표정으로 조동익이 말한 내용을 노트북에 담거나 수첩에 옮겨 적었다.
“부회장님, 유니온 시티가 박용근 감독을 지명해서 감독직을 맡긴다고 했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나올 질문이 나왔다.
조동익은 질문을 던진 기자를 향해 시선을 준 후, 바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유니온 시티와 의논해야 할 부분이 그런 것들입니다. 협회는 유니온 시티가 제안한 축구 교실이 양국의 우호를 증진하고, 양국 축구 발전에 기여하기를 희망합니다.”
번지르르하긴 한데 알맹이가 쏙 빠진 답이었다.
“박용근 감독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안 하셨는데요?”
“허허! 그 점은 협의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라서 당장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말씀은 박 감독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까?”
어딘가 뾰족하게 날이 선 질문이라서 조동익은 질문한 기자를 유심히 보았다.
곱슬머리, 세모꼴에 가까운 눈, 튀어나온 광대와 약간 휜 코까지, 한마디로 성격 더럽겠구나 싶은 인상이었다.
“부회장님, 유니온 시티가 박용근 감독에게 맡기겠다고 발표했는데, 그 점에 대해서 의논을 해야 한다는 건 결국 협회가 박 감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이 정도면 친분 있는 기자들이 덮고 나서 줄 만도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힐끔 돌아본 그의 시선 앞에서 그들은 무척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
“아, 저요? 장진모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축구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놈이 장진모?’
이름과 별명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놈 때문에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조동익은 뜨거운 김이 푹 하고 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럼 질문에 답을 좀 부탁드립니다.”
“장 기자! 저쪽하고 의논하고 결정한다잖아. 왜 혼자서 그렇게 질문을 몇 개씩 해?”
그때 지켜보기 미안했는지 기자 한 명이 장진모를 타박하고 나섰다.
‘그래. 네놈이 사회부에선 날고 기었는지 모르지만, 이곳 축구 바닥에선…….’
“진 기자님! 숫자를 몰라요? 나 질문 딱 하나 했어요. 답도 간단한 거야. 예, 아니오. 그거 하나 듣겠다는 게 잘못이야?”
“어허! 그러니까 저쪽하고 의논해서…….”
“저쪽이 박용근 감독이라고 콱 못을 박았다니까! 내 입을 좀 봐 봐! 박! 용! 근! 봤어요? 다시 해 줄까? 박! 용! 근! 이렇게 정해 줬다고! 그런데 뭔 의논을 하냐고? 여기선 박 감독에게 맡길 거다, 아니다, 이걸로 끝나는 거야.”
방송용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장진모가 홱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막말로 부회장님.”
조동익은 최대한 표정을 읽히지 않으려 애썼다.
“저쪽에서 돈 다 대서 짓고 운영비까지 주겠다는데, 협회에서 무슨 권리로 자료를 요청한다는 겁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양국의 우호적인 발전을 위해…….”
“우호적인 발전을 위해 박 감독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아니면 다른 감독이어야 하는 겁니까? 그 점만 딱 답을 주세요. 예, 아니오.”
“그 부분은 충분히 논의를 한 뒤에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장진모가 다들 들으란 듯이 한숨을 커다랗게 쏟아 냈다.
“이래 놓고 설마 또 점심 먹으러 자리 옮기자, 이러시는 건 아니죠?”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답변을 두루뭉술하게 넘긴 대가로 밥 살 계획 가지고 계신 거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말이 지나칩니다.”
“아니시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장진모 탓에 기자회견은 예상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흘렀고, 은성복집은 점심 매출을 날려 버렸다.
***
병원에 도착한 정지우는 우선 X-ray 촬영을 한 뒤에 결과를 기다렸다.
20분쯤 시간이 지난 뒤에 사진을 보여 준 의사는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 주었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2주 정도는 경기를 나서기 어려울 겁니다. 2주 후에도 그때 상태를 보고 판단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최소 2주 아웃을 선언했다.
“깁스나 다른 처치를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2주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이렇게 돼서 유감입니다, Ji. 그리고 어제 경기 정말 멋졌어요.”
“그렇군요. 진료 고마워요.”
정지우와 말을 마친 의사가 스미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시기라 유감이긴 한데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입니다, 닥터 스미스.”
“고맙네. 2주 뒤에 다시 오는 것으로 하지. 수고했어.”
스미스는 덤덤히 의사가 전한 내용을 받아들였다.
넷이서 진료실을 나와 복도에 앉았다.
“나는 클락과 함께 레드 블레이트로 갈 생각인데,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같이 가죠. 어차피 마틴도 만나 봐야 할 거 같으니까요. 대신 잠시 클레이 좀 보고 가면 안 될까요?”
“10분?”
“15분.”
스미스가 픽 웃으며 그러라고 하고는 먼저 움직였다.
정지우가 엘리베이터로 움직이자 클락과 바튼이 뒤를 따라왔다.
“그럴 필요 없으니까 먼저 차에 가 있어.”
“그럴까? 그럼 난 닥터 스미스에게 가 있을게.”
클락이 스미스가 간 곳으로 움직였는데, 바튼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그는 얼른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까지 했다.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려가는 거야.”
“아!”
바튼이 얼른 아래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하이! 어쩐 일이에요?”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릴리는 내일 오는데……?”
“다리에 가벼운 부상이 있어서요.”
바튼이 데이지를 힐끔거려서 정지우는 얼른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결과는요?”
“2주 아웃이고, 그 뒤에 상태를 봐서 결정하겠다고 들었어요.”
“흠, 안된 일이네요.”
데이지가 입술을 모으며 유감을 표시할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