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71화 (71/262)

제1장.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되게. (1)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그토록 처절하게 뛰었던 경기는 과거가 되고 관련된 모든 것은 기록으로만 남는다.

“오- 오오! 오- 오오!”

승리가 확정되자 유니온 시티 원정 응원단은 단순하디단순한 리듬의 고함을 질러 대며 승리를 만끽했다.

선수들 간에 앙금이 남는 라이벌전과 달리 오늘 경기는 양 팀 모두 최선을 다했던 멋진 승부였다.

유니온 시티의 감독 마틴과 웨스트 브로미치의 감독 토니가 악수를 나누는 동안,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팀의 구별 없이 오른손을 들어 함께 뛰었던 상대방의 손을 잡아 주었고, 어깨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멋진 선방이었어.”

일부러 다가와 손을 내민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가 정지우의 손을 잡으며 건넨 말이었다.

“꼭 FA컵을 거머쥐라고!”

그리고 그는 정지우의 어깨를 툭 쳐 주고 몸을 돌렸다.

크리스가 시작이었다.

그 뒤로 함께 뛰었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선발 선수 모두가 정지우를 찾아와 손을 잡으며,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시 보길 바란다.’거나 ‘행운을 빌어.’ 따위의 인사를 전하고 돌아섰다.

“저 괴물은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난 거야?”

데이빗과 안면이 있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이 정지우를 가리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 원정 팬들의 앞으로 정지우와 선수들이 다가갔다.

정지우가 양손 검지로 릴리를 가리키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모두 주먹을 입에 댄 후에 검지로 어린 소녀에게 승리의 기쁨을 전했다.

원정 관중들이 준 엄청난 응원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선수들이 머리 위로 양손을 들어 손뼉을 칠 때, 릴리는 세상을 모두 얻은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거칠게 생긴 수비수 스웰던, 키가 훤칠하고 점잖게 생긴 데이빗, 단단한 체형의 맥슨, 프랑스 흑인 선수 꼼빠니의 틈에서 정지우는 단연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응원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데 거의 10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격렬한 경기를 마치고 바로 샤워를 해 봐야 물기를 닦는 순간에 다시 땀이 흐른다. 어쩌면 선수들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라도 이런 시간이 필요한 건지 모른다.

믹스트존에 선 정지우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집중되었다.

“우리 선수 모두 팀에 헌신했고, 원정 응원단의 지치지 않는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습니다.”

정지우는 모범적인 답을 꺼내 놓았는데, 마지막 질문은 그렇게 답을 하기 어려웠다.

“관중석에 있던 소녀에게 지와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모두 애정을 표하던데, 어떤 관계입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 경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내 마스코트입니다. 팀원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 주어서 감사의 표시를 전했을 뿐입니다.”

릴리의 입장을 생각해서 정지우는 적당하게 답을 하고 믹스트존을 빠져나왔다.

라커룸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정지우가 선수용 터널 앞을 지날 때였다.

“Ji! Ji!”

통로 위편에서 누군가 간절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던 정지우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헤이! 친구!”

높게 뻗어 준 정지우의 주먹을 툭 하고 받아친 빌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토미와 샌디를 돌아보았다.

“오늘 멋졌어! 미스터 어메이징!”

“우리를 결승전과 프리미어리그로 데려가라고!”

주변에서 빌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관중들의 고함을 들으며 정지우는 선수단의 통로로 들어섰다.

라커룸으로 들어서면 완전히 선수들, 그것도 동료들만의 세상이 된다.

팔꿈치를 세워 오른손을 강하게 맞잡고, 가슴을 부딪친 다음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는 인사를 나누고, 혹은 통쾌한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쁨을 나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한 경기에서 얻은 승리는 좀 더 짜릿하고, 다음 경기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근성의 원동력이 된다.

샤워를 마친 정지우는 선수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사인지가 물밀 듯이 달려들었는데 기다리는 동료들과 스태프, 특히나 서브 선수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일일이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지우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버스에 올랐다.

FA컵 8강전을 승리로 마감한 날이었다.

박용근과 전은주는 모니터를 끄고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벽 4시경이어서 한숨이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는데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커피 마시긴 그렇지?”

“잠깐이라도 자야지. 꽃집 사모님이 눈 빨갛게 있는 거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여보! 나 가슴이 너무 벅차서 잠이 안 와.”

박용근이 눈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우리 지우, 정말 잘하는 거지?”

“같이 봤잖아.”

“전화해 볼까?”

“이 사람이 정말.”

행복했다.

정지우의 경기를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저러다가 헬륨을 가득 채운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릴리는 들떠 있었다.

“닥터, 데이지! Ji는 나를 위해서 공을 막는다고 했어요. 이렇게요!”

릴리가 정지우의 흉내를 내며 양팔을 쭉 펼쳐 보이는 것이 얼마나 깜찍해 보이는지, 데이지와 메기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닥터, 데이지? 나 또 경기장에 올 수 있어요?”

메기가 힐끔 눈치를 살피는 앞에서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힘들어요?”

“글쎄, 그건 치료 방법과 릴리의 상태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 같은데?”

릴리의 작은 눈에 서운함이 가득 담겼다.

“다음 경기는 언제니?”

“이틀 뒤요!”

“TV에서 중계해?”

“물론이죠. 닥터도 Ji가 보고 싶어요?”

“글쎄?”

데이지가 잘 모르겠다는 투로 답을 흐렸다.

축구가 매력적인 건지, 골키퍼에게 관심이 가는 것인지 분명하게 답을 하기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우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테이블 앞에 앉아 올려 두었던 바나나를 먹었다.

‘서울이 오전 7시가 넘었으니까?’

박용근과 전은주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분명 일어나 있을 시간이었다.

정지우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찾았다.

큰일도 아니고 그냥 안부 전화 한 통 하는 거다.

그런데 통화 버튼을 누르자 가슴이 두근거렸고,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에는 입가에 웃음도 달렸다.

혼자 살던 영국에서 함께 사는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지금 같은 순간에 가장 실감 난다.

[여보세요?]

“감독님, 저 지우요.”

[그래! 피곤할 텐데. 공연히 전화한다고 못 자고 있던 건 아니냐?]

“경기 보셨어요?”

이상하게 엇나가는 대화인데 전하고자 하는 감정이나 뜻은 확실하게 오가고 있었다.

[함께 봤다. 잘했다.]

정지우는 씨익 웃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비행 뒤에 바로 있는 경기라 걱정되던데,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고?]

“예.”

[내일 회복 훈련 잘하고, 자기 전에 적당한 탄수화물 종류 보충하는 거 잊지 마라.]

“바나나 먹었습니다.”

5분쯤 대화를 나눈 박용근이 전은주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다.

[지우야!]

어쩌면 이렇게 반가운 음성으로 불러 줄 수 있을까?

[경기 봤어! 난 지금도 가슴이 막 떨려.]

“못 주무셔서 어떡해요?”

[오늘은 종일 힘이 날 것 같아.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먹을 거 부족하지 않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오히려 10분쯤 통화했다.

전은주의 옆에서 들려온 ‘요금 많이 나온다. 저 녀석 이제 자야 돼.’ 하는 박용근의 말이 아니었다면 좀 더 시간을 보냈을 게 분명했다.

[지우야, 얼른 자. 오늘 정말 멋있었어. 고마워, 지우야.]

“예. 좋은 하루 되세요. 또 전화드릴게요. 감독님…….”

박용근을 바꿔 달라는 말을 하려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이제 이런 전화 요금 정도는 정말 부담되지 않는데.

전화기를 내려놓은 정지우는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 시간쯤 오늘 경기를 되새긴 후에 잠이 들었다.

***

회복 훈련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당장 다음 날, 강등권에 있는 반즐리 FC와의 리그 44라운드 경기에 대비해야 해서 무엇보다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골키퍼는 그나마 낫지만, 어제처럼 힘으로 승부하는 경기를 마치고 나면 심한 선수는 3킬로그램씩 몸무게가 빠져나가기도 한다.

회복 훈련에 나온 단순한 뺀질이 레믹은 ‘기쁨’이라는 감정을 골고루 펴 발라 놓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동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보다 못했는지 꼼빠니가 질문을 던졌는데,

“골 감각이 살아나잖아!”

레믹은 뻔뻔한 답을 내놓으며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저놈은 오퍼가 와서 이적한다고 했던 놈 아니었나?

하긴 이런 바닥에서 그건 전적으로 저놈의 문제인 거니까.

정지우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점심을 먹는 동안 반즐리 FC전에 나설 선발 명단이 나왔다.

클레이가 있었다면 또 먹다 말고 달려갔겠지 싶었는데, 당장 정지우와 함께 식사하는 동료 중에 그런 놈은 없었다.

“반즐리전은 어떻게 해 볼 생각인 거야?”

포크로 감자 으깬 것을 집어넣은 데이빗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건 감독이 결정하는 거잖아.”

“왜 이래? 어제 감독이 4-1-4-1 포메이션에 대해 질문한 의도가 어떤 것인지 정도는 다들 안다고.”

“그런 것에 의미가 있어? 난 그냥 전반을 우리끼리 뛰었으니까 후반에도 알아서 하란 뜻인 줄 알았어. 주장이 인정해 준 상황이니까. 감독이 들어왔을 때 잠시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한 것도 데이빗, 너잖아.”

데이빗이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그렇지 않아. 감독이 포메이션을 물었다는 것은, 상황에 따른 필드의 전술 권한을 너에게 주었다는 의미도 되는 거야. 전에 너에게 수비 라인을 조절하라고 했던 것과 같지.”

혹시 포메이션 따위를 지시하고 나서는 것에 대해 팀원들이 거부감을 가질까 봐서 조심하고는 있는데, 확실히 서양 놈들의 사고는 좀 다르다.

승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굳이 서열이나 직급을 따지지 않고 권한을 부여하는 이런 모습 말이다.

“어제 너의 말에 다들 감동 먹었어.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자는 말. 나와 우리 모두는 네가 그 말을 이뤄 주길 기대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는 데이빗의 표정에 진심으로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는, 그러나 쉽지 않을 거라는 그의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스포츠를, 그것도 축구를 알고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하루는 단연 정지우가 주인공이었다.

『이번엔 축구 소식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지우 선수가 골키퍼로 활약한 영국의 유니온 시티가 FA컵 8강전에서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을 2 대 0으로 누르고 4강에 진출했습니다.』

아침 정규 방송 뉴스에서 유니온 시티의 FA컵 4강 진출을 보도한 것이 워낙 컸다.

『이 경기에서 정지우 선수는 결정적인 선방 두 개로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의 공격을 막아 내며, 소속팀 유니온 시티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정지우의 멋진 선방 장면, 이어서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하는 원정 응원단의 모습, 달려온 선수들이 정지우를 끌어안고 환호하는 모습이 연달아 TV 화면을 타고 나왔다.

『동양인 골키퍼가 FA컵 8강전에 선발로 출전한 것과 승리를 거둔 것은 영국 리그에서 정지우 선수가 최초이고, 앞으로 4강전에 출전하게 될 경우 모두 동양인 골키퍼 최초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흐흐흐흐.”

또다시 안성 쌔근이 모드로 돌변한 박용근이 꽃집 바깥 도로에 서서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인터넷 스포츠 메인 기사에 정지우의 사진이 커다랗게 떠 있는 거다.

그것도 허공에 떠서 공을 향해 팔을 쭉 뻗은 소름 끼치게 멋진 장면 아니면, 하늘을 바라보며 양손 검지를 높게 든 정지우의 모습이었다.

“흠흠.”

일단 표정을 수습한 박용근은 점잖은 얼굴로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던 박용근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문호야, 오늘 내가 술 한잔 사 줄까?”

[어째 전화 안 온다 했다. 그렇게 좋으냐?]

“흐흐흐흐.”

[에효! 왜 안 좋겠냐? 내가 이렇게 부러우니, 원. 좋겠다! 부럽다! 박 감독!]

김문호가 오늘은 바쁘다고 하는데도 박용근은 그게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정지우가 그의 제자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고, 고마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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