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70화 (70/262)

제9장. 마스코트 숙녀분의 이름은? (2)

영국 리그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후반전이었다.

격렬하게 부딪치는 와중에도 농구만큼이나 빠르게 상대를 향해 밀고 올라갔다가, 밀려 내려왔다.

누가 먼저 지치는지 해보자!

미련하고 무식할 정도로 우직한 공격과 공격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기회 때마다 몸을 던지는 수비들이 있어서 아직 골은 터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공방이 15분쯤 이어진 다음이었다.

퍼어어엉!

웨스트 브로미치의 조나스가 라인을 바짝 올린 유니온의 수비수 라파엘 너머로 길게 공을 날렸다.

“우와- 아!”

글자 그대로 단숨에 뚫렸다.

눈에 독이 잔뜩 오른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가 텅 빈 유니온 시티의 한가운데를 파 버리겠다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라파엘, 카알, 스웰던이 악착같이 따라붙었지만, 크리스의 앞에 남은 선수는 분명 골키퍼인 정지우밖에 없었다.

“우와- 아!”

정신이 아득할 만큼 커다란 함성 속에서 자세를 낮춘 정지우의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번들거렸다.

“와! 와 봐!”

라인을 올리라고 했을 때 각오했던 일이다.

이런 것을 막아 줘야 다른 동료들에게 밀리지 말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거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이를 악물고 크리스의 발에 시선을 집중했다.

발에 튕겨 굴러오는 공, 스파이크에 잘려 튀어 오르는 잔디 조각.

보인다. 모두 보이는 거다.

“허억! 허억!”

가쁜 크리스의 숨소리가 엄청난 함성 속에서 분명하게 들렸다.

정면이었다.

페널티킥을 쏘기 위해 달려오는 미친 황소 새끼처럼 크리스는 골대의 정면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춤. 주춤.

정지우는 두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여기까지다. 이 이상 나갔다가 위로 높게 뜬 공이 날아오면 막을 방법이 없다.

크리스가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에 다다랐을 때, 2미터쯤 뒤에서 라파엘과 카알이 독풀을 씹은 듯한 인상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투욱!

‘한 번!’

한 번 더 드리블을 하면 정지우를 제치겠다는 의도이고, 아니라면 다음번에 슛을 날린다.

슛을 날리게 해야 한다!

더 밀고 들어오면 정말 위험한 거다!

주춤! 주춤!

정지우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척하는 순간에 크리스의 보폭이 짧게 바뀌었다.

공과의 거리를 맞추기 위한 동작이었다.

슛이다!

왼편? 왼편으로 쏴! 그쪽이 훨씬 넓게 보이잖아!

하나! 둘! 그리고 세 번째에 크리스의 왼발이 공의 왼편 앞에 놓였다.

휘이익!

그의 오른발이 커다랗게 뒤로 나갔다가 빠르게 앞으로 움직이는 순간에 정지우는 자세를 바짝 낮춘 채로 다시 골대 중간으로 움직였다.

빗맞는 게 제일 무섭다.

제발! 릴리를 위해서라도! 집중해! 공을 봐야 한다고!

공의 뒤편으로 크리스의 오른발이 가려지는 순간,

터어엉!

휘이이이익!

공이 날아왔고, 몸을 날렸다.

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과 강렬한 조명뿐이었다.

출렁이는 그물을 봐야 하는 것이, 그 뒤에 골대 안을 구르는 공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렵다.

왼편이었다.

공은 빠르고 높게 왼편 구석을 파고들었다.

서전트 점프는 자신 있었다. 아니, 자신 있게 만들었다.

바닥에 양 끝을 묶어 놓은 탄력고무를 어깨에 걸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뛰었다. 무릎이 나가지 않으려면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빼라고 들었다. 허리를 다치지 않으려면 허리를 세우라고 배웠다.

등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도 버텼다.

배의 근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 끔찍한 복근 운동도 거른 적 없었다.

지지 않는 경기를 해내겠다고 결심한 이후에 매일 그렇게 살았다.

소리가 뚝 끊긴 세상에서 눈부신 조명탑의 불빛이 자동차 안에서 보는 가로등처럼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최선을 다해 몸을 날린 거다.

막아 내고 싶어서 최선을 다한 거 맞다!

릴리에게 희망을 안겨 주고 싶다!

그 어린 여자아이만큼은 어머니를 잃을 때처럼 힘없이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터어어억!

분명하게 왼손의 손가락들이 뒤로 밀렸다.

버텨야 한다. 여기에서 밀려도 골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이익.’

정지우가 마지막 힘을 다해 공을 밀어낸 다음이었다.

털썩!

화아아악!

세상이 느닷없이 정지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예에에에에에!”

바닥을 두 바퀴나 구르고 일어난 정지우를 향해 엄청난 함성이 달려들었다.

콰아악!

라파엘이 정지우를 끌어안았고, 그 뒤에서 카알이 덮쳤다.

“미친놈! 이 미친 괴물 같은 놈!”

카알이 지르는 고함이 정지우의 정신을 끌어당겼다.

“헤이! 해보자! 이런 경기를 놓치면 도대체 어떤 경기를 이길 거냐고!”

감정이 폭발한 것처럼 카알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선수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댔다.

후반전이 고작 15분밖에 안 지났는데도 선수들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런데 카알의 고함이 터지는 순간에 눈빛이 더욱 독해지고 있었다.

라파엘이 왼쪽, 카알이 정지우의 오른쪽 어깨를 끌어안고 유니온 시티 원정 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삐익! 삑!

빨리 경기를 진행하라는 휘슬이 울렸는데 상관없었다.

쿵쿵!

셋이서 동시에 가슴의 엠블럼을 두들긴 후에, 그 주먹에 키스를 담아 릴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유니온 시티 원정 관중들이 악에 받친 응원가로 답을 했다.

웨스트 브로미치 응원단의 투지에 질 수 없다는 각오인지, 남자들은 거의 웃옷을 벗어 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들이 있는 힘껏 발을 구르며 피를 토할 것처럼 응원가를 불러 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주심이 신경질적으로 휘슬을 불며 주장인 데이빗에게 구두 경고를 주었을 때에,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아예 어깨에 어깨를 걸고 제자리를 뛰며 응원가를 외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맨살을 드러낸 팔을 뻗으며 외치는 응원 구호다.

정말이지 몇 번 본 적 없었을 정도로 강렬한 응원이었다.

해보자는 거지!

웨스트 브로미치는 정말 독한 놈들임이 새삼 증명되었다.

이번 선방으로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놈들 역시 좀 더 번들거리는 눈빛을 올린 채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삐이이익!

어쩐지 코너킥을 차라고 부는 휘슬도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퍼어엉!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이 찬 공이 또다시 정지우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잘라먹겠다고? 내 앞에서?

와락!

정지우가 앞으로 뛰어나갈 때 스웰던, 라파엘, 카알, 맥슨이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과 뒤엉켜 몸싸움을 벌였고, 데이빗과 포그이는 공을 향해 몸을 띄우고 있었다.

휘이익!

선수들이 너무 뒤엉켜서 공을 잡기는 어려웠다.

터엉!

그래서 일단 주먹으로 공을 멀리 쳐 냈다.

“우와아- 아!”

이대로 끝나면 탈락밖에 없는 웨스트 브로미치 역시 수비를 극단적으로 끌어 올린 채 달려들고 있었다.

저쪽 8번 크래익이 공을 잡는 순간이었다.

콰아악!

유니온 시티의 8번 포그이가 거친 태클로 크래익을 막아섰다.

삐이이익! 삑! 삑!

주심이 선수만큼이나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경기였다.

파울이다.

“헤이! 데이빗!”

정지우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은 채 오른손을 높게 들었다. 벽을 3명 세우라는 뜻이었다.

와라! 얼마든지!

이런 경기 지면 1년은 꿈에 나타난다!

피가 끓는 경기였다.

공을 내려놓은 웨스트 브로미치의 7번 제임스의 눈높이에 맞춰 주심이 휘슬을 들어 보였다. 휘슬을 불기 전에 차면 헛짓이 된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그동안, 유니온 시티의 수비 라인에 맞춰 또다시 양 팀의 선수들이 뒤엉켰다.

삑! 삑! 삑! 삑!

분명 오늘 경기를 끝낸 뒤에 주심은 새로 휘슬을 구입해야 할 거다.

“이러지 마! 퇴장시킨다!”

주심이 양손을 바깥쪽으로 단호하게 끊어 냈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기 무섭게 선수들은 상대의 웃옷을 붙들기 시작했다.

내가 붙잡지 않은 상대 선수가 역습에 나선다고 생각해 봐라. 없던 힘도 불쑥 생긴다.

퍼어엉!

투지는 죽이는데 정교함은 별로 없는 팀!

공이 높다랗게 날아왔고, 달려 나간 정지우가 잡았다.

와라라락!

정지우가 페널티 에어리어 끝으로 달려 나가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일제히 웨스트 브로미치 진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정지우는 페널티 에어리어의 경계선을 밟으며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그리고 탄력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커다랗게 엎어졌다.

“우와- 아!”

4-1-4-1의 첫 번째 1번 자리에 있던 데이빗이 공을 받아 곧바로 앞으로 차 주었다.

투욱!

주심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그 앞에서 레믹이 공을 오른쪽으로 툭 차며 수비 한 명을 제쳤다.

“넣어! 제발 좀 넣어 버려!”

카알이 미친놈처럼 악을 쓰는 앞이다.

촤아아악!

파울을 각오한 태클을 레믹은 몸을 높게 띄우며 피했다.

레믹과 공, 그리고 웨스트 브로미치의 골키퍼 벤이 전부였다.

휘청이면서도 용케 앞으로 달리는 레믹, 독기 가득한 얼굴로 달려드는 벤.

화아아악!

벤이 공과 레믹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투욱!

레믹은 공과 함께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퍼엉!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철렁!

웨스트 브로미치의 골대 그물이 공에 맞아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이예에에에에에!”

그라운드를 박차고 높이 떠오른 레믹이 하늘을 향해 오른쪽 주먹을 치켜세울 때, 유니온 시티 응원단은 미친 사람들을 모아 놓은, 딱 그 수준이었다.

‘보이세요? 나 이 팀이 점점 마음에 들어요.’

하늘을 바라보며 양손 검지를 들었던 정지우가 시선을 응원석으로 돌렸을 때였다.

오른손 검지로 릴리를 가리켰던 레믹이 뽀빠이를 흉내 내는 동작으로 양팔을 어깨높이로 번쩍 세웠다.

“미스터 어메이징!”

그리고 그 순간, 응원단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염병할!”

술기운이 불콰하게 올라온 한승관이 결국 막말을 뱉어 내고 말았다.

빌어먹을 선방 이후에 저렇게 극적인 골이 터져 버렸으니 이제는 고개 돌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입지가 줄어들 게 분명했다.

사람이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는 건 좀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죽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단지 한 1년쯤 누워 있을 정도의 부상을 바라는 건데.

“후우!”

한승관의 답답한 심정이 그의 한숨을 타고 커다랗게 울려 나왔다.

삐이익!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바라보기가 두려울 만큼 선수들은 격렬하게 맞서고 있었다.

고작 축구 경기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까지 뛰게 하는 걸까?

데이지는 조금 전 보았던 정지우의 선방과 이어서 나온 골을 떠올렸다.

소름 끼치도록 멋진 장면이었다.

축구가 이런 경기인 줄 몰랐다.

거칠고 우직한 바탕에 끈질긴 무언가를 더하고, 그 위에 화려한 기술과 본능적인 움직임을 올렸는데 그것이 합쳐지면서 짜릿할 정도로 통쾌한 자극을 선사한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어느새 데이지는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유니온 시티의 응원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 유니온 시티가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이었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더욱 빠르게 경기가 진행되었다.

양 팀 모두 공을 잡으면 그 순간 일단 상대 진영으로 차 놓고 일제히 달려드는 방식이었다.

2점을 잃은 웨스트 브로미치와 2점을 앞선 유니온 시티 모두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이었다.

마틴은 시계를 보았다. 후반이 15분쯤 남았다.

이쯤이면 지키기로 들어가는 것이 보편적인 전술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저렇게 악착같이 달려드는 데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믿는다. 믿어 준다.

너희가 만드는 경기를 끝까지 지켜봐 준다.

어설픈 교대로 흐름을 끊지는 않겠다.

유니온 시티의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호슨스의 벤치에서 마틴은 피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시선을 교환한 선수 그 누구도 교체 사인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의 경기를 계속할 수 있다면.’

그래. 이 게임은 프리미어리그를 대비한 선수들의 또 다른 훈련일지도 모른다.

삐이익! 삑! 삐이익!

마침내 경기 종료 휘슬이 길게 울렸을 때, 마틴은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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