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7화 (67/262)

제8장. Ji가 화났어요. (1)

“Ji가 화났어요.”

레믹이 공을 뺏긴 직후에 릴리가 건넨 말이었다.

데이지는 그제야 반대편 끝에 있는 유니온 시티의 골대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알아?”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서 있는 정지우를 살펴보았지만, 데이지는 그가 화났는지를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우우-!”

유니온 시티의 코너킥 찬스였다.

홈 관중들의 야유에 데이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코너킥을 준비하는 유니온의 8번 포그이를 보았고, 이어서 웨스트 브로미치 골대 주변에 몰려 있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보았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유니온 시티 응원단들이 지르는 단순한 응원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 데이지는 발을 구르는 대신 손뼉을 쳤다.

전문가 수준도 아니고, 미칠 것처럼 열광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축구를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런 데이지에게 축구란 역시 골 그물이 커다랗게 출렁일 정도로 통쾌한 골이 터져야 제 맛인 운동이었다.

그런데 골키퍼?

뛰어난 골키퍼의 활약에 대해서는 들었다.

릴리는 물론이고, 성 마테오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스태프들이 정지우의 활약에 대해 침을 튀겨 가며 떠드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메기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보았다.

멋진 남자일 수도 있는 건 인정!

그러나 골키퍼는 골키퍼인 거다.

지금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구경만 하고 서 있는 그가 과연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홈런이 야구의 꽃이라면, 축구의 꽃은 바로 골이다.

그런데 골키퍼가 아무리 활약한다고 해도 골을 넣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삐이익!

그때, 휘슬이 울려서 데이지는 얼른 웨스트 브로미치의 골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퍼엉!

포그이가 골대 앞으로 강하게 공을 찼다.

선수들이 뒤엉켜 떠올랐는데, 웨스트 브로미치의 4번 체스피가 그 틈에서 좀 더 높게 올라와 머리로 걷어 냈다.

대부분의 코너킥에서 공격팀은 수비팀 선수들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비팀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자연스럽게 감싸게 된다.

수비팀의 선수들이 페널티 에어리어에 몰리게 되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이 때문에 소위 흘러나오는 공을 잡는 것은 주로 공격팀이 되는 거다.

퍼엉!

그런데 웨스트 브로미치의 4번 체스피가 머리로 빼내 준 공을 3번 조나스가 받았고, 그는 둘러싼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넘겨 공을 걷어 냈다.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와 유니온 시티의 맥슨이 100미터 결승처럼 엇비슷하게 달렸다.

“우와- 아!”

이어달리기에서 우리 팀 선수가 상대 팀 선수를 추월하는 것처럼,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가 맥슨을 조금씩 앞서기 시작했다.

“Go! Go!”

웨스트 브로미치의 홈 관중들이 이성을 잃은 것처럼 함성을 질러 댔다.

10번 빅토르, 7번 제임스, 19번 칼럼이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그 바로 옆에서 14번 맥클린이 그야말로 질풍처럼 사이드라인을 따라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뛰고 있었다.

“No!”

데이지는 ‘안 돼!’라고 소리를 지르며 입을 가렸다.

4명이 넘는 웨스트 브로미치의 선수들을 달려드는데 유니온 시티의 수비수는 고작 2명이었다. 게다가 뒤편에서 쫓아오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보다 웨스트 브로미치의 선수들이 좀 더 빨랐다.

‘불쌍해!’

홈 관중들의 광적인 함성 속에서 데이지는 정지우가 가엾다고 느꼈다. 달랑 수비수 둘 아래에 혼자 남아서 저 넓은 골대를 지키는 거다.

그것도 5명의 상대 팀 선수를 상대로.

지금은 허리를 낮추고 공의 방향대로 주춤주춤 몸을 움직이지만, 잠시 후에는 골을 먹고 고개를 떨군 모습일 게 분명했다.

퍼엉!

힘차게 달리던 11번 크리스가 몸을 비틀며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공을 차 주었다.

공은 잔디를 타고 낮게 날아갔다.

달려드는 유니온 시티의 수비수 라파엘의 발 바로 앞을 스치듯 지나간 공은, 다시 카알마저 지나치고 말았다.

“No!”

데이지는 다시 한 번 ‘안 돼!’라고 외쳤다.

축구에 관해 전문가가 아니어도 이건 무조건 골을 먹는 상황이었다.

‘릴리가 실망할……!’

데이지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퍼엉!

달려들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10번 빅토르가 번개처럼 그라운드에 착 깔리는 슛을 날렸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정지우의 오른쪽이었다.

화아아악!

정지우가 몸을 날리는 순간, 데이지는 한 폭의 그림이나 축구를 홍보하기 위해 걸어 놓은 커다란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터억!

세상에! 막았어? 저걸?

사람이 저렇게도 움직일 수가 있어?

“우-!”

정지우의 손을 맞고 튕겨 나온 공을 향해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우와- 아!”

이번에도 웨스트 브로미치의 14번 맥클린이 수비수 멜스보다 좀 더 빨랐다.

정지우가 몸을 세우는 순간,

퍼엉!

14번 맥클린은 반대쪽 골대 위쪽 구석을 향해 세차게 슛을 날렸다.

“No!”

이번에 데이지가 지른 ‘안 돼!’는 좀 다른 의미였다.

조금 전에 그렇게 멋진 선방을 보였는데 이렇게 골을 먹는 건 너무한 거잖아!

화아아아악!

데이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새를 잡기 위해 허공에 뛰어오른 고양이?

허공에 높다랗게 떠오른 정지우가 어쩐지 고양이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터억!

솔직히 공을 막는 것을 제대로 못 봤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 속에서 공은 골라인 밖을 구르고 있었다.

“Oh my God! Oh my God!”

데이지는 ‘세상에!’를 자꾸만 연발했다.

사람이 저럴 수 있는 거야?

저런 슈팅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거야?

골키퍼가 저렇게 멋진 모습일 수 있는 거야?

데이지는 가슴에서 솟구친 뜨거운 무언가가 볼을 붉게 달아오르게 한 다음, 머릿속을 후끈하게 만드는 느낌에 ‘세상에!’를 멈추지 못했다.

“Ji는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했어요!”

릴리를 바라본 데이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는 골키퍼가 멋진 포지션이라는 것을, 축구가 사람을 이토록 흥분시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바닥을 두 바퀴나 구른 정지우가 다부지게 일어나 왼편 엠블럼을 두드렸다.

“Nobody gets the goal on my game!”

“Come on! buddy!”

데이빗과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다가와 ‘해 보자!’라고 외치며 정지우의 머리와 어깨를 다독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지금까지 기가 죽었던 유니온 시티 원정 관중들이다.

그런 그들이 정지우의 선방에 힘을 얻은 것처럼 있는 힘껏 발을 구르며 승리의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호슨스의 홈 관중들이 팔짱을 낀 채로 그라운드를 노려보는 동안,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유니온 시티 응원단은 두 팔을 앞으로 뻗어 가며 정지우의 응원가를 힘차게 불러 댔다.

이번에는 웨스트 브로미치의 코너킥이었다.

응원가의 주인공 정지우는 손을 입에 대고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집중해! 데이빗! 헤이!”

정지우가 두 번의 슈퍼 세이브를 펼친 이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눈빛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라파엘!”

정지우는 수비수들을 한 명씩 부르며 임무를 부여해 주었고,

“꼼빠니! 헤이!”

꼼빠니를 불러서 정지우의 앞에 바싹 붙어 있는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을 맡게 했다.

꼼빠니가 달려와 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려는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삐이익!

결국, 주심이 달려왔고 두 선수에게 주의를 주었다. 물론 그런다고 물러서거나 양보할 수도 없다.

골대 한가운데에 상대 팀 선수가 서 있으면 골키퍼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거기에 공을 찬 이후에 밀어서 넘어트리기라도 하면, 자칫 페널티킥을 받을 수도 있는 거다.

와락!

주심이 휘슬을 불기 직전에 정지우는 꼼빠니의 등을 힘껏 밀었다. 당연하게 꼼빠니와 그의 앞에서 버티던 8번 크래익이 함께 쭉 밀려났다.

삐이이익!

주심이 또다시 신경질적으로 휘슬을 불고는 정지우에게 빠르게 걸어왔다.

“분명하게 말하는데 한 번만 더 그러면 파울이야!”

주심이 손날을 가로로 움직이며 단호하게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대신 등으로 밀고 들어오는 건 주의를 줘야죠.”

“이봐, 몸싸움이잖나! 번거롭게 이러지 말자고!”

“알았어요.”

그사이 꼼빠니가 골대 중앙의 포지션을 차지했다.

얻을 것을 얻었으니 더 이상 주심의 권위를 침범해서 미운털 박힐 필요까지는 없는 거다. 정지우는 오른손을 들어서 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제스처를 취해 주었다.

다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몸싸움을 시작했다.

꼼빠니가 골대 중앙을 차지하자 8번 크래익은 몸을 돌려 정지우의 뒤로 움직였다. 당연하게 정지우를 보호하는 것처럼 꼼빠니가 따라서 뒤로 움직였고,

삐이익!

주심이 코너킥을 차라는 휘슬을 커다랗게 불었다.

7번 제임스가 세워 놓은 공을 향해 움직일 때, 정지우는 힐끔 레믹을 보았다.

놈이 당황한 것처럼 눈치를 살핀 직후였다.

퍼엉!

제임스가 찬 공이 높다랗게 날아왔다.

“우와- 아!”

데이빗이 페널티 에어리어의 정면을 차지한 채 웨스트 브로미치의 슈팅을 저지하고, 꼼빠니가 8번 크래익을 몸으로 밀쳐 내고 있었으며, 라파엘과 스웰던, 카알, 멜스가 웨스트 브로미치의 선수들과 뒤엉켜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공은 골대를 직접 노린 것처럼 정지우의 정면으로 바로 날아왔다.

이런 공은 중간에서 누가 머리만 대도 거의 골로 이어진다.

정지우는 곧바로 공을 향해 움직였고, 높다랗게 몸을 띄웠다.

허공에서 공을 향해 두 손을 높게 뻗었을 때였다.

터억!

뒤에서 달려든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가 정지우의 오른쪽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삐이이익!

바닥에 넘어진 정지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우-!”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이 주심에게 억울하다는 표현을 연신 보였으나, 그것까지 뭐랄 것은 없는 거니까.

골대 앞에 공을 내려놓은 정지우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콕콕. 퍼어엉!

정지우가 길게 찬 공이 웨스트 브로미치의 한중간에 떨어졌다.

마틴은 벤치에 앉아 다리에 두 손을 걸친 자세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그가 일주일 내내 정지우를 기다렸던 이유를 증명하는 것처럼.

두 번에 걸친 정지우의 환상적인 선방 이후로, 미드필더는 물론이고 심지어 스트라이커인 레믹의 움직임마저 초반과 달라 보였다.

‘기가 막히는군.’

고작 몇 게임 만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정지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유럽과 스페인, 아프리카에서 온 선수들이 고작 동양인 골키퍼 한 명이 있고 없고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게다가 원정 응원단은 두 팔을 뻗어 가며 정지우의 응원가를 목청껏 불러 준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중앙선 부근에서 좀 더 치열하게 달려드는 탓에 경기가 좀 더 격렬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틴은 레믹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저 뺀질이가 공을 뺏겠다고 악착같이 달리는 모습이라니!

그는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보았다.

당당한 자세로 선 정지우가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효과가 중앙선 부근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콰다당!

삐이익!

“Hey!”

몸싸움에서 밀린 레믹이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졌고, 포그이와 꼼빠니가 웨스트 브로미치의 5번 클라우디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리그 두 경기에서도 좀 그러지!’

마틴은 다시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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