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6화 (66/262)

제7장. 비기거나 이기는 경기 중 하나 선택해. (3)

경기 시작을 5분쯤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서브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먼저 벤치로 움직여서 라커룸에는 선발 선수들만 남았다. 지난 두 경기를 놓친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라커룸의 분위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Hey! Ji!”

2칸 건너 앉은 주장 데이빗이 상체를 기울인 자세로 정지우를 불렀다. 그 바람에 라커룸의 모든 시선이 정지우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경기는 어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경기?”

“오호!”

데이빗이 ‘이건 또 뭔 대답이야?’ 하는 얼굴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한국을 다녀온 정지우가 승리를 장담해 주길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마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호슨스를 가득 메운 함성이 그의 뒤를 따라 커다랗게 달려들었는데, 마틴은 꼬리를 잘라 버리겠다는 것처럼 빠르고 분명하게 문을 닫았다.

“저 응원을 들어 보면 웨스트 브로미치가 FA컵을 얼마나 원하는지 다들 짐작하겠지? 우리는 오늘!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프리미어리그 소속팀을 상대해야 한다.”

전에 없이 마틴은 강한 어조와 표정으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아스널전은 운이 정말 좋았던 경기다. 그들이 FA컵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 그 뒤로 우리는 아스널만큼 강한 팀을 만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어쩌면 운이 계속 좋았던 거다.”

마틴이 선수들을 천천히 둘러본 이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FA컵 8강이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유니온 시티는 확실한 기록 하나를 더 얻게 된다. 아스널전의 기억을 떠올려. 우리의 FA컵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 경기처럼 뛰어 주길 바란다.”

말을 마친 마틴이 정지우를 향해 시선을 주고는 라커룸을 나섰다.

띠잉. 띠잉. 띠잉.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려서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커룸의 문을 열자 단박에 응원가와 북소리, 손뼉 치는 소리가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삼킬 것처럼 달려들었다.

선수용 터널에 서 있는 동안 방송용 카메라가 먼저 다가왔고, 다음으로 에스코트를 위해 어린아이들이 다가왔다.

자그락. 자그락.

아이들과 함께 통로를 나선 정지우는 다른 선수들을 따라 본부석 메인을 향해 섰다.

좌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 정신이 멍할 정도로 엄청난 응원가, 잘 정돈된 잔디, 그리고 그것들을 빛나게 하는 진행까지.

마치 축구를 위해 오늘이 있다는 것처럼 호슨스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홈팀인 웨스트 브로미치는 흰색에 파란 세로줄 상의, 그리고 파란색 팬츠와 양말을, 원정팀인 유니온 시티는 흰색 위아래와 역시나 흰색 양말을 착용했다.

골키퍼인 정지우는 노란색 유니폼에 장갑을 낀 채 뒷짐을 진 자세로 앞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이럴 때 관중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느닷없이 욕을 하거나 손가락으로 모욕적인 표식을 그려 내는 경우가 있어서 공연히 기분만 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수들이 드나드는 통로 왼쪽의 관중석에서 덩치가 커다란 중년 여자가 인디언이 연기 피울 때처럼 하얀 목도리를 위아래로 펄럭이며 정지우의 시선을 뺏고 있었다.

힐끔.

시선을 잠시 주었던 정지우는 고개를 기울이며 덩치 큰 여자를 보았다.

“Ji!”

메기였다. 그녀가 정지우를 향해 흰색 목도리를 마구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릴리는? 외출한다더니 축구 경기를 관람하러 온 건가?

메기의 바로 옆에서 두툼한 옷에 모자를 쓴 릴리가 작은 손을 흔들고 있었고, 그녀의 오른편에 앉은 데이지가 릴리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짧은 행사가 지나가고,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이 한 줄로 지나가며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악수를 나눴다.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지우는 오른편 골대로 움직이며 분명하고 확실하게 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릴리!’

그러고는 짧게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 경기장 어디엔가 빌도 있을 텐데?

“Mom!”

릴리가 더할 수 없이 환한 얼굴로 웃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메기와 데이지가 뭐라고 소리치는데 홈 관중들의 응원가가 다시 시작되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골대로 걸어간 정지우는 왼편 포스트에서 오른편 포스트까지 걸은 뒤에 점프를 해서 크로스바를 손으로 건드렸다.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에 몰려선 다음이었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어 경기 시작을 알렸다.

부천은 새벽 2시였다.

인터넷 전문 방송을 통해 중계를 틀어 놓은 박용근과 전은주는 사이좋게 이어셋을 한쪽씩 나눠 낀 채,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이어셋을 통해서 귀가 얼얼할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화면에 두 팔을 높다랗게 들며 몸을 푸는 정지우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전은주는 기도처럼 입 앞에 모았던 두 손을 움직여 물개 박수를 쳤다.

신동수가 소주와 맥주를 부어 만든 폭탄주를 한승관과 문광국 앞에 놓아주었다.

브라질 후반과 유고전을 망친 것에 대한 비난은 상상을 뛰어넘었었다. 협회장인 허양수가 수단껏 내리긴 했지만, 장진모가 쓴 기사가 불러온 후폭풍도 컸다.

‘쓰레기’나 ‘세금 도둑’은 그나마 낫다.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을 위해 너희는 제발 집에 쉬어라.’도 참을 만했다.

그러나 ‘한국 축구의 암’이라든가, ‘식구들 보기 부끄럽지 않냐?’라는 댓글에는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었다.

한승관은 모니터에 정지우의 모습이 나오는 순간 인상을 버럭 쓰며 술을 들이켰다.

오늘 정지우가 멋진 활약을 해서 또 영국 언론에 오르내리면 얼마나 많은 비난이 몰아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일이었다.

가장 환장할 일은 경기를 봤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분노를 눌러 가며 정지우의 경기를 보고 있는 거였다.

“후우.”

술 냄새를 털어 내느라 한승관이 길게 숨을 내쉰 직후였다.

“하여간 운빨도 더럽게 좋아.”

신동수가 혼잣말처럼 말을 뱉으며 술병을 들었다.

“그렇잖습니까? 거칠기로 유명한 챔피언십에서 부상 한 번 안 당하고. 애새끼가 또 얍삽하게 제 편 만드는 건 정말 잘해요. 선배들에게 대드는 거로 후배들 환심 사 봐야 나중에 제 놈도 똑같이 그렇게 당한다는 것을 정말 모르나?”

신동수가 터트리는 불평이 듣기 거북하다는 것처럼, 모니터에서 주심의 휘슬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문광국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입을 다문 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웨스트 브로미치는 4-3-3의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투박하고, 선이 굵은 축구, 그런 만큼 힘과 투지가 넘치는 축구. 전반 5분이 흐르기도 전에 웨스트 브로미치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퍼엉!

웨스트 브로미치는 공을 잡으면 거의 무조건이라고 할 만큼 유니온 시티의 구석으로 차 놓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관중들의 광적인 응원 덕분일까?

킥 앤드 러시(kick and rush)의 교본 같은 공격이었는데, 미치는 것은 이런 단순한 공격이 제법 파괴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우와- 아!”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가 꼼빠니를 제치고 달리자 단박에 홈 관중들이 함성이 터트렸다.

거기에 맞춰 10번 빅토르, 7번 제임스가 동시에 골대로 달려들었고, 19번 칼럼이 2선에서 어슬렁거렸다.

퍼엉!

11번 크리스가 골대 앞을 향해 강하게 공을 찼다.

휘이익!

라파엘이 10번 빅토르와 동시에 몸을 띄웠고, 스웰던과 멜스가 달려드는 선수들을 몸으로 막으며 버텼다.

“우-!”

다행히도 공은 10번 빅토르의 머리를 넘어 날아갔는데, 대신 반대편에 있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4번 체스피가 잡았다.

이상하게 몰리는 경기였다.

4-4-2로 나선 유니온 시티가 어쩐지 무식하고 덩치 커다란 웨스트 브로미치에게 걸려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느낌?

그러나 당장 이걸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는 알기 어려웠다.

일단은 막아 내는 게 급해서,

“카알!”

정지우는 자세를 낮춘 채로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 가르드너를 가리켰다.

“우와- 아!”

웨스트 브로미치의 4번 체스피가 공을 뺏기 위해 달려든 스웰던의 뒤쪽으로 공을 툭 차 놓고 달리자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퍼엉!

체스피는 재빠르게 골대 앞으로 공을 날렸다.

정교하지도 않다. 심지어 어설프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은 짧은 패스를 하면 벌금이라도 낸다는 것처럼 기회가 될 때마다 골대 앞으로 공을 날려 댔다.

휘이익!

유니온 시티의 카알과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이 동시에 몸을 솟구쳤고, 이번에는 데이빗과 꼼빠니, 그리고 카알이 몸으로 상대 팀 선수들을 막았다.

터엉!

헤딩은 웨스트 브로미치의 8번 크래익이 따냈다.

그러나 억지로 머리에 맞춰서인지 공은 골대 위를 높다랗게 지나쳐서 관중석으로 날아가 버렸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엉뚱한 헤딩이었다. 그런데도 홈 관중들은 박수로 크래익의 헤딩을 응원했다.

성과는 다음이고, 우선 골대 앞으로 공을 날렸다는 것과 머리에 맞췄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관중들이 지르는 ‘Ollez! Ollez! Ollez! Oh-!’라는 응원이 정지우의 귀에는 ‘달려들어! 달려들어! 일단 달려들어!’라는 것처럼 들렸다.

뒤편에서 던져 준 공을 받은 정지우는 천천히 골대 앞에 공을 놓았다.

단순하든, 무식하든, 이런 식으로 자꾸 당하기만 하는 건 분명 위험한 일이다.

양손을 앞으로 몰아서 더 나아가란 신호를 펼친 정지우는 오른발을 뒤로 빼서 바닥을 두 번 찍었다.

콕콕.

멀리 보낼 생각이었다.

천천히 달려 나간 정지우는 있는 힘껏 공을 차 주었다.

퍼어엉!

높다랗게 떴다가 내려앉는 공을 향해 오른쪽에 있던 유니온 시티의 26번 브라운이 몸을 띄웠다.

터엉.

브라운의 머리에 맞은 공이 세 번이나 유니온 시티와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 사이를 왔다 갔다 한 이후에 바닥에 떨어졌다.

투욱!

공은 레믹이 잡았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을 파고들었다.

콰악.

그러나 웨스트 브로미치의 3번 조나스와 5번 클라우디오에게 막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우-!”

바닥에서 상체만 세운 레믹이 주심을 향해 두 팔을 높게 들어 보였으나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공은 웨스트 브로미치로 넘어가서 왼편으로 갔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고, 그대로 오른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퍼엉!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길게 넘어왔다.

“우와- 아!”

웨스트 브로미치의 10번 빅토르가 악착같이 달려서 공에 발을 대는 순간에,

콰아악!

그걸 막기 위해 달려들었던 스웰던과 커다랗게 부딪쳤다.

선심이 빠르게 깃발을 휘둘렀고,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며 달려왔다.

주심은 웨스트 브로미치의 10번 빅토르의 파울을 선언했다.

“우우-!”

홈 관중들의 야유가 터졌으나 그런다고 판정이 바뀌지는 않는다.

스웰던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로 움직이는 동안, 데이빗이 카알에게 공을 차 주었다.

반격이다.

툭! 투욱! 툭!

유니온 시티는 카알에서 데이빗, 데이빗에서 맥슨, 그리고 다시 맥슨에서 데이빗으로 공을 돌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투우욱!

그리고 마침내 데이빗이 맥슨의 앞으로 공을 길게 넘겨주었다. 공을 향해 달리는 11번 맥슨에게 웨스트 브로미치의 4번 체스피가 태클을 시도했다.

퉁! 투욱!

그러나 제임스의 발에 걸려 튀어 오른 공이 맥슨의 정강이에 맞고 앞으로 튀는 바람에 오히려 공격을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다.

“우- 와아!”

처음으로 터진 유니온 시티 응원단의 함성이었다.

맥슨은 빠른 발을 이용해 곧바로 골대로 치고 들어갔다.

투욱!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페널티 에어리어 왼편에 서 있는 레믹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기가 막힌 슛 찬스였다.

투둑! 터억!

그런데 공을 받은 레믹은 오른쪽으로 좀 더 치고 들어가려다 수비수에게 걸리고 말았다.

“우-!”

유니온 시티 응원단들이 머리를 감싸 쥐었고, 웨스트 브로미치 응원단은 박수로 수비수를 응원했다.

정지우는 허리에 손을 올린 자세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살폈다.

고작 일주일 만에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거지?

마치 처음 유니온 시티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꼭 그 모습이었다. 서로 알아서 잘하고, 가능하면 다른 선수의 플레이를 건드리지 말자, 뭐 이런 분위기?

아무튼 골이 터지든, 아니면 하늘 높이 올라가는 인공위성 슛이 되든 간에, 레믹은 맥슨이 준 공을 그대로 갈겼어야 했다.

저렇게 어처구니없는 플레이 하나가 팀 전체의 사기를 얼마나 부러트리는지 당사자만 빼고 모두 다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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