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44화 (44/262)

제7장. 너 이런 놈 아니었잖아? (2)

박용근은 전화기를 들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안내 보드에 ‘도착’이라는 표시가 뜬 이후로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시선이 달려갔는데,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정호의 전화는 어제 받았다. 기자들을 피해 비행기의 티켓을 다시 샀다는 연락이었다.

전은주가 운영하는 꽃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오전부터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고, 그건 전은주도 마찬가지여서 둘이 부리나케 인천공항으로 달려온 길이었다.

자식이 없어서 집착하는 거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가르치다 보면 그 왜 자식보다 더 애착이 간다는 제자들 이야기가 널려 있는 거 아니겠나?

정지우는 그런 아이였다.

녀석이 중학생 때 처음 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생활이 어려워 보이는 아이였다.

겁먹고 힘겨운 눈을 감추기 위해 그 어린아이의 눈에 강단과 독기가 올라와 있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었다.

게이트 문이 열리며 긴 비행에 지친 승객들이 나와서 박용근과 전은주의 시선이 빠르게 그쪽으로 달렸다.

녀석은 무엇보다 키와 체격이 나쁘지 않았다.

"축구 해 볼래?"

"저 못해요."

녀석의 대답은 그랬었다.

어쩐지 진심이 아닌 것 같은 대답이었다.

"너 일단 수업 끝나고 운동장으로 나와 봐."

"예."

정지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습게도 핸드볼부에서 녀석을 탐낸다는 정보를 듣고 나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중학교 축구부부터 학부모의 지원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고등학교 축구부에 진학하려면 적당하게 줄도 타야 하고 그런 일을 하는 데 경비도 제법 든다.

그래서 줄이 없는 사람은 결국 감독을 찾아와서 인연을 만들어 달라며 손을 비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다.

대학 진학은 그보다 더 가혹한 조건을 요구한다.

지금은 프로로 바로 데뷔할 수 있으니 좀 낫지만, 아무튼 연줄은 기본이고, 거기에 선수가 적당한 성과를 보여 줘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다. 그러려면 당연하게 고등학교 때 공을 넣을 수 있는 포지션에 서 있게 만들어야 한다.

혹시 내 자식이 밀려날까 봐, 조금이라도 좋은 포지션을 얻게 하려고, 관심에서 벗어나지는 않을지.

학부모들은 조를 짜서 전지훈련을 따라다니며 밥과 빨래를 도맡고, 돌아가면서 고기를 준비해 오며, 심지어 감독과 코치의 빨래까지 담당하던 시절이 있을 정도였다.

다른 운동부도 비슷한 관행은 많았다.

핸드볼부가 정지우를 쉽게 안지 못한 이유였다.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다.

혼자서 원맨팀을 만들어 전국대회 우승할 정도의 재능이 있거나, 빵빵한 후원을 받거나.

원맨팀이 되면 오히려 대학에서 손을 뻗친다. 그 선수를 데려가면 우선 성적을 보장받기 때문이었다.

그때 끼워 팔기처럼 학부모의 지원이 제법 되는 선수 둘, 혹은 셋을 끼워 대학으로 보낼 수 있다.

“내가 공을 차 줄 테니 골대로 슈팅을 날려 봐.”

박용근은 수업 끝나고 찾아온 정지우에게 간단하게 몸을 풀게 한 뒤에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서 공을 굴려 주었다.

축구부원들이 보고 있는 앞이다.

퍼엉!

정지우는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자세로 공을 찼었다.

"우!"

부원들이 감탄사를 터트리던 그때를 박용근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심지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을 정도였으니까.

축구공이 빨랫줄처럼 쭉 날아간다고만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중심을 제대로 맞아 회전이 걸리지 않은 축구공은 야구에서 말하는 마구처럼 이리저리 휘면서 날아간다.

세워 놓고 차는 거라면 일반인도 그런 공을 날릴 때가 있다.

그런데 정지우는 박용근이 굴려 준 공을 단번에 그렇게 만들어 낸 거였다.

'이놈 봐라?’

박용근은 공을 열 번쯤 더 굴려 주었다.

우습게도 정지우는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훅이나 슬라이스가 나는 슈팅으로 끝냈다.

"너 이리 와 봐. 키가 얼마야?"

"171입니다."

중학교 1학년치고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100미터 기록은?"

"잘 모릅니다."

"저기 골대에 가서 내가 신호하면 여기까지 달려 봐."

정지우는 골대 앞으로 움직였다.

교복 상의를 벗어서 낡은 반소매 면 티에 교복 바지, 오래된 운동화를 신은 상태였었다.

축구에서는 100미터 달리기보다 30미터 달리기가 더 중요하다. 순간적인 스피드가 얼마나 나오는지, 잠시 쉬는 틈에 얼마나 회복하는지, 마지막으로 그 속도를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거다.

박용근이 손을 내리자 역시나 훈련받지 않은 자세로 정지우가 달렸었다.

왜 그랬었을까?

힘겨운 삶을 이겨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렇지만 이 달리기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슬픔이 박용근을 향해 달려오는 정지우의 얼굴에 담겨 있던 것 같았다.

"헉헉. 헉헉."

최선을 다해 달려온 정지우는 무릎을 양손으로 짚은 채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모처럼 후련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서 말이다.

"너 이리 와."

훈련하는 부원들이 힐끔힐끔 시선을 주는 앞에서 박용근은 정지우를 불렀었다.

“여보!”

“어?”

전은주가 불렀고, 박용근은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공항 게이트로 시선을 던졌다.

전은주가 본 청년은 비슷하게는 생겼지만, 정지우는 아니었다.

전국대회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던 순간, 정지우가 달려오던 그 기억 하나면 된다.

박용근 축구 인생에 그런 제자 하나 길러 냈고, 그런 기록 하나 얻었으면 충분한 거다. 그 녀석에게 애정을 쏟았던 건 계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녀석이 보여 준…….

그때, 게이트가 열려서 고개를 돌린 박용근의 시선에 정지우가 들어왔다.

과거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박용근은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두리번거리던 정지우의 눈과 박용근의 눈이 똑바로 마주친 순간, 박용근은 남모르게 이를 물어야 했다.

햇수로는 7년 만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외국으로 떠났던 제자가 이제 26살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니까.

그런데 모니터로 보았던 경기에서 그렇게 강한 이미지였던 정지우가 오늘은 중학교 때 처음 보았었던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힘겨운 시간을 억지로 견디던 그런 얼굴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붉게 물든 눈으로 정지우를 보는 전은주 역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지우가 캐리어를 밀며 똑바로 걸어왔다.

그리고 녀석은 무슨 깡패 흉내를 내는 것처럼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감독님…….”

“고생했다.”

박용근은 정지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을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입을 벌리면 뜨거워진 눈시울을 들킬 것만 같아서였다.

박용근과 비슷한 눈을 한 정지우가 이번에는 눈이 발갛게 붉어진 전은주를 향해 인사했다.

“어서 와, 지우야. 고생했지? 많이 힘들었지?”

팔을 뻗어 정지우의 손을 잡아 준 전은주가 코를 훌쩍이다가 결국 눈물을 닦아 냈다.

반갑고, 어색한 시간이었다.

뒤에 있던 유정호가 인사하지 않았다면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공항에 박용근과 전은주가 나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출국장을 나오는 순간, 그 많은 사람 중에 박용근의 얼굴이 또렷하게 시선에 들어왔었다.

똑같다.

마지막 보았던 모습과.

거짓말처럼 세월을 덮어쓰고 있었지만, 검게 탄 얼굴과 쭉 찢어진 눈, 강인해 보이는 광대까지 박용근은 변함이 없었다.

전은주 역시 같은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왜 이제야 왔을까?’ 하는 생각, 그것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뵈면 되는 건데, 하루라도 빨리 와서 용서를 빌었어야 하는 건데.

“일단 나가자.”

유정호와 인사를 마친 박용근이 홱 하고 몸을 돌려서 공항 출구로 향했다.

정지우와 유정호가 각자 캐리어를 밀며 뒤를 따랐고, 아직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는 전은주는 정지우의 곁을 함께 걸었다.

이제는 정지우의 어깨에 머리가 겨우 닿는 전은주가 캐리어 손잡이에 손을 걸었다.

“제가 할게요.”

“같이 끌어.”

고작 한마디다.

그런데 그 말에 겨우 가라앉던 정지우의 가슴이 다시금 울컥하며 뜨거워졌다.

“배는 안 고프니?”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뭐 먹으러 갈까? 뭐 먹고 싶어?”

자꾸만 정지우의 팔과 등을 쓰다듬으며 전은주는 정지우가 염려스러운 얼굴이었다.

공항 건물을 나온 다음이었다.

“감독님, 저는 여기서 공항 리무진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유정호가 앞서가는 박용근을 향해 커다랗게 말을 건넸다.

“왜? 그러지 말고 함께 가서 저녁 먹어.”

“오늘은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나왔다가 바로 들어가는 바람에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지금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집이 어딘데?”

박용근이 서운한 얼굴로 다가왔다.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저야 공항 리무진으로 가면 되니까 여기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우 들어가기 전에 함께 식사하시지요.”

“서운해서 어쩌지?”

그렇게 유정호와 헤어진 후에 박용근과 전은주, 그리고 정지우는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눈에 익숙한,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만큼이나 세월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트렁크에 커다란 가방을 넣자 차의 뒤가 조금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가자.”

박용근이 운전석으로 향하자 정지우가 얼른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전에도 어딘가를 함께 갈 때면 이렇게 했었다.

“지우야, 오늘은 네가 앞에 타.”

“아니에요.”

전은주의 권유를 사양했을 때였다.

“앞에 타. 비행기 안에서 오래 다리 구부리고 있었을 텐데 최대한 의자 뒤로 빼고 편하게 앉아.”

박용근까지 조수석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고 권유하는 터라 정지우는 조수석에 올랐다.

“지우야, 의자 뒤로 빼.”

전은주가 박용근의 뒤에 앉아서 두 번이나 권한 다음에야 정지우는 조수석의 의자를 뒤로 밀었다.

카라라랑.

승용차가 거친 소리를 내며 앞으로 움직였다.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고?”

“예.”

천천히 차를 움직인 박용근이 정지우를 힐끔 살폈다.

공항을 빠져나온 승용차는 급할 것 없다는 투로 3차선을 달렸다.

“저녁은 뭐 먹을래?”

“괜찮습니다.”

“이 녀석이? 너 좀 컸다 이거냐?”

“예?”

“뭐 이리 공손해? 너 이런 놈 아니었잖아?”

정지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좋은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말 좋은데 이게 이상하게 감정이 표현되지는 않았다.

죄송해서 그런 것과는 달리 무언가 감정을 꽉 틀어막아서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계약은 어떻게 된 거냐?”

“이적 규정 때문에 가계약으로 처리했는데, 프리미어리그로 승격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사는 곳은?”

“투룸인 아파트에 있는데, 조만간 구단에서 집을 구해 준다고 해서 그리 옮길 생각입니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했고, ‘꽃집은 어떠세요?’ 하는 작은 질문 두어 가지를 던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척이나 반갑게 다가왔다.

“너는 키가 큰 거냐? 팔이 길어진 거냐?”

“그래 보이십니까?”

“아, 그놈 참! 말 좀 편하게 하자. 모르는 놈 차에 태운 것 같아서 뻑뻑하다.”

“예.”

박용근이 저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대화도 이뤄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저녁 특별하게 먹고 싶은 거 없으면 그냥 집에 가서 먹는 건 어떠냐?”

“예? 그래도 됩니까?”

박용근이 고개를 돌렸다가 넉넉하게 웃으며 도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보! 밖에서 먹느니 이 녀석 온다고 준비한 거로 저녁 먹자.”

“그래도 될까? 모처럼 왔는데 어디 중국집이라도 가지?”

“저 집에서 먹고 싶어요.”

“정말?”

“예.”

그렇게 저녁 메뉴가 결정되어서 차는 바로 익숙한 빌라를 향해 달렸다.

도착하는 데 1시간쯤 걸렸다.

빌라에 올라간 정지우는 가방을 놔둔 채로 박용근과 전은주에게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그래, 지우야. 그러지 말고 얼른 옷 갈아입고 쉬자.”

“이래야 마음 편하게 밥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지우의 당부에 박용근이 ‘그러자, 그럼.’ 하고 전은주의 손을 잡고 소파 앞에 앉았다.

정지우는 그 앞에 서서 묵묵하게 절을 했다.

두 사람이 앞에 있었다.

잘못을 이미 세월에 흘려보낸 채로, 떠나기 전날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반겨 주는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후에 고개를 숙이자 이제는 혼자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절을 마친 정지우가 자리에 서서 고개를 떨군 순간이었다.

박용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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