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43화 (43/262)

제7장. 너 이런 놈 아니었잖아? (1)

한국의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에 기대나 설렘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자고 일어나자 정지우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솔직히 좀 우습기도 했다.

유니온 시티와 대박이라고 할 정도의 계약을 맺은 것보다, 국가대표라는 무게보다,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하는 모습이.

“야! 이거 몰랐는데 너 대단하다?”

외출 준비가 끝난 후에도 유정호는 정지우가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노트를 들여다보며 연신 감탄을 쏟아 내고 있었다.

“여기 이 표시는 뭐냐?”

유정호가 ‘파랄리’라는 선수의 칸에 표시된 부호를 정지우에게 디밀었다.

3이라는 숫자 뒤에 괄호를 치고 안에 2를 적어 넣었다.

“파랄리의 치고 달리는 방향인데, 세 번에 두 번은 이쪽 화살표 방향으로 움직여.”

“그럼 이 작대기로 연결된 숫자 2는 뭐야?”

“그건 이렇게 선수 2명이 막으면 그때 주로 반대쪽으로 움직인다는 뜻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유정호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경기가 끝나고 다 기억했다고?”

“그런 것도 있고, 혼자 있을 때는 주로 경기 중계를 봤으니까. 안 그러면 영어가 이렇게 늘지 못했을걸?”

“너 정말 경기를 다 기억해?”

“다들 그러지 않아?”

“골키퍼잖아! 미드필더에서 드리블 치는 거고?”

정지우는 어이없다는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형! 혹시 골키퍼가 페널티 에어리어에 공이 올 때까지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그런 건 아닌데…….”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생각한 건 분명한 모양이었다.

“일어나. 오늘 할 일 많잖아.”

“알았다. 얼른 가서 처리하자.”

유정호가 노트를 원래 자리에 꽂아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

김문호는 ‘삼삼이네’의 테이블에 앉아 맞은편에 있는 박용근의 잔에 소주를 부어 주었다.

불판에서 누렇게 익은 고기가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박용근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승관이 그 새끼가 그런 주접을 떨었었다 이거지?”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지랄해서 보내 놨는데 느닷없이 계약됐다는 보도랑 지우가 한국에 온다는 뉴스가 떴더라고.”

또다시 소주잔을 단숨에 들이켠 박용근이 그렇잖아도 작은 눈을 더욱 찌그러트렸다.

“야! 고기 좀 먹어!”

“후우! 이 개새끼들이! 내가 얌전히 참고는 있었는데 이건 진짜 해도 너무하네!”

“그것도 이젠 끝이다. 뭐라고 해도 지우 소속팀인 유니온 시티의 승격은 확실한 거잖냐. 막말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 아니냐? 꼼수를 피우든 말든, 명분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지우가 최고라는 게 증명될 텐데, 뭘.”

김문호가 입에 넣은 뜨거운 고기를 이상한 표정으로 씹으며 또다시 소주병을 들었다.

“어차피 알고 있었던 일인데 뭘 그래. 너 옛날에 부상당했을 때 꼬락서니랑 비슷한 거지. 그래도 그때는 실력만 있으면 인정은 받았었는데. 요즘은 세상이 정말 변했어.”

불판에 올린 고기를 뒤집던 김문호가 훌쩍 술을 털어 넣고 바로 채워 놓았다.

“그래도 난 네가 부럽다.”

“뭐가?”

“넌 지우라도 건졌지. 난 축구판에서 건진 게 달랑 너 하나다.”

“미친놈. 김문호 축구 교실은?”

“그거 닫을까 생각 중이다.”

박용근이 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콩나물 무침을 한 젓갈 집어 입에 넣었다.

“협회 지원금 명목으로 별 병신 같은 놈을 감독으로 보내더니, 이놈이 그 어린애들 가르치는데도 부모 줄을 세우더라고. 내가 축구 교실 만든 이유가 그런 게 싫어서였는데. 염병!”

박용근에게 술잔을 내민 김문호가 틱 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친 후에 후련하게 마셨다.

“너 꽃집 일 하는 거 보고 결심했다. 난 그냥 용품 가게나 해 볼란다.”

박용근은 이에 낀 음식물을 혀로 빼는 것처럼 볼을 움직이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야! 내가 용품점 하겠다니까!”

“쯧! 해. 하면 되지, 그걸 왜 자꾸 말해?”

“에이, 나쁜 새끼.”

“왜?”

“너, 지우 계약 보도 이후로 표정이 달라진 건 아냐? 아주 그냥, 동대문 1번 개가 아주, 아이구, 지우 반만큼만 나한테도 관심을 좀 줘 봐라.”

박용근은 김문호의 불평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지우 일로는 그렇게 눈이 쭉 찢어지던 놈이 내가 축구 교실 문을 닫겠다는데도 어쩌면 그런 표정을 할 수가 있냐? 치사하다, 치사해!”

“고기 탄다. 고기 먹자.”

김문호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

조동익은 청담동의 유명한 일식집에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방에는 화려한 장식을 곁들인 회와 그에 걸맞은 음식들이 쭉 늘어져 있었는데, 조동익은 도자기 주전자를 들어서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일의 모양새가 영 엉뚱하게 흘러서 부끄럽게 되었어.”

“자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영국에서 결정 난 일에 개입할 수도 없었던 거 아닌가? 그나마 자네 정도 되니까 이렇게 풀어낸 거지. 그러니까 그런 소리 말아.”

잔을 내려놓은 이충도가 주전자를 받아 조동익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찌 됐든 속 썩이던 놈을 불러들였으면 됐지. 이번에 놈이 계약했다는 게 다 헛짓거리였다는 것만 알려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자자, 들자고.”

둘이서 작은 잔을 들어 보이고 동시에 마셨다.

“하아, 좋구만.”

이충도가 털어 낸 감탄처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회를 집어 입에 넣은 뒤에 또다시 상대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놈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우리 진용이 앞길을 매번 막아 대는지. 막말로 그놈은 들쭉날쭉 아닌가? 그에 반해 우리 진용이야 늘 잘하다가 한 번씩 슬럼프에 빠지는 건데, 그때마다 이렇게 우리 애 발목을 잡아 대니…….”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유니온 시티인가 하는 팀과도 아직 가계약이니까 이번 경기로 평가가 달라질 게 분명해.”

“확실한가?”

“두고 보라니까.”

이충도의 반가움이 잔뜩 묻은 질문에 조동익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그놈의 차출 협조를 위해서 우리 쪽이 광고비 명목으로 놈의 가계약금을 대준 모양새거든. 당연하게 평가전에서 진용이가 제 몫을 다하고, 녀석이 망신을 떨면 계약을 얼마든지 진용이 쪽으로 바꿀 수 있지.”

“자자, 술 받아, 이 사람아.”

이충도가 도자기 주전자를 잡아서 직전보다 공손한 태도로 술을 부어 주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는데, 반가운 소식도 있어.”

“그게 뭔가?”

“어쩌면 유니온 시티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축구 교실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네. 영국 프리미어리그 소속 구단의 축구 교실이라면 어떤가? 그걸 자네 회사가 후원하는 거야.”

“거, 정말 멋지군!”

이충도가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일세, 문 감독에게 뭐 하나 준비해 줄 게 있을까?”

“흠! 이번에 내가 분당에 짓고 있는 주상복합 있잖나. 거기 상가 점포 중 하나, 아니면 우리가 가진 그쪽 부지 중 하나를 적당한 모양새로 넘겨주면 어떤가?”

“그 정도면 문 감독도 절대 서운해하지 않을 걸세.”

그런데 정작 답을 한 조동익이 서운한 표정이었다.

“참! 자네, 그 큰 녀석 있지? 그 아이 이름으로 꼭대기 층 하나 넘겨 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소득 증빙은 대출 90퍼센트로 잡아서 해결할 거고, 내가 알아서 이자 내고 분납으로 상환할 테니까 그건 걱정 말고.”

“이 사람이! 내가 어디 그런 걸 바라고 이랬나? 진용이 재능이 워낙 뛰어나니까 그걸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워 주고 싶어 이러지. 그게 또 다 우리 축구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일이거든.”

조동익의 말이 끝날 때였다. 이충도가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얼굴로 술잔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솔직히 말을 안 해서 그런데, 내가 가진 거 다 팔아서 영국 2부 리그 구단이라도 하나 살까 했었어. 어쩌면 전국대회에서 우리 아이 기를 꺾어 놓더니, 이제 또 느닷없이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이럴 수가 있나? 자네라면 분통이 안 터지겠나?”

조동익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앞이다.

“솔직히 지난 4년 동안 누가 대한민국 골대를 지켰나! 우리 진용이가 죽을 둥 살 둥 지켜 놓은 골대를 그 근본도 없는 놈이 또다시 뺏어 먹으려고 드는 거야.”

“자자, 가라앉혀. 막말로 자네가 주는 광고 협찬으로 진용이 연봉이 다 나오는데 유니온 시티 구단이 그걸 마다하겠나? 아니라면 또 어떤가? 그 정도 후원이면 프리미어리그로 직접 갈 수도 있어. 자네와 내가 어떤 사람이야? 거기에 진용이까지, 우리 모두 대한민국 0.1퍼센트에 드는 사람들이야.”

조동익의 말을 듣던 이충도가 생각난 게 있다는 것처럼 안주머니에서 2겹짜리 봉투를 꺼냈다.

“거, 한승관 분석관이 있지? 내가 용돈이라도 좀 챙겨 왔어. 그리고 이건 자네 돌아다니면서 식사라도 좀 하고.”

“어허! 이 사람이! 사람을 뭐로 보고!”

“무슨 소리야? 이게 어디 자네 개인적으로 쓰는 건가? 아랫사람들 밥이라도 한 끼 사 먹이려면 그 작은 판공비로 어디 가당키나 하겠나? 어여 넣어. 손부끄럽네.”

“이거 참!”

말과 달리 조동익은 능숙한 태도로 2개의 봉투를 받아 품에 넣었다.

“진용이를 위해 건배 한 번 할까?”

“허허허허.”

조동익의 제안을 이충도가 만족한 웃음으로 받아 들었다.

***

점심과 저녁의 한중간쯤, 정지우는 유정호와 함께 병원에 들렀다.

정지우는 먼저 클레이의 병실을 찾았다.

그는 면도를 말끔히 해서 다시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때?”

“어제보다 좋아.”

정지우는 클레이에게 유정호를 소개해 주었다.

“Ji, 유니온과 계약한 거지?”

“아직 가계약인데?”

“그럼 된 거지. 한국 대표로도 선발됐다며?”

클레이가 사심 없는 얼굴로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를 잊으면 안 돼.”

“난 그런 거 안 좋아한다.”

“뭐?”

“남자가 남자에게 관심 갖는 거.”

클레이가 혀를 반쯤 내밀며 ‘뿌우!’ 하는 바람 소리를 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뒤였다.

“이제 나는 괜찮으니까 병원에 이렇게 자주 오지 않아도 돼.”

클레이가 정지우를 향해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오해하지 마. 위층에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런! 내가 오해하고 있었네. 누군데? 의사? 간호사?”

“너를 아는 유니온 시티의 열성 팬. 그렇잖아도 소개해 달라고 하던데?”

“그래?”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궁금함을 표시했다.

“내가 올라가서 말해 둘게. 네가 못 움직이니까 한 번 찾아가 보라고. 그래도 되지?”

“나야 영광이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에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짧은 인사를 마친 유정호가 뒤따라 나오면서 신기한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왜?”

“너 다중 인격이냐?”

“그게 무슨 소리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유정호가 정지우를 보았다.

“그렇잖아. 평소에 넌 그냥 좀 모자란… 아니, 어딘지 맹한 모습인데 경기장에선 전혀 다른 사람 같거든.”

엘리베이터가 열려서 둘이 올라탔는데 유정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오늘 보니까 클레이 만날 때는 또 다른 모습이다. 뭐냐?”

정지우는 피식 웃기만 했는데,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 함께 릴리의 병실로 움직였다.

릴리는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고, 책을 읽고 있던 메기가 정지우를 보고는 밖으로 나섰다.

“어쩌지? 지금 막 잠이 들었는데?”

“괜찮아요. 인사하세요. 이분은 내 에이전트, 정호, 유.”

정지우는 우선 유정호를 인사시킨 후에 메기에게 엘리베이터 앞쪽의 휴게실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전했다.

메기는 순순히 정지우를 따라 휴게실로 움직였다.

대충 손질한 머리칼, 힘겨움이 묻은 얼굴, 그리고 삶의 고단함이 드러난 복장.

휴게실로 들어서자 정지우는 바로 점퍼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메기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릴리 외출 선물이요.”

옆으로 여는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한 메기가 ‘오 마이 갓!’ 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눈물이 왈칵 올라온 눈으로 메기가 연신 ‘세상에!’를 외쳤다. 그런 뒤에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릴리와 여행 다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Ji!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선물이야.”

“릴리 덕분에 가질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더 고마워요.”

유정호가 정지우를 살피는 앞이었다. 메기의 비명 같은 울음에 병원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메기를 다독인 정지우는 그녀와 헤어져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때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였다. 둘이서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닫히기 전에 여의사 한 명이 들어섰다.

데이지였다.

“Hi?”

데이지가 먼저 인사했고, 정지우가 같은 인사말로 답을 했다. 유정호를 데이지에게 소개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정지우가 ‘Bye! Dr. Kim.’ 하며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신, 오늘 멋있었어요.”

데이지가 뜬금없는 말을 남기고는 현관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서울로 향하기 전날 저녁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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