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지금 뭐하는 거야? (1)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레드 블레이트에 비해 긴 잔디, 거칠게 나오는 라우쓰 FC 선수들, 거기에 어딘가 집중력을 잃은 듯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져서 상황은 전반 내내 밀리는 양상이었다.
마틴은 오른손 검지로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도 답답한 심정이 풀리지 않아서 그는 다시 입가와 턱을 커다랗게 쓸어 댔다.
FA컵 우승 따위에 욕심은 없다.
막말로 지난 5년을 노려서 마침내 프리미어 승격을 눈앞에 둔 상황인데 여기서 어떻게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겠나?
둥둥! 둥둥둥!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홈팀인 라우쓰 FC 응원단의 거센 응원을 들으며 마틴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쥬피터와의 계약 파기에 대해 정지우와 그의 매니지먼트에게 아직 알려 주지 않았다.
8게임 무실점?
미친 짓이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계약이다.
그러나 일단 정지우에게는 비밀로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남은 경기에 최선을 다하게 할 생각이었다.
막말로 남은 게임을 모두 클린 시트로 마치면? 거기에 정지우의 슈퍼 세이브 기록까지 더해진다면?
어쩌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지우의 몸값이 부풀어 오를 수도 있었다.
“우와- 아!”
마틴의 생각을 홈팀 관중들의 함성이 뚝 잘랐다.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유니온의 23번 멜스를 제치고 오른쪽을 파고들며 터진 함성이었다.
알레는 곧바로 오른쪽 코너에서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방향을 틀었고, 라파엘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투욱!
라파엘을 피해 알레는 공을 뒤로 돌렸다.
“우와- 아!
지금껏 2선을 돌던 라우쓰의 9번 야노시였다.
그가 공을 잡는 것과 동시에 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툭. 툭. 툭. 툭.
야노시는 소위 ‘잔발’이라고 부르는 보폭이 짧은 형태의 움직임으로 공을 몰았다.
데이빗이 주춤주춤 그의 앞을 막는 순간이었다.
투욱!
야노시가 시선을 골대로 준 채로 공을 왼쪽으로 밀었다.
달려든 것은 라우쓰의 10번 스테노였다.
퍼엉!
지금까지 존재감 없이 패스나 연결하던 라우쓰의 10번 스테노가 느닷없이 강력한 슈팅을 날린 거다.
제대로 맞았다.
그래서 공은 골대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쉼 없이 꿈틀거렸다.
휘익!
얀센은 분명 반 박자 느리게 몸을 날렸다.
“우우!”
그러나 골대의 왼쪽 모서리를 한 뼘쯤 벗어난 공은 그대로 관중석을 향해 날아갔다.
마틴은 뒤를 힐끔 보았다.
정지우를 넣었을 때 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 게임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마틴이 기대하는 대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그것도 라우쓰 FC에 끌려가던 1.5군이 위력을 발휘할까?
비록 정지우는 모르지만, 남은 게임에서 실점해도 그는 터무니없는 계약에 묶이지 않는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결승까지 남는 경기는 4게임.
무실점을 담보로 한 경기가 아닌 이런 게임에서 정지우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유혹이 마틴의 욕심을 부추겼다.
마틴은 마음을 굳히고 스크립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Ji를 준비시켜.”
마틴의 지시를 들은 스크립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Ji! 몸을 풀어!’라고 외쳤다.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온용 구단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
“Good luck!”
부러운 듯 말을 건넨 레믹에게 눈짓으로 답을 한 후에 골키퍼 장갑을 들고 벤치를 나섰다.
“우와- 아!”
그때, 자그마한 함성이 유니온 시티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기회를 잡았나?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린 정지우가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민 자세로 몸을 풀기 시작했을 때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발을 구르며 승리의 응원가를 커다랗게 부르기 시작했다.
이 양반들이 벌써 왜 이러지?
마틴과 코칭스태프, 레믹, 운동장을 뛰는 선수들, 그리고 정지우가 관중석을 힐끔 보았을 때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중간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정지우의 이름이 툭 하고 나왔다.
분명 교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응원가를 마친 관중들이 그라운드를 향해 양팔을 쭉 뻗어 내며 ‘우와- 아!’ 하는 함성을 질렀다.
승리의 응원가가 어느새 정지우의 응원가가 되고 말았다.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정지우의 출전이 승리를 담보한다는 의미도 된다.
이렇게 되면 승리의 응원가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할 텐데?
피식!
김칫국을 마시는 것 같아서 정지우는 입가에 웃음을 담았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관중석의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라우쓰 FC 홈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과 전반 내내 끌려가는 경기에 침묵하던 관중들이 힘차게 발을 구르고 목청껏 구호를 외쳐 댔다.
비록 적은 인원이었지만,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선수들을 향해 좀 더 힘을 내라고, 우리에겐 너희가 최고의 선수다, 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악착스럽게 함성을 질렀다.
마틴과 벤치에 앉아 있는 레믹, 그리고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데이빗과 라파엘, 얀센까지 모두 느꼈다.
느닷없이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말이다.
몸을 푸는 정지우를 확인한 순간,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관중들 사이에서 알지 못할 희망이 꿈틀거렸고, 그것이 곧바로 선수들의 움직임을 바꾸고 있었다.
라우쓰 FC 선수들이 정지우를 힐끔거리며 급하게 움직였다.
“우와- 아!”
그 순간이었다.
유니온 시티의 17번 맥슨이 중앙선 부근에서 라우쓰 선수가 어설프게 패스한 공을 가로챘다.
투욱!
맥슨은 그대로 공을 앞으로 굴려 주었다.
죽어라 달려 나간 23번 멜스가 공을 받고는 방향을 튼 다음 다시 맥슨에게 패스했고, 맥슨은 방향을 바꿔 반대편에서 뛰던 26번 브라운에게 넘겼다.
퍼엉!
브라운은 골대 앞으로 공을 띄웠다.
선수들이 뒤엉킨 사이에서 주장 데이빗이 높다랗게 솟구쳤다.
터엉!
공은 정말 깻잎 한 장 차이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를 벗어났다.
“우우!”
데이빗이 머리를 감싸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아무튼 모처럼 유니온 시티의 슈팅이 나왔고, 그만큼 분위기도 살아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유니온 시티 관중들의 함성이 라우쓰의 홈구장 그린메이트를 가득 메웠을 때였다.
삐익!
주심이 선수 교체를 지시했다.
불만을 감추며 걸어 나오는 얀센을 향해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정지우는 터치라인에서 기다렸다가 그 앞까지 온 얀센과 손을 마주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또다시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정지우의 응원가를 커다랗게 불렀다.
정지우가 골대를 향해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동안,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응원가는 멈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좀 더 커다랗게 변해 라우쓰 FC의 홈구장 그린메이트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후우!”
정지우가 골대 앞에 도착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응원가를 끝낸 관중들이 정지우를 향해 손을 뻗고는 ‘우와- 아!’ 하고 함성을 질러 댔다.
주심이 ‘이게 무슨 일이냐?’라는 듯한 시선으로 데이빗을 바라본 뒤에 다시 휘슬을 불었다.
라우쓰의 골키퍼 해드슨이 앞쪽에 있는 수비수에게 공을 밀어줄 때였다.
지금까지 위치를 지키며 경기를 풀어 나가던 맥슨이 공을 받은 라우쓰의 수비수에게 달려들었다.
투욱!
수비수가 빠르게 옆에 있던 동료에게 공을 돌린 다음이었다.
이번엔 꼼빠니가 공을 받은 선수에게 바싹 달려들었다.
당황한 수비수가 골키퍼를 향해 공을 패스하는 순간,
“우와아!”
유니온 시티의 맥슨이 전력 질주로 공을 향해 뛰었다.
라우쓰의 골키퍼 해드슨이 정말 다급하게 공을 걷어 냈지만,
“우와- 아!”
공을 받은 것은 데이빗이었다. 그것도 중앙선과 골키퍼 에어리어 꼭 중간에서였다.
투욱!
데이빗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고, 왼쪽에서 23번 멜스, 오른쪽에서는 17번 맥슨이 함께 뛰어들었다.
왼쪽으로 주어도, 오른쪽으로 넘겨도 완벽한 찬스였다.
라우쓰의 수비수들이 양쪽으로 갈렸고, 2명이 데이빗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투욱!
그런데 골키퍼 에어리어 바로 앞까지 달려간 데이빗은 공을 잘못 찬 것처럼 옆으로 흘렸다.
레믹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을 때, 공을 향해 달려든 꼼빠니가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수비수들이 좌우로 갈렸고, 남은 2명은 데이빗에게 시선을 뺏긴 상황이어서 꼼빠니는 글자 그대로 마음껏 슈팅을 날릴 수 있었다.
퍼어엉!
잔디를 파헤치는 것처럼 깔려서 날아간 공은 그대로 라우쓰 FC의 골대 왼편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렁!
“이예에에에에에!”
이 경기에 이기면 FA컵 8강에 오른다.
유니온 시티도 아직 그런 성적을 올려 본 적은 없었다.
원정 온 관중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펄쩍펄쩍 뛰며 환호를 질렀고, 시즌 첫 골을 기록한 꼼빠니는 데이빗에게 달려가 펄쩍 뛰어올랐다.
마틴은 그사이 버릇이 된 것처럼 자리에서 달려 나가 허공에 대고 주먹을 뻗었다.
스크립터, 팀 닥터, 스태프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껑충거리며 뛰는 동안, 정지우는 양손 검지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몰려 있는 시커먼 구름이 어쩐지 인상을 찌푸린 박용근의 얼굴처럼 보였다.
‘감독님, 조금만 참으세요.’
정지우가 시선을 내렸을 때 꼼빠니를 축하해 주고 달려온 라파엘과 클레이가 손을 내밀었다.
툭! 툭!
정지우는 그들과 손을 마주쳤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득점을 기뻐하는, 그리고 FA컵 8강을 기대하는 응원이 커다랗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라파엘! 라인을 올려! 차라리 그게 수비에 유리해!”
“오케이, Ji!”
“클레이! 중거리 슛을 막아 줘! 명심해! 바싹 붙는 것보다 중거리 슛이 더 무서워!”
“Got it!”
삐이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라파엘이 수비수들을 이끌고 수비 라인을 올렸다.
4-4-2다.
당연하게 지금껏 느슨하던 중앙선 부근에 8명의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빡빡하게 들어선 모양이 나왔다.
라우쓰 FC 선수들이 당황한 것처럼 허둥거렸다.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꼼빠니였다.
전반 내내 수비에 치중했던 그는 골을 넣고 나더니 완전히 낚지 먹은 황소처럼 뛰어다녔다.
투욱!
그리고 그는 또다시 공을 얻어 냈다.
꼼빠니가 건네준 공을 받은 데이빗은 오른쪽 뒤에 있던 클레이에게 공을 넘겨주고 앞으로 달렸다.
투우욱!
클레이는 공을 잡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넘겨주었다.
“우와- 아!”
수비수들 너머로 공이 날아갔고, 데이빗과 라우쓰 FC 수비수가 공을 따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데이빗이 높게 떠올라 머리로 공을 넘겼다.
공을 받은 건 함께 뛰던 꼼빠니였다.
앞에 공간이 제법 있어서 달려들어야 할 때였다.
퍼엉!
그런데도 꼼빠니는 반대편으로 공을 넘겨주었다.
“우와- 아!”
23번 멜스는 그토록 원하던 기회를 전반 종료 직전에 잡았다.
그는 골대를 향해 공을 툭 차 놓고 있는 힘껏 달렸다.
중앙에 데이빗, 반대편에서 꼼빠니가 함께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슛을 해도, 패스를 해도 상관없는 기가 막힌 기회였다.
주춤!
그러나 멜스는 그 결정적인 기회를 잡고서 데이빗과 골대를 보며 반 박자를 죽였다.
터엉!
그런 다음 수비수가 달려들자 있는 힘껏 슈팅을 날렸는데, 공은 인공위성을 맞추겠다는 것처럼 저 높이 날아갔다.
“우!”
아쉬움 가득한 탄성이 울릴 때 멜스는 머리를 감쌌다.
그가 골대를 힐끔 보며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삑! 삐익!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정지우는 공을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한 채 전반이 끝나 버렸다. 클린 시트 기록이 대략 15분 정도 길어진 거니까 보기에는 참 좋겠다.
그라운드를 걸어 나오며 정지우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경기를 해 나갈 거다.
박용근 축구 교실을 선물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