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늘을 이렇게 날아서. (3)
선수 전용 터널을 빠져나가자 우중충한 하늘과 녹색의 잔디가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둥둥! 둥둥둥!
하부 리그 경기에 가면 유독 북을 치는 응원단이 많다. 부족한 응원단의 함성을 북소리로라도 메워 보려는 의도일 거다.
그런데 허리에 북을 멘 남자들은 왜 그렇게 다들 웃옷을 훌렁 벗는 건지. 그것도 여자들조차 부러워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을 가진 살집 좋은 아저씨들이 말이다.
둥둥! 둥둥둥!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응원가가 딱히 없는 관중들이 흔히 부르는 구호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FA 16강전이라 그나마 관중들이 많이 온 것일 텐데도 관중석의 3분지 1은 비었다.
정지우가 벤치에 앉아 그라운드로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북소리와 홈팀 라우쓰 FC 응원단의 구호 사이에서 유니온 시티 응원단의 구호가 들려왔다.
화요일 오후에 하는 경기라 정말 어지간해서는 오기 힘들었을 텐데.
이럴 때면 가슴이 뭉클한다.
그리고 저들에게 최선의 경기를 보여 주고 승리를 선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옆자리에 앉은 레믹이 다리를 경망스럽게 떨면서 응원단을 돌아볼 때 라우쓰 선수들이 걸음을 옮겨 심판진부터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라운드를 향해 몸을 돌리던 클레이가 정지우를 힐끔 보았다.
‘최선을 다해. 넌 최고다!’
정지우의 입 모양을 본 녀석이 입가에 웃음을 담고 제자리로 힘차게 뛰어갔다.
라우쓰의 선공이었다.
공을 밟고 선 라우쓰의 7번 블로이가 자신의 진영을 둘러보았을 때,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었다.
“우와!”
함성과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터져 나오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방으로 공을 돌린 라우쓰 FC 선수들이 서서히 공격 형태를 가다듬었다.
4-4-2 포메이션을 선택한 유니온 시티에 맞서 라우쓰는 4-3-3의 형태를 유지했다.
주의할 선수는 역시 7번 블로이와 9번 야노시, 10번 스테노, 그리고 11번 알레였다. 그 외에 비디오를 통해 보았던 3번 클랍의 오버래핑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정교함은 부족하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강한 축구를 구사하는 팀, 라우쓰 FC.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공을 돌리는 라우쓰 진영을 살폈다.
분명 처음에는 4-3-3의 포메이션이었던 라우쓰 선수들이 어느 틈에 4-2-3-1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 정도로 라우쓰의 9번 야노시나 10번 스테노가 유니온 시티의 수비를 뚫고 득점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정지우가 라우쓰의 골키퍼 해드슨의 자세를 살필 때였다.
“우와- 아!”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받은 클랍이 11번 알레와 2대 1 패스를 주고받은 후, 유니온 시티의 왼쪽을 무섭게 뚫고 있었다.
자세를 잔뜩 낮춘 클레이가 클랍을 막아섰다.
주춤! 주춤!
공을 툭툭 차며 다가오는 클랍의 앞에서 클레이는 뒷걸음을 치며 그의 돌파에 대비했다.
1.5군이라 그런가, 무언가 짜임새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실력 차이가 없다고 치더라도 발을 맞춘 시간이 부족하고, 또 실전 감각이 떨어지는 서브 선수들이 포함된 탓도 있을 거다.
아무리 날고 기던 선수도 다섯 게임 정도 선발에서 제외하면 폼이 뚝 떨어진다.
그에 반해 라우쓰는 내내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로 구성되어서 초반 기세가 제법 대단했다.
이럴 때 골키퍼는 수비수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소리쳐야 한다.
‘콜을 해!’
정지우는 골키퍼 얀센을 바라보며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꿀꺽 삼켰다.
골키퍼가 지시를 내리면 수비수들은 맡아야 할 임무를 확실히 알게 되고, 다른 선수들은 여유를 가지고 동료를 도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얀센은 공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며 자신이 수비수들의 움직임에 맞추려고 하고 있었다.
지켜보는 정지우는 답답한 마음을 숨에 토해 내며 운동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지금은 누군가의 지시와 리드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투욱! 툭!
헛다리를 짚어 가며 움직이던 클랍은 클레이를 뚫을 자신이 없는 것처럼 공을 일단 9번 야노시에게 돌려 주었다.
투욱!
야노시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 모서리로 공을 흘린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달려든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강하게 공을 깔아 찼다.
퍼엉! 틱!
클레이가 발을 쭉 뻗어 막아 낸 공을 유니온 시티의 수비수 23번 멜스가 앞으로 밀어 주었다.
확실히 오늘 라우쓰 FC는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을 노리는 게 분명해 보였다.
공을 받은 주장 데이빗이 클레이에게 공을 넘겨주고, 다시 돌려받았다. 노련한 그는 급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아무래도 공을 돌리며 선수들을 다독이겠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한순간 후끈 달아올랐던 경기장의 분위기가 데이빗의 리드로 조금은 가라앉았다.
홈경기가 아니라 원정 경기다. 무리할 필요 없이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유니온 시티에 훨씬 유리한 전략이었다.
공은 천천히 돌았다.
서브 선수였던 23번 멜스는 공을 서너 번 터치한 이후로 확실히 움직임이 부드러워졌고, 클레이는 점점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변했다.
서브 선수들 사이에서 주장 데이빗과 카알, 그리고 라파엘이 중심을 잡아 주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유니온 시티로 기우는 느낌마저 들었다.
주장 데이빗이 공격형 미드필더인 17번 맥슨에게 공을 넘겨주었을 때였다.
23번 멜스가 라우쓰 FC의 왼쪽 터치라인을 따라 빠르게 달려들었다.
투욱!
17번 맥슨은 당황한 게 분명했다. 달리는 멜스의 앞으로 공을 패스해 줬어야 했는데 공은 그의 뒤로 날아갔다.
투욱!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공을 가로채서 빠르게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넘어왔다.
‘9번과 10번을 막아!’
수비수의 오버래핑이 실패하면 아프다. 지금처럼 상대가 역습 상황을 이용해 빠르게 치고 들어올 때 우리 수비수가 중앙선을 자리를 비웠다면 더욱 더 그렇다.
투욱!
라우쓰의 11번 알레는 멜스의 빈자리를 정확하게 보았고, 멋지게 공을 보내 주었다.
“우와아!”
라우쓰 FC 관중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오른쪽에서 공을 잡은 9번 야노시가 툭툭 치는 듯한 드리블을 선보이며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고들고 있었다.
슛을 해도 되고, 패스를 넣어 주어도 되는 위치다.
얀센이 가까운 쪽 골포스트에 바짝 붙어서 슈팅 각도를 줄였고, 라파엘이 그 앞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중거리 슈팅을 노릴 텐데?
정지우는 빠르게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을 살폈다.
‘클레이! 7번을 버리고 11번을 잡아! 넓게 보라고!’
클레이는 라우쓰의 7번 블로이를 쫓아다니느라 바깥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골키퍼 에어리어 정면을 차지한 데이빗이 라파엘을 돕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순간이었다.
투욱!
9번 야노시가 오히려 중앙 쪽으로 공을 굴려 주었다.
모두의 시선을 쏠렸을 때,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음껏 슛을 갈겼다.
퍼엉!
역시나 낮게 찬 공이었다.
그것도 9번 야노시를 향해 쏠려 있던 얀센의 반대편 골포스트를 노렸다.
공은 바닥을 한 번 튕기며 삽시간에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터엉!
“우우!”
골포스트를 맞춘 공이 그대로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반 뼘만 안으로 맞았어도 충분히 골대 안으로 들어갈 만큼 위력적인 슈팅이었다.
머리를 감싼 라우쓰의 관중들과 선수들이 뒤로 물러나는 동안 얀센은 공을 받아 골키퍼 에어리어 바닥에 놓았다.
“Come on!”
데이빗이 박수를 치며 동료들을 격려한 후에, 얀센이 차 준 공을 받았다.
마틴은 묵묵하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분명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한 수 위다. 그런데도 어딘가 어수선한 분위기로 라우쓰 FC에 이리저리 휩쓸려 끌려 다니고 있었다.
1.5군이어서 저럴 수 있다고?
물론 그것도 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다.
리더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틴은 새삼 실감했다.
주장 데이빗이든, 얀센이든, 책임감을 가지고 선수들에게 임무를 부여해 줄 필요가 있었다.
너는 이것을 책임지고, 너는 저것만 해내라.
특히나 주장이나 고참 선수가 다가서면 대개의 서브 선수들은 열과 성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려 애쓴다.
그렇게 경기를 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게 되고, 그때 팀이 살아나는 거다.
마틴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는 동료들이 보기에도 엄청난 선방을 해내며 한 명, 한 명에게 그에 맞는 지시를 내린다.
그 선수만 막아라, 나머지 공격은 내가 책임진다.
그렇게 내려 준 임무에 성공하면 보상으로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 흥분과 쾌감이 공격에 더해져서 좋은 성과를 올리는 거다.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마틴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저런 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고, 그 재능에 훌륭한 지도와 엄청난 노력이 가미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우와!”
유니온의 23번 멜스가 라우쓰 진영의 왼쪽을 향해 달리는 것을 보며 마틴은 눈매를 좁혔다.
저놈은 수비를 단단히 하라고 내보냈더니 레믹의 흉내를 내는 것처럼 자꾸만 공격을 선보이려 나선다.
“우와- 아!”
홈팀 라우쓰 관중들의 함성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23번 멜스가 빼앗긴 공이 단숨에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
박용근은 일을 마치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전은주의 꽃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닭갈비 가게였다.
안으로 들어선 그를 김문호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식구는?”
“먼저 들어갔다.”
“왜! 같이 와서 함께 먹지.”
“오늘은 편안하게 마시고 들어오라더라.”
아쉬운 표정을 털어 낸 김문호가 손을 들어 닭갈비와 소주를 주문했다.
“지내는 건 어떠냐?”
“나 사는 걸 네가 몰라? 헛소리 말고 술이나 받아.”
잔을 채운 두 사람은 반찬도 나오기 전에 그대로 털어 넣었다.
“후! 좋다.”
김문호가 입맛을 다시며 잔을 채웠다.
“용근아, K3 리그에서 감독 한 번 안 해 볼래?”
소주병을 내려놓은 김문호가 정말 지나가는 말처럼 툭 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응.”
“뭐? 뭐라는 거야?”
“안 한다고.”
박용근은 분명하게 답을 했고, 김문호는 다시 입맛을 다셨다.
종업원이 닭갈비를 불판에 올려놓고, 밑반찬을 깔아 주는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소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열기가 올라오자 불판에서 재료들이 익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나왔다.
“자리야 아무려면 어떠냐? 그냥 축구하며 사는 게 좋은 거지. 그래서 너도 어린이 축구 교실 감독도 했던 거고.”
불판에 담긴 채소들을 뒤집으며 박용근은 쓰게 웃기만 했다.
“야! 지우도 다시 뛰고 있잖아. 네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그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냐?”
“어, 그놈 참!”
박용근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김문호가 얼른 입을 닫았다.
희한하게 ‘동대문의 2번 개’인 김문호는 ‘1번 개’인 박용근이 어려웠다.
“내가 어디든 다시 간다고 치자. 소개해 줬다고 너 또 압력 먹을 거고, 날 감독으로 선임한 팀 불이익 받을 게 뻔한데 그 짓을 뭐하러 또 하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오늘은 모처럼 기분 좋게 닭갈비랑 소주나 먹자.”
앞에 있던 잔을 훌렁 털어 넣은 김문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에이! 개새끼들.”
“쓸데없는 데 욕할 거 없다. 그냥 내가 못난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지내면 되는 거야.”
“답답하니까 그렇지! 그러지 말고 나랑 가게나 하자니까.”
“됐다. 꽃 배달 해 보니까 이것도 나름 재미있다.”
박용근이 다른 소리 못하게 김문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전은주는 집에 혼자 돌아와 가장 먼저 베란다에 널어 둔 빨래들을 개켰다.
남편 박용근은 배달 도중 한가한 때를 이용해 한두 시간씩 자리를 비우곤 했다.
빨래를 개키며 전은주는 가슴이 아파서 입을 삐죽였다.
산책하고 왔다는 사람이 속옷이 흥건하게 젖어서 들어오는 거였다.
축구가 좋아서, 기본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배달 일을 하는 짬짬이 달리고 오는 게 분명했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전술과 전략, 그리고 해외 명문 구단의 작전과 선수들을 분석한다.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 전은주는 낡은 옷장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가장 안쪽 옷걸이에 걸려 있는 국가대표 시절 박용근의 유니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때 박용근은 정말 멋있었다.
“여보, 당신 아직 그때만큼 멋있어.”
전은주는 나직하게 박용근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국가대표 유니폼을 통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