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래하겠나? (2)
악수를 마친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연습할 시간이지?”
“그렇죠.”
“우선 옷을 갈아입고 나와. 더 깊은 이야기는 계약을 마무리한 후에 나누기로 하지.”
고개를 끄덕인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아! 자네의 그 유능한 매니저에게 이걸 꼭 전해 주게.”
마틴은 책상 위에 있던 명함을 집어 정지우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밤에 연락 달라고 하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전해 주게. 그리고.”
명함에서 시선을 든 정지우에게 마틴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팀을 잘 부탁하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정지우의 표정을 본 마틴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레믹이나 클레이, 그리고 카알의 변화를 감독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말게. 남은 8게임, 자네가 잘 만들어 봐. 데이빗과 라파엘이야 이미 자네 편이니, 남은 선수들을 다루는 것이야 어렵지 않을 것 같고.”
“왜 이렇게까지 합니까?”
“말했잖나? 프리미어리그 감독 자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고. 성적이 최고인 이 바닥에서 내가 얻을 게 그거 말고 뭐가 있겠나? 그리고 이거 하나 명심해 두게.”
책상을 커다랗게 돌아 나온 마틴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계약이 끝나는 3년 동안 내가 변함없는 자네 편이라는 거.”
말을 마친 마틴이 문을 열어 주었다.
피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원.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정지우는 비어 있는 골대로 움직였다.
“기분은 어때?”
“별로인데요?”
“살살 해야겠군.”
골키퍼 코치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후, 정지우는 기본적인 점프를 하며 20분 정도 훈련을 마쳤다.
“핸드볼 공으로 하지요.”
“그래? 그러지.”
다음은 캐치볼이다.
유니온 시티만 해도 골키퍼를 위해 축구공, 핸드볼 공, 심지어 탁구공까지 모두 준비해 두었는데, 오늘 정지우는 축구공의 절반 크기인 핸드볼 공을 선택했다.
스태프가 건네주는 공을 골키퍼 코치가 빠르게 정지우의 주변으로 던졌다.
툭. 툭. 툭. 툭. 툭. 툭. 투욱!
“좋아!”
골키퍼 코치가 탄성을 질렀다.
몇 개에 한 번씩 의도적으로 멀리 던진 공을 정지우가 멋지게 잡아낸 직후였다.
선수들이 힐끔힐끔 정지우의 훈련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면 장난처럼 보인다.
팔을 휘저으며 빠르게 던지는 핸드볼 공을 쳐 내는 모습이.
그러나 정지우는 진지했다.
“훅! 훅!”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투욱! 휘익!
코치가 멀찍이 던지는 공을 향해 있는 대로 몸을 날렸다.
막는다. 막을 거다.
보이면 막는 거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삑! 삑! 삑!
“허억, 허억!”
늦게 나온 탓에 훈련이 조금 일찍 끝난 느낌이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마틴과의 대화를 가능한 한 그대로 유정호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니까 하마터면 우리 둘이 깨끗하게 속을 뻔했다는 거지?”
명함을 받아 든 유정호는 실제로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햐! 세상 믿을 사람 아무도 없구나. 이래서 나는 네가 좋은 거야.”
뭔 뜬금없는 소리를.
“우리 둘이 똘똘 뭉쳐서 이 어려운 난국을 꼭 헤쳐 나가자.”
기가 막혀서 웃고 있을 때, 유정호가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밥 먹자. 밥 먹고 마틴 감독 만나 보러 가야지.”
이 양반은 가져온 즉석밥과 반찬을 다 비우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건가?
정지우가 웃으며 일어섰을 때 유정호는 냉장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우야.”
“응?”
반찬 통들을 주섬주섬 꺼내던 유정호가 고개를 길게 빼고 정지우를 보았다.
“아직 계약 전이다. 너만 괜찮다면 이 계약 안 해도 상관없어.”
싱크대에 올려 둔 즉석밥의 비닐 한쪽을 벗기던 정지우는 잠시 유정호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달칵! 삑, 삑!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넣은 다음이다.
“형, 감독님께서 나 때문에 청소년 대표 감독직 맡지도 못하셨어. 거기에 지금은 사모님 꽃 가게 일 하신다면서?”
반찬 통의 뚜껑을 열면서 유정호가 시선을 주었다.
“형도 나 일본 진출 도와줬다는 것 때문에 지금 제대로 된 선수도 없고.”
“그 이야기는 뭐하러 하냐? 그리고 나도 박 감독님 존경했다니까. 실력이 없어서 대표는 못 됐었지만.”
“형 말대로 이 리그에서 정말 뛰어난 선수 돼서, 돈 많이 버는 선수 돼서, 감독님과 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 보여 주고 싶어졌어.”
유정호가 멍하니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왜?”
“이 자식……!”
그가 팔을 벌리고 정지우에게 다가왔다.
“징그러워. 왜 이래?”
“그래! 제발 좀 보여 다오. 그래서 세계적인 팀들이 나한테 너 데려가게 해 달라고 싹싹 빌게 좀 만들어 주라.”
“어? 반찬 묻어!”
“에이, 감동을 모르는 자식!”
둘이서 킬킬거릴 때 전자레인지가 이제 그만 밥을 먹으라고 삑삑거렸다.
3시간이 넘게 마틴과 이야기를 나눈 유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들어왔다.
“매니지먼트도 공부 잘하고 똑똑한 놈들이 하는 시대인가 보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을 것 같았는데, 정지우는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마틴이 아예 계약서를 만들어 와서 설명까지 해 주더라. 이거야. 쥬피터 회장하고 이사진이 요구할 것들까지 세세하게 뽑아 왔던데? 에효! 솔직히 창피했었다.”
정지우는 말없이 믹스 커피를 타서 유정호 앞에 놓아 주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마, 형. 형이 나 일본에 보내 줄 때 계산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잖아. 이번에 제대로 하자. 그래서 형도 대박 한번 쳐야지.”
머그잔을 바라보던 정지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한 골만 먹으면 우리 둘 다 손가락 빨면서 3년 살아야 한다면서?”
“자신 있냐?”
“없다니까.”
유정호가 바람 빠진 것처럼 웃으며 머그잔을 들었다.
“나 무식한 거 알지?”
“의리 있다는 건 알아.”
“이번 일도 하마터면 너 망칠 뻔했다는 거 아는 거지?”
“형이 나 일본에 보내 줘서 감독님 빌라 지키게 해 준 건 기억해.”
유정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면 있지? 우리 매콤한 라면 국물에 밥 말아서 열무김치 얹어 먹자.”
“요구가 그렇게 세세한 걸 보면 형은 역시 매니지먼트가 천직인 거 맞나 보네.”
둘이서 킬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일 오전에 계약할 거다. 계약이 체결되면 훈련 끝나고 선발에 들어 있을 거고, 계약이 깨지면 서브로 올라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수프를 끓일 때 쓰는 하나뿐인 냄비를 들면서 정지우가 답을 했다.
***
한승관은 책상에 놓인 자료들을 훑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대표 팀이 몰디브와 비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0 대 0이면 좀 나았을 텐데, 1 대 1이다.
젠장!
몰디브 축구 협회가 선수들을 버스에 태우고 한낮에 3시간이나 뺑뺑이를 돌릴 거라고 상상한 사람이 어디 있나?
한승관은 힐끔 벽에 걸린 한국 축구 협회의 조직도를 보았다.
그러게, 평소에 지원 좀 더 하라니까.
돈 벌어서 어디다 쓰기에.
호텔비와 교통편은 당연하게 홈팀의 부담이다.
하지만 한국 정도 되면 아예 전용 버스를 가져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곳에서 따로 교통편을 준비하는 치밀함 정도는 있어야 했다.
하긴, 이득수 기술 위원장이 그렇게 요구했을 때 한승관도 코웃음을 치기는 했었다.
솔직히 몰디브를 상대하면서 그런 비용을 요구했다가는 당장 한승관의 자리가 위태위태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걸 뭐라고 써야 하지?”
한승관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몰디브전을 분석하고, 평가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당최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그 정도였다고?
차후 대책은 또 뭐라고 할 건가?
대표 팀 선수들을 바꾸자고?
그랬다간 가장 먼저 한승관이 교체될 거다.
A4 용지 20매짜리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써 내야 한다.
‘이러다가 소설가가 되겠네.’
한승관은 마우스를 움직여 몰디브전 녹화 화면을 찾았다.
젠장!
어쩌면 저런 슛을 못 막아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던 한승관이 한순간 눈빛을 빛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저 선수가 박용근이 아끼는 정지우보다 백배는 훌륭한 선수다.
딸각, 딸각.
한승관은 마우스를 움직여 감독 후임자를 찾았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감독 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