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래하겠나? (1)
모처럼 잘 먹으며 지냈다.
“그러니까…….”
“형, 삼키고 말해.”
유정호가 돼지 불고기와 열무김치를 가득 넣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물을 마셨다.
“안 되면 우린 던캐스트와 계약하면 되는 거니까.”
“그 이야기는 끝난 거잖아.”
“그렇지.”
밥을 듬뿍 뜨던 유정호가 불안한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정말 자신 있냐?”
“형이 계획했던 일이야.”
“막상 가서 떠들고 오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미친 짓을 했나 싶다.”
정지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무실점 가능하겠냐? 남은 경기가 8게임이나 돼.”
“자신 없어.”
“뭐?”
숟가락을 입에 문 유정호가 굳은 것처럼 정지우를 보았다.
“프리미어리그 승격만 되면 일단 감독님께 축구 교실 지어 드릴 수 있는 거 아냐? 그래서 한다고 했어.”
“야, 인마!”
“아이!”
정지우는 잽싸게 손을 내밀어 반찬을 지켰다.
손등에 유정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밥풀 서너 개가 올라와 있었다.
“그럼 넌 앞으로 3년간 손가락 빨고 살아야 돼. 나도 마찬가지고. 아니다. 난 네 생활비까지 대야 하는 거잖아!”
“지금처럼 같이 지내면 되지.”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바라보던 유정호가 포기한 사람처럼 밥에 시선을 주었다.
“밥 하나 더 주라.”
즉석밥을 벌써 3개나 먹은 유정호가 또 하나를 요구했다.
선수 생활을 했던 사람이니까 덩치도 제법 있고, 먹성도 작지 않다.
정지우가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돌리는 동안에도 유정호는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 솔직히 박 감독님 그런 대접 받으면 안 되는 분인데…….”
정지우는 즉석밥을 유정호 앞에 놓아 주었다.
“이적하게 되면 유니온 시티에서 받는 이적료의 3퍼센트는 챙기니까, 그걸로 너랑 나랑 둘이 입에 풀칠은 할 거다.”
뜨거운 밥을 불어 가며 입에 넣은 유정호가 또다시 불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형은 나 왜 도와줬어? 그거 때문에 곤란해질 거 알고 있었잖아?”
“일찍도 물어본다. 너 요즘 왜 그러냐? 외롭고, 밤에 잘 때 허전하고, 뭐 그러냐? 향수병 온 거 아니냐? 화장실도 잘 못 가고?”
정지우가 피식 웃는 것을 본 유정호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부러웠었어.”
선심 쓰는 것처럼 깻잎을 들어서 정지우의 그릇에 올려 준 유정호가 커다랗게 밥을 떴다.
“나 운동할 때는 도와주는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거든. 연줄 없지, 돈 없지, 서럽게 운동하던 게 생각났었다. 나도 참 재수도 없지. 운동 포기하고 겨우 매니지먼트 자리 잡았는데, 하필이면 네놈이 콱 눈앞에 나타난 거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정지우는 남은 밥을 입에 넣었다.
“이런 반찬 해 주시는 분 있는 거 다행으로 생각해. 사모님이 새벽같이 움직이셔서 해 주신 거야. 하나씩 담을 때마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시던지……. 어! 잘 먹었다! 믹스 커피 한잔할 건데, 너도 마실래?”
식탁 의자에 등을 척 걸치고 하는 말이었다.
정지우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레인지 쪽으로 움직였다.
주사위를 던져 놓고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내일이면 다시 훈련이 시작된다.
마틴 감독은 당연하게 내용을 알게 될 일이라서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올 확률이 높았다.
안 되면 서운하고, 되면 숨 막힐 정도로 부담스러운 계약.
하지만 정지우는 유정호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용근에게 축구를 돌려줄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에 3년 동안 한 푼 버는 것 없이 뛰어야 하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한 선수 생활이 될 것 같아서였다.
반찬은 유정호가 정리했고, 빈 그릇은 싱크대에 담았다.
정지우는 뜨겁게 탄 믹스 커피를 유정호 앞에 놓아 주었다.
“너는?”
정지우는 웃고 말았다.
“아! 설탕 먹기 그렇지?”
유정호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정지우가 그릇들을 치웠다.
탁자에 앉자 묘한 긴장이 거실을 떠돌았다.
“거절할 모양이지?”
“조건이 좀 그렇긴 했지.”
정지우의 대꾸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유정호의 전화기가 울었다.
번호를 확인한 유정호가 ‘왔다!’ 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Hello?”
내내 기다렸으면서 마치 관심 없다는 사람처럼 유정호는 심드렁한 음성을 만들어 냈다.
몇 번이나 질문과 답이 오간 다음이었다.
“이틀 뒤에 정식으로 찾아뵙지요.”
통화를 끝낸 유정호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야! 유니온이 계약하겠단다.”
말과는 달리 유정호는 겁이 덜컥 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지? 정말 하겠다네. 이거 미친 짓인데.”
“형.”
“너도 자신 없다며? 네 인생 여기서 망가지면 어쩌냐?”
“8게임 무실점이라며?”
정지우는 유정호가 앞에 둔 잔을 들고 싱크대로 움직였다.
“전국대회 본선 게임 수랑 똑같네. 그때 무실점했었잖아.”
“뭐?”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유정호를 향해 정지우가 고개를 돌렸다.
“감독님을 위한 경기잖아?”
“너……? 자신 있는 거냐?”
“최선을 다할게.”
“응? 응.”
유정호가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
훈련이 있는 수요일.
정지우가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하기 무섭게 스크립터가 다가왔다.
“Ji, 코치가 기다려.”
“바로 가 볼게.”
당연히 한 번은 계약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 계약에 당장 있을 주말 경기부터 8게임 선발 조건이 담겨 있으니까.
“오늘 평소보다 일찍 나왔던데? 기분이 별로야.”
“고마워.”
스크립터가 건네주는 힌트를 들으며 정지우는 마틴 감독의 사무실로 움직였다.
똑똑똑.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들어와.’ 하는 답이 들렸다.
정지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이야. 기분은 어떤가?”
“나쁘지 않습니다.”
“이리 앉지. 홍차 한잔하겠나?”
“따듯한 물이 있으면 그게 좋겠습니다.”
마틴은 머그컵 두 개에 뜨거운 물을 붓고 하나에만 홍차 티백을 담갔다.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어.”
정지우의 앞에 잔을 놓아 준 마틴이 걸음을 움직여 제자리에 앉았다.
“남은 8경기 모두 선발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지?”
“예.”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왜 이런 계약을 하려는 거지? 박용근 감독 때문인가?”
느닷없는 질문이라서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지우의 시선을 마틴은 피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설명을 먼저 듣고 싶었다.
눈빛에 담긴 뜻을 눈치채서였을까?
마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8게임 무실점? 프리미어리그 승격이 확정되면 선수들은 동기를 잃어. 우승한다고 보상이 크게 나가는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새로운 선수 보강을 위해 밀려나는 선수가 생기기 때문에 분위기는 더 엉망이 되지.”
오늘 마틴은 분명 평소와 달라 보였다.
“자네 매니지먼트도 문제가 있어.”
그는 아예 작정한 듯한 태도로 정지우를 대하고 있었다.
“영국의 모든 리그는 리그가 시작되고 나서 승급이나 우승을 하는 조건으로 내거는 보상을 모두 불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니 자네가 8게임을 무실점으로 해도 유니온 시티 구단은 그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지.”
이건 정말 몰랐었던 일이다.
정지우는 의아한 심정으로 마틴에게 집중했다.
“물론 유니온 시티는 처벌을 받겠지. 그렇지만 그건 아마 자네가 8게임 무실점을 해서 벌어들이게 될 이적료로 충분히 메울 정도의 벌금이 될 거야.”
마틴이 화가 난 사람처럼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하나씩 짚어 주지. 자네가 8게임 무실점을 기록하면 우리는 무조건 승격이지. 다음으로 유니온 시티는 자네와 합의한 그 어떤 불법적인 약속도 지킬 필요가 없어. 한국에 만들겠다는 축구 학교를 포함해서.”
유정호가 들으면 뒤로 넘어갈 이야기였다.
축구만 하던 양반이 매니지먼트를 하겠다고 하더니.
“그렇다면 왜 그런 계약에 합의했습니까?”
“내가 한 게 아니라, 구단에서 하는 거지.”
“이유를 아십니까?”
마틴이 커다랗게 숨을 내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무실점하리란 걸 믿지 않는 거다. 자네가 한 점이라도 실점을 하면 자네에게 줄 계약금으로 한국에 축구 학교를 설립하고, 역시나 자네 몫이던 주급으로 유지비를 대겠다는 거지. 거기에 활약이 뛰어나서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되면 이적료에 더 높은 주급을 챙길 수도 있고.”
“계약 위반이라면서요?”
“그건 자네가 정말 무실점을 기록했을 때 문제가 되겠지.”
“참 복잡하군요.”
정지우의 말에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자네의 정직한 답을 듣고 싶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계약을 하려는 건지.”
분명하게 마틴은 패를 던진 것처럼 보였다.
말이 새 나가면 곤란해질 것을 각오하고라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박 감독님 덕분에 축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알지.”
마틴이 책상에 놓인 자료를 힐끔 보았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분이 지금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제가 이 계약에서 더 건질 것이 있습니까?”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마틴은 정지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자네가 이 계약에서 이길 유일한 방법은 8게임 무실점이다.”
이 양반이 왜 이러지?
“조금 전에는 무실점을 해도 규정에 어긋나서 얻을 것이 없다면서요?”
마틴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도와주겠다.”
정지우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대신 나와도 계약을 하는 거다. 계약 기간 3년 동안 어떤 팀에서 오퍼가 오더라도 이적만큼은 내가 결정한 팀으로 간다는 조건이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자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프리미어리그에 가더라도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선수.”
“나를 어떻게 믿습니까?”
“박용근 감독을 대하는 자네의 자세를 보고 결심한 거다.”
“매니지먼트와 이적 계약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실점으로 리그 경기를 마치는 조건으로 바꿔. 리그 승격과는 전혀 상관없도록. 나머지 조항도 내가 계약 전에 코치해 주겠다. 그리고.”
질문을 예상했던 것처럼 답이 날아왔다.
“8게임 무실점을 위해서는 내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지난 6년간 지루하게 흘러가던 세상이 느닷없이 속도를 내서 홱홱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정지우는 물끄러미 마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계약금, 주급, 그리고 한국에 축구 교실을 얻고, 나는 프리미어리그 감독의 위치를 얻는다. 이 정도면 나쁠 것 없을 거 같은데?”
“무실점이 깨지면요?”
“자네는 얻는 게 아무것도 없는 선수 생활을 3년간 하는 거지.”
다른 건 몰라도 간단해서 좋다.
정지우가 피식 웃는 것을 본 마틴이 손을 내밀었다.
“Deal(거래하겠나)?”
잠시 그를 바라보던 정지우는,
“Deal(거래하죠)!”
하고는 마틴의 손을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