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화 (11/262)

제4장. 저 녀석은 일어설 거야 (3)

“Unbelievable!”

캐스터가 유니온 시티 관중만큼이나 흥분한 음성으로 감탄사를 쏟아 냈다.

“Unbelievable goal keeping, Jiwoo Jung! from south Korea!”

정지우의 손끝에 걸린 공이 아슬아슬하게 골포스트를 빗겨 가는 장면이 느리게 펼쳐지는 동안, 캐스터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가 유니온 시티의 관중석을 향해 연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예에에에!”

골을 막은 것이 아니라 골을 넣은 것 같은 흥분이 에쉬튼 게이트를 휩쓸고 있었다.

“Hey! David! Hey!”

정지우는 자리 선정이 뛰어난 주장에게 다시 골대 앞을 가리켰다.

코너킥이다.

그것도 선수가 한 명 모자란 상황에서 막아야 하는 코너킥.

흥분해서 그럴까?

아니면 피가 끓어서?

뺀질거리던 레믹까지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서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을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었다.

“라파엘!”

정지우는 라페엘을 부른 다음, 아마디를 가리켰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과 함께 선수들이 뒤엉켰다.

윌슨은 공을 낮게 찼다.

외곽이다!

앤더슨이 반대쪽으로 공을 미는가 싶은 순간,

퍼엉!

달려들던 모리스가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정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공이 공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맞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방향까지 바뀐다.

휘이익!

높다랗게 몸을 띄운 정지우의 손에 공은 걸리지 않았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정지우의 시선에 관중석 중간으로 날아간 공이 보였다.

“우와- 아!”

됐다. 된 거다.

브리스톨의 공격을 또 한 번 막은 거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유니온 시티의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정지우는 공을 골대 앞에 놓았다.

급할 거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비겁하게 바닥에 드러누워서 낑낑대지는 않더라도 1분, 아니 10초라도 여유 있게 게임을 진행하는 게 맞다.

정지우가 공을 향해 달려가는 찰나였다.

화악!

모리스가 공 앞으로 달려왔다.

움찔!

정지우는 공을 차지 않고 그 위를 그냥 지나쳤다.

“우우!”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골키퍼의 킥을, 그것도 골 아웃된 공을 차는 것을 방해하는 건 파울에 해당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알아서 시간을 벌어 주다니?

고마운 자식.

공의 뒤편으로 다시 걸어간 정지우는 바닥을 오른발 코로 콕콕 찍었다.

이렇게 해서 또 시간을 번다.

“우우!”

브리스톨 관중들이 대놓고 야유를 퍼부을 때였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고는 정지우에게 다가와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왜? 뭐 때문에?”

정지우는 뒷짐을 지고 주심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모리스가 방해한 건 그대로 넘어가고, 그것 때문에 다시 차려는 것에 카드를 주는 건 아니잖아!”

데이빗이 달려와서 정지우를 안고는 뒤로 밀어냈다.

곧바로 라파엘이 정지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디밀었다.

“주장이 항의할 거야.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서는 게 좋아.”

이놈이 이렇게까지 친했던 놈은 아니었다.

“너 없으면 우리 안 돼. 그러니까 이쯤에서 참아.”

그사이 주장이 모리스를 가리켜 가며 주심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추가 시간을 얼마나 반영할지는 모르지만 대략 3분 정도 또 지났다.

삐익!

경기를 시작하라는 휘슬이 울려서 정지우는 다시 공 뒤로 움직였다.

콕콕.

그러고는 주심이 보란 듯이 오른발 코로 바닥을 찍었다.

피식!

앞으로 달려간 정지우는 있는 힘껏 공을 걷어찼다.

퍼엉!

높다랗게 떠서 날아간 공이 브리스톨 진영의 한가운데 떨어졌다.

레믹이 몸싸움을 벌이며 달려들었지만 아쉽게도 공은 테일러의 머리에 맞고 중앙선 쪽으로 날아왔다.

헤딩만 두 번이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이 악착같이 달려들었는데,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 역시 물러나지는 않았다.

콰다당!

오른쪽 터치라인에서 카알과 테일러가 부딪친 다음이었다.

선심이 브리스톨 시티의 공이라고 깃발을 움직였다. 관중들의 함성, 욕설, 그리고 응원이 뒤엉켜서 들려왔다.

마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0분쯤 남았다.

터치라인에서 앤더슨이 던진 공을 테일러가 받았고,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이 여유 있게 뒤로 돌리고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는 한편,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공 근처로 끌어내려는 의도였다.

툭! 투욱! 툭!

달려들 것처럼 하다가 카알이나 레믹이 다가서면 다시 공을 뒤로 돌린다.

저러다가 한순간에 양쪽 사이드로 치고 들어올 수도 있고, 반대로 패스와 패스로 잘게 연결해서 잘라 들어올 수도 있다.

마틴은 초조한 가운데에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얼마 만이냐.

정규 리그에서 선수들이 똘똘 뭉쳐 게임을 지켜 내겠다고 저토록 뛰어다니는 것이.

심지어 뺀질이 레믹까지 전에 없이 악착스럽게 공을 향해 달려드는 경기다.

그때였다.

“우와- 아!”

순간, 브리스톨 시티의 앤더슨이 왼편 구석에 있는 모리스에게 멋진 패스를 전해 주었다.

수비수들이 달려들었을 때, 모리스는 골대를 향해 대각선으로 찔러 들어왔다.

투욱!

그가 골대 앞으로 밀어 준 공을 향해 아마디가 껑충껑충 달려들었고,

퍼엉!

곧바로 강력한 오른발 슛을 날렸다.

터엉!

공은 몸을 던진 라파엘의 머리에 맞고 외곽으로 흘렀다.

역시나 브리스톨 시티 선수가 공을 잡았다.

한 명이 모자란다고 해도 골키퍼까지 10명이다.

그 10명이 페널티 에어리어에 빽빽하게 들어서서 브리스톨 시티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정지우는 공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럴 때 무서운 건 느닷없는 중거리 슈팅,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아서 굴절돼 날아오는 슈팅이다.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은 페널티 에어리어를 수시로 노리며 공을 돌렸고, 그걸 막기 위해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악착스럽게 달려들고 있었다.

툭! 툭!

빠르게 패스하는 공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카알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퍼엉!

아마디가 느닷없이 슛을 날렸다.

“우우- 우!”

그러나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정지우가 손을 뻗치고 점프한 것보다 훨씬 높게 뜬 공은 그대로 관중석 위쪽을 향해 날아갔다.

브리스톨 시티 에쉬튼 게이트 경기장이다.

소위 볼 보이라는 아이가 잽싸게 다른 공을 정지우에게 던져 주었다.

정지우가 공을 골대 앞에 놓고 찰 준비를 할 때, 또다시 모리스가 앞쪽으로 달려왔다.

정지우는 주심을 보며 손을 들어 모리스를 가리켰다.

이건 명백한 파울이다.

삑!

주심이 휘슬을 불며 모리스를 가리켰다.

“우우- 우!”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었지만 상관없다.

분명하게 모리스가 파울을 범한 거고, 그것 때문에 시간이 끌린 거니까.

공의 뒤로 움직인 정지우는 오른발 코로 바닥을 두 번 찍었다.

죽겠을 거다.

달려들면 시간이 끌리고, 지켜보자니 속이 타고.

퍼엉!

정지우가 찬 공이 높다랗게 뜬 다음, 브리스톨 시티 진영 오른쪽에 떨어졌다.

역시나 레믹이 있는 자리였다.

몇 번이나 공이 헤딩으로 오갔고, 정말 악착같이 레믹이 달려들었지만 역시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지켜야 하는 팀이나 최소한 비기기라도 하겠다는 팀 모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시점이었다.

마틴은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명이 달리는 유니온 시티다.

한 명쯤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빈자리가 생기고, 피로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할 수만 있다면 시계의 유리를 깨서 초침을 좀 더 빨리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퍼엉!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은 공을 잡으면 무조건 골대 앞으로 차서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설프더라도 일단 슈팅을 날린다.

주장 데이빗, 라파엘, 말더스, 카알, 심지어 레믹까지 공을 향해 몸을 던져 가며 공격수의 앞을 막아섰다.

“우와- 아!”

한순간, 모리스가 카알을 제치고 코너로 파고들자 단박에 함성이 울려 나왔다.

물러설 수 없는 라이벌전이다.

그리고 고만고만한 승점으로 다투는 사이다.

당연하게 프리미어리그로의 승격을 기대하는 브리스톨 시티도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모리스는 두 번이나 헛다리를 짚으며 데이빗을 유혹했다.

‘달려들지 마!’

알 거다. 데이빗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도 마틴은 가슴속 깊이에서 고함을 질렀다.

툭툭, 툭!

공을 몰고 들어가던 모리스가 골대 앞에 있는 앤더슨을 향해 패스해 주었다.

그러나 그 공을 수비수 말더스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외곽으로 걷어 내서 당장 시간을 벌었다.

시간은?

10분쯤 남았다.

“교체 준비해! 클레이.”

마틴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코치진을 향해 짧게 말을 건넸다.

이번 공격을 막아 낸다면 더 많이 뛸 선수를 넣어야 하고, 교체하는 시간을 이용해 경기의 템포도 죽여야 한다.

“누굴 아웃시킵니까?”

클레이에게 눈짓을 한 스크립터가 시선과 함께 던진 질문이었다.

누굴 빼지?

잘못하다간 저 좋은 흐름을 다 망치는데.

마틴은 인상을 찌푸리며 경기장에 시선을 주었다.

“레믹!”

그는 마음을 굳혔다.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이다.

공격수를 빼고 수비를 단단히 한다.

마틴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판단 하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클레이가 실수라도 해서 골을 먹게 된다면 모든 잘못은 이 교체를 지시한 감독에게 있는 거다.

왼편 터치라인에서 충돌이 있었고, 역시나 공은 브리스톨 시티의 소유였다.

공을 던지기 전에 교체를 하는 게 맞다.

스크립터가 바쁘게 움직였고, 신호를 받은 주심이 고개를 돌렸다.

삐이익!

교체하라는 사인이다.

대기심이 높다랗게 든 표지판에 두 선수의 번호가 각각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들어왔다.

짝짝짝짝짝짝!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레믹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레믹은 뛰는 척하는 동작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며 걸어왔다.

동료들과 손도 마주치고, 왼편 머리 위에서 손뼉을 치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도 했다.

“클레이! 들어가자마자 Ji의 지시대로 움직여!”

마틴은 교체되는 클레이의 귀에 대고 고함처럼 지시를 내렸다.

마침내 레믹이 벤치 앞으로 와서 클레이와 손을 마주쳤다.

와라락!

전속력으로 클레이가 골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마틴은 레믹의 등을 두드렸다.

삐이익!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은 누구든 공을 잡으면 지체 없이 골대 앞으로 띄운다.

몸싸움, 헤딩, 슈팅.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든 골을 넣겠다는 강렬한 의지였다.

데이빗이 악착스럽게 위치를 잡으며 버텼고, 엉덩이와 얼굴, 팔뚝에 파랗게 잔디 물이 든 라파엘과 말더스가 끈질기게 상대 선수들을 감쌌다.

퍼엉!

또 슈팅이 있었지만, 역시나 유니온 시티 수비수의 몸에 맞고 튀어나왔다.

공은 역시나 브리스톨 시티 선수가 잡았고, 또다시 높다랗게 골대를 향해 띄워 올렸다.

쿵. 쿵. 쿵. 쿵.

마틴은 관중석에서 두들기는 북소리만큼이나 거세게 심장이 뛰는 느낌이었다.

5분쯤 남았다.

제발!

잡고 싶다.

미칠 것처럼 이기고 싶다.

정지우?

이젠 이름을 아는 동양인 선수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공격수도 아니고, 골문을 지키는 정지우다. 그런데 그가 선수들과 관중들 가슴에 불을 지르더니, 마틴의 식어 버린 열정에도 불을 지펴 놓았다.

그때였다.

퍼엉!

“우와- 아!”

모리스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낮게 깔리는 슛을 날렸다.

벌떡!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틱!

공은 라파엘의 발을 맞고 오른쪽으로 튀었다.

“No!”

마틴이 악을 쓰는 순간이었다.

터억!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던 정지우가 발끝으로 공을 걷어 냈다.

브리스톨 관중들이 일제히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순간이었다.

우르르!

양 팀 선수들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고,

투욱!

브리스톨 시티의 앤더슨이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우우!”

그러나 공은 골대의 오른편으로 흘러나갔다.

마틴은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정지우는 발끝으로 또 한 골을 지켜 낸 거다.

“후우.”

마틴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벤치로 돌아와 시계를 보았다.

2분 남았다.

추가 시간은?

고개를 돌렸을 때 대기심이 전광판을 들고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3분.

이 정도는 인정할 만하다.

장내 아나운서가 대기 시간이 3분임을 알리는 동안 정지우가 데이빗을 향해 공을 차 주었다.

피가 마르는 5분이 조금씩 흐르고 났을 때, 마틴이 스무 번쯤 시계를 확인했을 때,

삐익! 삑! 삐이익!

“우와- 아!”

주심이 끔찍할 만큼 길었던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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