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화 (1/262)

제1장. 누구도 내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다. (1)

그라운드의 지배자에 나오는 각 리그의 규정은 가능한 한 현실의 규정에 따르고 있으나 글의 진행과 재미를 위해 일부 변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그외에 등장하는 팀 이름과 등장인물은 현실과 전혀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글을 읽으시는 도중, 알고 계신 경기 규정에 위배되는 점을 발견하신다면, 리그 규정을 의도적으로 변형하였구나 하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잉글랜드 FA컵, 32강전.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의 홈구장 레드 블레이트는 이미 흥분의 도가니였다.

발로 바닥을 차는 소리, 목청껏 지른 응원 구호가 귀청을 찢을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포기한 게임에서 시즌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적인 응원이 펼쳐졌다.

그 때문인가? 선수들도 마약을 처먹은 사자 새끼들처럼 용맹하게 그라운드를 달린다.

“미치겠군.”

마틴 감독은 고개를 저어 댔다.

어차피 지나가는 바람 같은 FA컵 대회다.

세 경기만 이기면 자력으로 프리미어리그 승격인 상황에서 가망 없는 FA컵 경기에 힘을 쏟을 수는 없었다.

필요한 승점은 7점이다.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앞두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와- 아아!”

또다시 귀청을 찢는 함성이 유니온 팀의 홈구장 레드 블레이트에 터져 나왔다.

마틴은 기가 막힌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코리안이다.

이름이나 겨우 기억하고 있던 한국인 골키퍼!

저 빌어먹을 놈이 레드 블레이트에 불을 지르더니 지금은 기름을 통째로 부어 댄다.

오른손으로 왼편 가슴을 두들기는 정지우의 행동에 관중들이 미친 것처럼 악을 썼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코너킥이다.

‘이 미친놈아! 인제 그만 골을 처먹으라고!’

마틴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1.5군이라고 해도 이틀 뒤의 경기에 나가야 할 선수들이 5명이나 뛰고 있다. 승점을 확보해야 할 중요한 경기에 나갈 선수들이라 오늘 경기는 적당히 얻어맞고 끝내야만 하는 거다.

챔피언쉽과 프리미어리그의 차이는 케이스바이케이스다.

그렇더라도 프리미어리그 2위 팀을 상대로 승리를 노릴 만큼 유니온 시티가 강한 건 절대 아니다.

운 좋게 이 경기를 이긴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FA컵을 우승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니 이쯤 해서 꺾여 줘야 내일모레 있을 경기에서 주전 선수들이 더 뛸 수 있는 거다.

‘제발!’

카메라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체를 바싹 기울여 무릎에 양팔을 걸친 마틴은 누가 보아도 초조하게 상대의 코너킥을 보고 있는 감독의 모습이었다.

퍼엉!

상대의 킥이 절묘하게 휘어졌다.

‘됐다!’

마틴은 감독을 시작한 17년 중 처음으로 상대 팀을 응원했다.

골키퍼를 향해 날다가 그라운드를 향해 휘어지는 코스.

코너킥의 정석처럼 공이 날았다.

과연 프리미어리그 2위 팀다운 코너킥이었다.

저건 머리만 대도 골이 된다!

마틴의 시선에 정지우가 잔뜩 웅크린 것이 보였다.

튀어나오지 않는다.

저기서 달려 나올 수도 있고, 누가 뭐랄 상황도 아닌데?

부우웅!

양 팀 선수들이 상의와 팔을 잡고 뒤엉킨 사이에서 상대 팀 미드필더 루시스가 높게 날아올랐다.

‘저건 들어간다!’

완벽하게 공격수를 놓친 상황이었다.

시원하면서도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 느낌!

터엉!

루시스는 심지어 방향을 바꾸는 동작까지 펼쳤다.

마틴의 눈에 왼편 코너 아래로 날아가는 공이 보였다.

‘끝났……?’

“와아- 아아아아아!”

마틴은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두 팔을 연신 위로 치켜드는 정지우의 제스처에 관중들은 미친 듯이 열광했다.

선수들이 다가가 정지우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게 몇 개째야?”

마틴은 스크립터를 빠르게 찾았다.

“13개째요.”

13개? 한 경기에서 슈퍼세이브가 13개?

그래서 아직 스코어가 0 대 0인 거라고?

“Nobody gets the goal on my game!”

정지우의 고함에 선수들이 이를 악물었다.

“Karl!”

정지우는 악을 쓰며 오른손으로 뒤편에 홀로 떨어져 있는 상대 팀 선수를 가리켰다.

프리미어 2위?

난 이거 약속한 거라 안 돼!

절대로 골을 안 먹겠다고 약속한 거라고!

퍼엉!

숨이 턱 막힐 것처럼 공이 휘어졌다.

티익.

수비수 라파엘의 머리를 맞은 공이 픽 하고 튀었고,

터엉! 틱!

상대 팀의 슈팅이 수비수의 발에 맞고 꺾였다.

왼편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몸의 중심이 완전히 쏠렸는데 공이 오른편으로 꺾인 거다.

약속해?

약속한다니까!

‘끄응!’

허리, 왼쪽 무릎, 그리고 허벅지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건 생각으로 나오는 동작이 아니다.

그냥 반사적으로 나오는 거다.

화아악!

턱!

바닥을 구른 정지우의 시선에서 공이 골대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와- 아아아아아!”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함성이 튀어나왔다.

“What a fucking my hero!”

주장이 악을 쓴 것은 입 모양으로 알아들었다.

후욱! 후욱!

당장은 관중들의 함성과 숨소리만 들렸다.

“Come on!”

처음이다.

이기적인 주장이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어떡해서든 혼자 오퍼를 받아 보겠다고 설치던 놈이 팀을 챙기고 있는 거였다.

“남은 시간은?”

마틴은 고함을 지르며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이렇게 보면 되는데 꼭 스크립터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후반전이 20분이나 남았다.

평소 같으면 퍼져서 주춤거려야 할 선수들이 아직 미친놈들처럼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구단주는 승격을 원한다.

이 경기를 잡아도 16강 진출, FA컵은 다음 경기를 장담하지 못한다.

야신이 살아온다 한들 다음 게임에서도 무실점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드필드에서 빼앗긴 공을 상대 선수들이 돌리고 있었다.

아직 17분이나 남았다.

지금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 한 골이라도 먹으면 저놈들은 또 삶아 놓은 캐비지처럼 필드에 늘어질 게 분명했다.

“와- 아!”

마틴은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포백 수비 사이로 공이 빠졌다.

그야말로 대지를 가르는 듯한 패스였다.

프리미어 득점 2위 미하엘은 이미 수비를 지나쳐 있었다.

미하엘과 마주친 정지우는 쪼그린 채로 두 팔을 길게 편 자세였다.

터엉! 화아악!

솔직히 못 봤다.

“와- 아아아아!”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함성이 터지고 나서 골대 옆으로 튀어 나간 공을 본 것이 전부였다.

벌떡 일어난 정지우가 또 오른손 손바닥으로 연신 가슴을 쳐 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심장에 불이 붙은 것처럼 후끈한 무언가가 마틴의 가슴과 목젖을, 그리고 영혼을 뜨겁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마틴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를 똑바로 보고 있던 레믹과 눈이 마주쳤다.

나가고 싶다고?

저 뺀질이가 이런 쓸데없는 경기에서 피가 끓었다고?

퍼엉!

또 코너킥이다.

10개가 넘는 코너킥!

이번 건 수비수가 걷어 냈다.

시간은 10분쯤 남았다.

‘빌어먹을!’

쉬고 있었으니까 주전들이 10분쯤은 뛰어도 되지 않냐고?

선수 생활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게임이 주는 긴장감, 체력의 소진, 부상의 위험을 감안한다면 10분의 무모한 도전이 13년 만의 승격을 말아먹을 원흉이 될 수도 있다.

FA컵 우승? 유로파 리그 진출?

꿈같은 소리다.

지금 미쳐서 날뛰는 관중들도 승격에 실패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을 해 댈 거다.

마틴은 이를 꽉 깨물고 벤치에 앉았다.

비기면 이 빌어먹을 경기를 또 한 번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골키퍼를 교체했다가는…….

퍼엉!

그라운드 한가운데에서 세차게 걷어찬 공이 높다랗게 떴다가 내려오고 있었다.

마틴은 지나가는 시선으로 정지우를 힐끔 보았다.

누구나 ‘인생 경기’라는 것이 있다.

저 코리안은 바로 오늘이 인생 경기다.

염병할! 그따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더럽게 재정이 열악한 구단에서 서브로 구색을 갖추기 위해 데리고 있던 골키퍼가 엉뚱한 게임에 불을 지른 게 문제인 거다.

툭. 툭. 툭.

마치 권투 선수가 잽을 던지듯 아스널의 선수들이 패스를 주고받았다.

저러다가 한순간에 툭툭툭툭 골대 앞으로 달려들거나, 아니면 또 그림 같은 패스로 오프사이드를 벗겨 버릴 거다.

수준 차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공이 움직였다.

빠르게, 빠르게, 그리고 루시스가 공을 받는 순간이었다.

투욱.

농구 선수가 손으로 던진 것처럼 공은 수비를 넘어갔다.

침묵이 삽시간에 모든 것을 덮었다.

공격하는 편은 소름이 돋고, 수비하는 편은 숨이 막힌다.

수비수 사이에 있던 미하엘이 불쑥 튀어나와 공을 받았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패턴인데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정지우가 달려 나왔다.

‘왜?’

퍼엉!

세상이 그대로 정지한 것 같은 상태에서 미하엘과 정지우만 보였다.

공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오른쪽 골대 모서리로 날았다.

화악!

고양이가 새를 잡기 위해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 예에에!”

“우- 와아아!”

마틴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정지우를 보았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날아오는 공을 7미터 거리에서 보고 막았다.

시선을 들었을 때 미하엘은 완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저런 놈들은 슬럼프를 맞기 쉽다.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거다.

몸값이 2,000만 유로인 선수가 5만 유로짜리 단기 임대 선수 때문에 기가 꺾여 버렸다.

마틴은 고개를 짧게 털었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연봉으로 따지면 마틴 역시 미하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추가 시간이 2분 주어진다고 볼 때 남은 시간은 이제 7분.

마틴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후우!’ 하고 숨을 털어 냈다.

‘이제 끝내자! 제발!’

이대로만 끝나면…….

순간 마틴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정지우의 눈짓을 받은 주장과 카알이 슬금슬금 페널티 박스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격을 하겠다고?

전원이 달려들어 막아도 시원찮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