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4 마지막을 향해 =========================================================================
수확제가 지나자 가을은 금세 지나갔고 짧은 가을이 지나 혹한기인 겨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영토의 정비를 하느라 바빴지만 대부분의 가신들이 할 일을 정해주었고, 불릿도 더 이상 발로 뛰어다니지 않았기에 약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가함은 폭풍전야라는 것을 불릿도 알고, 바포 변경백의 어린아이 하나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특히 어른들은 전쟁을 앞둬서 그런지 더욱 전투연습을 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핫! 하앗!”
“느려도 좋다! 힘 있게 찔러!”
“핫! 차핫!”
병사들은 교관역할을 하는 십인장들의 지시에 따라 밀짚인형에 창칼을 찔러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인간보다 힘이 세고 가죽이 질겼다. 그래서 병사들은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는 방법을 주로 배웠고, 밀집대형에선 어차피 많은 움직임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이렇듯 정확하고 힘 있는 타격법을 구사하는 것이 보다 좋았다.
오전이면 대부분의 업무가 끝났기에 불릿은 흙덩이가 가꾸는 화단을 거닐고 있었다.
“쌀쌀하군.”
초겨울에 접어드는 날씨이니 웬만큼 껴입지 않는 이상은 바람만 불어도 추위를 느낄 만한 정도였다.
이런 날씨면 꽃들도 시들어야 정상인데 흙덩이가 가꾸는 화단엔 온통 푸릇푸릇하고 알록달록한 꽃들밖에 없었다.
그녀가 워낙 예쁘고 향기로운 것들만 좋아했기에 키우기 어려운 종류들이 득실득실했으나 땅의 기운을 한껏 받았기 때문인지 오히려 더욱 생기가 그득했다.
불릿은 허리를 수그려 꽃잎을 만지며 그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장거리 공격으로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아무리 불릿이라도 아스타로트를 상대로 흙덩이를 그녀에게 접근시키고 싶진 않았다.
단순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백퍼센트 위험하다, 그것도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고 그도 아니라면 사지의 일부를 잃을 수 있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72악마군주의 필두인 아스타로트를 둘이서만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지 불릿은 너무도 부끄러웠다.
사라락-.
불릿의 손길에 따라 흔들리는 꽃잎이 계절도 잊은 채 자신의 자태를 뽐낸다.
이 꽃처럼 불릿도 보살핌만 받으며 외부의 위협에 대한 걱정이 없었으면 싶었다.
“후우.”
흙덩이가 키우는 화단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실례되는 짓이겠지만 내년엔 워낙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치 자신의 꼬리를 먹으려고 빙글빙글 도는 우로보로스가 이렇진 않을까 싶다.
슬슬 추위가 엄습해오자 수그린 허리를 펴고선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여기에 있었나?”
“곧 가보려던 때였소.”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싱그러운 봄내가 나는 분홍색 옷을 입은 여성의 미모는 극치를 달렸으나 자신이 그런 옷을 입은 것이 어색했는지 좀체 가만히 있질 못했다.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소?”
“이런 옷은 연애할 때를 제외하곤 수천 년 만이라서 그건 무리다.”
그러면서 다리가 너무 휑하다니, 속옷 면적이 좁다느니, 그래도 가슴가리개는 편하다니 하면서 종알종알 말도 참 많았다.
이것만 보면 친한 친구 사이의 남녀처럼 보였다.
“그거 아쉽군, 상당히 잘 어울리는데 말이지.”
“아내를 셋이나 둔 녀석이 입도 싸군.”
“…그런 것 치곤 얼굴이 너무 붉은 거 아니오?”
불릿의 말대로 미모의 여성, 우락크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으나 무표정함과는 달리 귀 끝까지 피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전혀 의미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것도 어쩔 수 없지, 그런 칭찬도 수천 년 만이니까.”
“자식들이 자주 칭찬했을 것 같은데.”
불릿의 물음에 그녀는 또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생판 모르던 남자에게 듣는 거와 같나?”
다시는 그런 친근한 기분을 느낄 수 없게 되었으니 절로 우울해지나보다.
지금 대륙에 만연한 오크들은 진정한 그녀의 자식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이미 수십, 수백 세대를 지나 피는 옅어질 대로 옅어졌고 지성, 인격, 생김새조차 그녀와 그의 남편이었던 오크를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파괴만을 일삼는 몬스터만이 존재했으니.
신이었다 하더라도, 영겁의 시간을 보내며 수련을 하더라도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보면서 불릿은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를 거듭 다짐했다.
“…화단에서 자애의 여신의 사랑이 느껴진다. 중요한 곳인가?”
우락크는 가이아를 자애의 여신이라 부르곤 했는데 아무래도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지계열 신들의 특징을 따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흙덩이가 이곳을 좋아하긴 하지. 일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취미로 키우는 꽃들이니 말이야.”
“취미라….”
낯선 말을 들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쪼그려 앉은 채 꽃들을 어루만지는 신격을 잃은 신.
본인은 치마를 입은 게 어색하다고 했지만 가이아와 비등할 정도의 외모가 남자처럼 군다고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것도 떠오르질 않았지만.
이처럼 혹한의 계절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지만 전쟁을 위한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 * *
밴은 바포 변경백의 집사이자 준남작이다. 애로우 폰 바포를 비롯, 지금에 이르기까지 2대에 이르는 바포가문을 섬기는 그 누구보다 충심 깊은 가신.
그래서 그는 비밀호위대라는 불릿도 모르는 은밀한 조직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오직 불릿에게만 충성하며 비상시엔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충직한 하녀들.
지금 밴은 그녀들이 나서게 될지도 모르는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똑, 똑, 똑.
세 박자를 느릿하게 두드리는 밴 특유의 방문알림에 안에서부터 불릿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게.”
다시 한 번 구겨진 곳은 없는지 복장을 점검한 밴은 60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한 허리를 곧추세우며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기침하셨습니까, 주인님.”
“어머, 밴 아저씨 오셨어요?”
“…안나 하녀장, 그리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호호호, 우리 사이에 챠암.”
안나의 되도 않는 애교가 있은 후에야 밴은 불릿과 대화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할아범.”
두 팔을 허수아비처럼 가지런히 수평으로 유지하고 있는 불릿.
무얼 하고 있었는지 복장은 평소와 같은데 안나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있어 불릿의 사이즈를 재고 있던 것.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며 불릿과 밴은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난민수용을 통해 부족했던 인력의 충당을 완료했고, 그로인해 군대의 정비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우리야 준비가 끝났다지만 다른 군벌들도 끝나진 않았을 텐데?”
겨울이라서 그런지 모든 일들의 생산성이 저하된 상태, 가뜩이나 몬스터 웨이브로 큰 피해를 입은 다른 지역의 패자들은 이를 복구하는데 몇 년 가지곤 되지 않을 터였다.
“투툰이 움직였습니다.”
밴의 말에 지금까지 줄곧 자신의 영토만 지키며 얌전히 있던 투툰 후작이 으름장을 놓자 구울 백작은 화들짝 놀라 군소영지들을 압박, 어떻게든 구색은 맞춘 상태란다.
당장이라도 출진할 수 있다고 하지만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모일만한 장소와 시기도 정해야 했다.
“고맙긴 하군. 흠, 그렇다면 놈들은 지키는 입장이니 겨울보단 봄이 좋겠지?”
“레너드 자작도 그리 말했었지만 흑마법사를 상대로 많은 시간을 주는 것은 좋지 않기에 겨울에 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미 마족은 소환되어 있었지만 불릿은 다른 자들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저 또 다시 소환준비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신이 습득한 정보를 약간 조작해 알려주었을 뿐.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륙은 아주 난리가 나 마탑에서도 전면에 나설 정도였다.
“안나, 그만하면 됐다. 다른 애들은 재봤고?”
“혹시 몰라서 다시 재보려고 했어요. 아휴, 작은아씨는 가슴이 너무 크셔서 뭐가 어울리실지 모르겠네요.”
“크흠, 알았으니 가보게.”
“호호, 부끄러워하시긴.”
남의 입으로 흙덩이의 부각된 신체일부를 듣는 것엔 아직도 어색했다.
뭔지 모를 말들을 나두던 안나가 밖으로 나가자 밴은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이번 전쟁엔 구울 백작도 출전하겠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하녀들을 통해 습득한 정보인가?”
“비밀입니다.”
“그럼 그렇다 치고, 구울 백작이? 그놈은 뭐 목숨이 수십 개라도 되는가?”
불릿만큼 흑마법사와 많은 전투를 치른 사람도 없었다.
예전 결사대의 일원이라면 그보다 많은 자도 있었지만 이미 결사대는 전멸한 상태, 살아남은 자는 불릿 하나였으니 불릿이야말로 흑마법사의 위험함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다.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가보군, 멍청한 작자야.”
불릿이나 투툰처럼 높은 자들이 앞장서서 일을 진행하니 자신이 도태될까봐 불안했던 모양이다.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진 않으니 시중들 인원이 필요하실 것 같아 구성을 좀 꾸려봤습니다.”
불릿이야 이번 토벌을 주도하는 입장이었고,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도와주러 온 우락크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존재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만이 알고 있었기에 병력만 파견하는 자들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대영주 직속관 하녀 다섯에 그녀들을 다스릴 자로는 루나를 선정했습니다.”
“루나라…, 흠. 나는 필요 없더라도 흙덩이는 필요하겠군. 다섯이면 목욕도 원활하겠지?”
“전장에 나서면 아기만들기에 열중하지 마십시오.”
“안 한다니까, 할아범? 대체 다들 왜 이리 하지 말라는 건지….”
“작은아씨와 하시면 1주일 내내 하더라도 끝나질 않으니 전쟁을 진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가장 짧게 하는 유실리아라도 반나절은 족히 했으니 이번엔 절대로 금해야 했다.
그가 한번만 한다고 만족할 리는 없었으니까.
“크흠. …다들 너무 허물없이 구는 거 아닌가? 그래도 명색이 백작인데 말이야.”
“그러게 누가 아무데서나 하라고 했습니까. 저는 도련님을 그렇게 키운 기억이 없습니다.”
“…….”
“화단에서 작은아씨와 하실 때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마차에서 하셨다고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건 아십니까?”
귀족들의 여러 변태행위를 봐온 61의 밴이라 할지라도 꽃밭에서 하루 종일 응응(?)을 하며 눈치도 안 보는 둘에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후계를 만드는 것에 열중하는 것은 기쁠 따름이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는데 성공했군요.’
밴이 불릿을 혼내는 데엔 비밀호위대인 그녀들을 심으면서 불릿의 기억에서 의구심을 지우기 위함도 있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희생술을 발동할 수 있는 비밀호위대로 불릿을 보호하려는 의도.
“작은아씨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듬으셔야 합니다. 주인님이 어른으로서 잘 리드를 하셔야지, 하자고 해서 무조건 끌려가셔서야 되겠습니까?”
“알겠다니까 그러네….”
“알지만 말고 실천하셔야 합니다. 밖으로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막았지만 웬만한 가신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대체 회장에서 그런 애정행각을 하는 건 어디서 배우셔가지고 그러는지 이 노인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끄응…….”
나이가 많아지니 잔소리도 많아지는 밴, 그는 자신이 왜 방문했었는지 잠시 이유를 잊은 듯 그동안 쌓아두었던 불릿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얼마 안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