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3 마수의 숲으로 =========================================================================
“72악마군주는 단순한 마족이 아니다. 그들 또한 균형을 맞추는 존재, 신적인 자들이어서 오직 같은 신격을 지닌 자들만 죽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신격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우락크의 말대로라면 신격이란 걸 얻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강해도 신을 죽일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우락크는 신격을 잃은 존재, 대체 무슨 수로 아스타로트에게 손을 댄다는 것일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네가 나를 믿지 못하더라도 가이아는 나를 믿으니 그녀를 믿어봐라.”
결국 가이아가 우락크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불릿은 못마땅했지만 가이아 여신을 믿으라는 말에 그저 흙덩이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스윽-, 스윽-.
“당신이 마계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라 들었소. 그럼 이곳은 어찌 되는 것이오?”
문지기가 없다면 문을 통해 마구잡이로 들이닥칠 마물과 마수가 걱정되었기에 물으니 이에 퉁명스레 대답하는 우락크.
“튼튼하게 봉인했으니 걱정 없다. 내 아이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친족의 죽음이었기에 그것을 떠올리니 다시 슬픔을 그녀에게 불릿은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빠, 왜 나보고 신의 딸이라고 불러?”
“음?”
“가이아 여신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고, 좀 이상해. 뭐야?”
흙덩이는 가이아 여신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모른다.
정령어와 신어를 안다고 하지만 자신이 어떤 이유로 그걸 아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가이아 여신의 선물이었던 것 같지만 누가 줬는지 그녀가 어떻게 아는가?
흙덩이가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은 자신을 버렸다는 증오나 아예 부모라는 자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이아 여신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다는 말에 불릿은 그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 흙덩이는 여신이 부모님이라면 좋을 것 같아?”
가이아 여신이 밝히지 말라 했기에 은근히 돌려서 물으려던 불릿.
“싫어, 나 맨날 혼자였어. 불릿 오빠가 나 사랑해주기 전에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 흥, 엄마아빠 바보야. 다 싫어!”
“그, 그래?”
“응, 그러니 사랑해-.”
“어어…, 나도 사랑해.”
“히히히!”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오는 흙덩이를 안아주자 우락크가 그것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가이아도 가엾군, 역시 신은 사랑을 해선 안 되는 존재였어.”
“…….”
탄식을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불릿은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부모를 잃은 기억은 있어도 자식을 잃은 적은 없기에 이해한다느니 같은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후우, 우리가 있는 이 집은 봉인지다. 너희가 떠나갈 때 나도 따라갈 것인데 그때 여기를 허물어버릴 거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흙덩이를 데려온 것이오?”
“괜찮다. 단순히 방음도 잘되기 때문에 데려온 것이니까. 내가 그런 것도 계산하지 못했겠는가?”
말을 끊고 한박자 쉰 후 말을 잇는 우락크.
“3일의 시간을 달라, 이곳을 정리하고서 떠나고 싶으니까.”
“…시간을 더 줄 수도 있소만?”
“여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3일 후에 떠나자.”
슬픔이 묻어나는 말을 하며 우락크는 닫혔던 문을 열었다.
그르르릉-
* * *
우락크는 자신이 내뱉었던 약속대로 3일 동안 바삐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한 후 불릿과 함께 마수의 숲을 떠났다.
호위병대의 말로는 빈집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도 우락크는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옷가지며 장난감,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장시간 쳐다보았다고 한다.
잠도 자지 않고 그렇게 3일을 보낸 그녀는 떠나는 날에 봉인지를 허물어버리고 빈집을 불태웠다.
타닥타닥 불타는 집을 바라보던 그녀는 너무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중앙영지로 향했다.
터벅, 터벅.
호위병대는 그녀가 자신들을 압박하던 수수께끼의 방문자라는 사실에 놀랐었으나 이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스터에게 있어 겉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했기에 아름다운 엘프여성이라 할지라도 방심해선 안 될 것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는 자들은 존재했으니,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리라.
아마 그녀가 애까지 낳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안다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불릿은 생각했다.
“끼에엑!”
멍청하게 습격을 해오던 놀들은 우락크의 회전베기에 두 동강이 나며 흙바닥에 처박혔고, 그 상태로 숨이 끊어졌다.
몬스터를 상대론 자비가 없는 그녀였지만 딱 하나, 우락크가 손을 대지 않는 몬스터가 있었다.
“취익, 취이익!”
“먹자, 먹자! 취익!”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미처 돌아가지 못했는지 100에 이르는 오크떼가 등장하자 그녀는 살그머니 뒤로 빠졌다.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놈들을 정리해가자 얼핏 그녀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불릿은 신도 하나의 불안정한 생명체임을 느꼈다.
‘아닌 척해도 자손들이 낳은 후손이 망가진 모습을 보기 힘든 모양이야.’
몇몇 오크들이 자신에게 달려드니 입을 오물거리며 대화를 하려다가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다시 굳게 닫히는 앵두 같은 입술.
이에 불릿은 아예 그녀를 후방으로 빼버렸고, 우락크는 홀로 호위병대를 쫓아오는 상황이었다.
“집이다아!”
“…와.”
흙덩이야 드디어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밝아졌으나 우락크는 대체 왜 얼굴이 밝아졌는지 알 수 없는 순간, 그녀의 입으로부터 아이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엄청 크다….”
불릿의 거성을 보고서 감탄한 것인지 입을 벌리고선 두리번두리번, 마치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처럼 반응하는 그녀에게 불릿이 말을 걸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오?”
“헛, 뭐, 뭐야! 갑자기 들이대지 마!”
“…왜 그러는 것이오? 마치 이런 곳은 처음인 사…람처럼.”
사람은 아니지만 일단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불릿.
그녀는 지금 기다란 귀를 가린 채 로브로 몸을 둘러싼 상태였다.
혹여 아스타로트의 하수인들이 우락크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었기에 오는 길엔 정체를 가렸던 것이다.
그래도 성으로 들어가고 나면 더 이상 불편하게 몸을 가리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의 물음에 우락크는 헛기침을 하면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마수의 숲 인근의 성벽을 멀리서 본 것을 제외하면 근 수천 년을 한곳에만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문화가 이토록 발전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수천…년….”
“덕분에 그 아이들만 고생했지, 하위신의 신력을 얻어 죽지도, 벗어나지도 못하고 나와 함께 봉인지를 지켰어야 했으니 말이야.”
그것도 다 옛 이야기, 신에 근접한 존재인 베히모스를 봉인하며 그 거대한 동체로 봉인지를 틀어막기 위해 모든 힘을 소진해 소멸한 그녀의 아이들.
또 다시 슬픈 표정을 짓는 우락크에게 흙덩이가 다가와선 손을 잡았다.
덥석.
“언니, 우리집에 들어가자! 엄청 넓고 재밌어! 밥도 맛있구, 또…, 헤헤. 오빠랑 놀 수도 있어.”
“흙덩아, 쉿.”
“앗, 히히.”
특유의 복숭앗빛 혀를 낼름 내밀며 실수였음을 알리는 흙덩이를 바라보던 우락크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천진한 흙덩이는 우락크와도 친해져 어느새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우락크 또한 자신과 친했던 가이아 여신의 아이를 귀찮아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귀여워해주며 어울려주었기에 썩 보기 좋은 광경을 연출했다.
“각하, 저분은 위험합니다.”
“또 그러는가, 셰실리코프.”
뒤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불릿에게 셰실리코프가 경고를 하자 불릿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흑마법사와의 전쟁에서 활약할 자라고 하셨지만 정체도 불분명한 자입니다. 그를 감당할 수 없던 제가 부끄럽사오나 각하를 지켜드리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흐음.”
셰실리코프는 불릿 덕분에 하늘의 별 따기였던 5공녀와의 사랑을 이루어냈다.
하늘의 별을 딴다는 말처럼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음에도 불릿은 대영주라는 입장에도 죄를 지은 셰실리코프를 위해 몸소 움직여 거대 세력의 수장인 투툰 후작과 면담을 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데 교섭까지 성공시켰고 연합체를 대신할 혈맹을 만들어내 흑마법사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복귀한 이래로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의 존재감은 이전보다 더욱 커진 상태, 바포 변경백의 보물인 불릿이 위험인물의 옆에서 지내는 것은 너무도 불안했기에 셰실리코프는 우락크를 중용하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우락크는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나이가 많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준 약속을 사용한 것인데 그렇게도 불안한가?”
뭔가 그럴 듯한 핑계를 대어야 했기에 불릿은 죄송하지만 부모님을 핑계로 대었다.
급조한 말이기에 자세히 말하진 않았으나 오히려 이런 면 때문에 더욱 신뢰성이 있어보였다.
“…제가 힘만 더 있었어도…, 죄송합니다.”
“원 사람도, 그러다 아이를 보기도 전에 죽겠구만. 자네나 몸을 좀 사려야겠어.”
“가, 각하.”
“후후후.”
흑마법사를 토벌하기 전까진 셰실리코프가 불릿을 따라다니기로 했기에 5공녀 션샤인 폰 투툰은 중앙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불릿의 저택은 주변의 영지 중에서도 가장 넓고 거대한 성이었기에 방이야 많고 많았다.
그중 몇 개를 준다하여 아까울 것도 없었으니 거기서 션샤인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부러 방도 구석진 곳에 마련해주어 방음과는 별개로 응응(?)에 열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어 얼마 안 있어 5공녀가 아이를 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불릿보다 더 빠르게 자식을 볼 것도 같아 그게 죄송스런 셰실리코프였다.
“자, 이제 볼일도 끝났으니 병력에 휴가를 주어라. 올해는 내실을 다질 것이라고 밝혔으니 준비를 함에 소홀함이 없어야할 것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뒤에서 보좌하고 있던 크레파토스는 빙글 뒤로 돌면서 외쳤다.
“모두 수고했다! 각하께오서 휴가를 주신다하니 3일 뒤에 막사로 복귀하도록! 이상!!”
그러면서 허리를 펴는 크레파토스.
“어구구, 허리야….”
뭔가 세월이 느껴지는 멘트였다. 기사라고 해도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 * *
“그년은 누구야?”
“그런 거 아니라고.”
“마님, 지원군이라고 그러셨잖아요.”
“누가 뭐래? 근데 왜 하필 여자냐고.”
올리비아는 다과를 먹으면서도 불퉁한 질문을 넘겼는데 유실리아가 불릿을 지켜주어도 톡 쏘아보내는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따가웠다.
흙덩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우락크를 데리고 성을 안내해주고 있어서 자리에 없었다.
“뭘 믿을 수 있다고 예쁜이랑 둘만 남겨?”
“믿을 수 있다.”
“그러니까 대체 뭘 믿고?”
‘가이아 여신을 믿고.’
하지만 남들에게 알려줄 만한 사항은 아니었기에 불릿은 그녀의 허리춤을 잡고서 끌어당겼다.
와락!
“어엇, 왜 그래?”
바짝 끌어당기자 숨결이 얼굴에 맞닿자 불릿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고선 키스를 했다.
“날 믿어.”
시작은 다과회였는데 내부의 분위기는 어느새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곧 열풍이 들이닥쳐 숨조차 뜨거움에 살이 익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