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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218화 (218/241)

00218  두 번째 수확제  =========================================================================

“거절하고 자네도 물러가보게. 이런 밤에도 일할 필요는 없으이.”

불릿의 제안에 응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투툰 후작의 명이었으나 사가하라 공작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여전히 자신의 침소에 머물러 있자 평소 그를 좋게 봐주던 투툰 후작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서 안 가고 무얼 하는가? 별로 급한 일도 아닌데 찾아와서는….”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합니다. 대체 왜 약속을 취소했던 겁니까?”

“지금 본인을 질책하는 겐가?”

루드밀라의 실질적인 1인자에겐 왕이라 할지라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랬다가 그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나 사가하라 공작은 감히 그에게 질책 섞인 말을 내뱉었다.

“불모의 황무지에 흑마법사가 나타난 이상 저희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바포 백작이 앞장서서 토벌을 진행하겠다는데 왜 그를 밀어내십니까?”

처음엔 투툰 후작도 불릿의 제안을 받아들였었다. 진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는 약속을 허투루 하지 않기에 그의 행동은 이례적이었던 것.

명예는 물론 체면의 손상까지 이어지는 행동이었기에 사가하라 공작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도 없고, 이미 일이 이렇게 된 거 바포 백작은 믿을 만한 자였으니 그를 믿고서 5공녀를 맡기면 되지 않는가?

그게 싫다면 자신의 힘으로 셰실리코프를 이쪽으로 데려오면 되었다.

“…그가 상급에 올라섰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에 대해선 아직 정보수집 중에 있으나 일부 부분에선 그게 맞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니야, 상급이 아닐 수도 있어.”

“뭔가 다른 첩보를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

방이 어두워서 그런지 투툰 후작의 안색도 한층 더 어두워 보였다.

그가 화를 내면 냈지 이렇게 조용한 적은 거의 없었기에 더욱 분위기가 사는 듯했다.

사가하라 공작은 차분히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침묵을 한다는 것은 말을 하기 싫다는 것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10분이 지났을까, 투툰 후작의 딱 닫혔던 입술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는 위험하다. 우리가 먹힐지도 몰라.”

쿠궁-!

“후작님? 대체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후작이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은 사가하라 공작이 그를 섬기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약간 가벼운 행동을 일삼는 투툰 후작이지만 그의 속까지 가볍진 않았다.

무겁다 못해 웬만한 군벌의 군주들도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사람.

“상급? 그런 엄청난 힘이? 흥!”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던 투툰 후작은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4천의 몬스터 대군을 단 2번의 공격으로 전멸시키는 자가 어찌 겨우 상급 정령사란 말이더냐!”

“그게 사실입니까?!”

내심 상급 정령사임을 확신하고 있던 터라 사가하라 공작은 정말 깜짝 놀란 제스쳐를 취했다.

버럭 화를 내던 투툰 후작은 벌떡 일어서서 가운이 흐트러진 것을 추스르며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털썩.

“제기랄, 최상급이면 혼자서도 우리를 유린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런 위험한 놈에게 명분을 주라고? 미치면 미쳤지 죽어도 안 돼.”

“그가 최상급이라는 근거가 있으십니까? 지금까지 최상급 정령사는 몇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사가하라 공작은 금방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그에게 궁금증을 물었다.

그의 말대로 최상급 정령사는 대륙의 판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경지였기에 그것을 측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령사에게 있어 최상급이란 곧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위치.

그 이상의 경지는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것이야 말로 모든 정령사의 꿈이자 목표라 할 수 있었다.

헌데 자신이 측정한 것과 다른 말에 사가하라 공작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던 것.

“믿기지 않나 보군.”

“제가 허술하게 조사했다고 여겨지진 않습니다. 그리고 몬스터 대군이야 각지에서 발생했던 일이 아닙니까?”

4천은 아니지만 그에 근접한 수가 곳곳에서 나타났었다.

2번의 공격으로 전멸시켰다는 것은 걸리는 점이었지만 자신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는 경우는 흔했기에 낮춰서 보는 것이 좋았다.

“…본인의 힘이다. 의심하는가?”

“그렇군요. 그럼 그쪽으로 상향판단 하겠습니다.”

투툰 후작이 그에게 거짓을 고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는 믿어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큰 문제에 직면한 게 된다.

“처리할까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리까듯 묻는 사가하라 공작.

그가 묻는 말은 불릿을 아무도 모르게 슥삭 해치운다는 뜻으로 암살을 하자는 의미였다.

모름지기 예부터 강자를 죽일 때엔 기습적인 공격이나 잠들었을 때, 그리고 정사에 정신이 팔렸을 때가 가장 좋았다.

음식에 독을 타는 행위는 의외로 어려웠다. 웬만큼 경험이 있는 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철저히 대비를 했고, 귀족치고 은제식기를 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는?”

지금 이 상황에서 불릿의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내부에 깊숙이 첩자를 심어 넣을 인물은 투툰 후작뿐이다.

이게 실패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최상급 정령사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아내야 했다.

“후작님이라면 최상급이라 하더라도 상대할 만하지 않습니까?”

“왜 굳이 그런 부담을 안고 공격해야하지? 차라리 구울 백작을 자극해 공격하도록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군.”

투툰 후작의 뉘앙스는 마치 구울 백작을 조종할 수 있다는 듯했다.

만약 그렇다면 작금의 구울 백작의 동태는 그가 유도했거나 그리 만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걸 알면서도, 또 이렇게 밝히면서도 사가하라 공작이 투툰 후작에게 붙어있는 것을 보면 둘 다 무서운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럼 어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5공녀와 삼광을 이어주는 것을 거부하시면 남는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처럼 가만히 있기엔 너무 위험하니까요.”

“대체 바포 백작에게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현재로썬 아는 자가 없습니다.”

단시일 내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보이는 것이 정녕 가능할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정령사에게 최상급이라 하면 검사로 치면 소드마스터, 마법사로 치면 7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였다.

소드마스터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고, 7서클 대마법사도 6곳의 마탑주들 전원이 그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령사가 최상급에 도달하기 위해선 대체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정령력만 많다고, 정령과의 교감이 깊다하여 도달할 수 없는 경지.

“자네가 판단하기에 둘을 이어주지 않은 상태로 연합을 결성하면 어찌 되겠나?”

흑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정황이 포착됐고 그걸 마탑에서 공인해주었다.

그러니 토벌은 선택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렇다면 어차피 해야 할 일에서 어떤 자리에서 어느 정도의 활약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번 토벌에서 큰 활약을 할 경우 명예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흑마법사의 유물을 보다 많이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이 활약했다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굴었던 군벌들에게 제약을 가할 수 있으리라.

투툰 후작에게 딱히 재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명예와 명분, 그리고 어떤 힘을 가졌을지 모르는 흑마법사의 유물울 빼앗기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의 물음에 사가하라 공작은 자신의 의견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둘을 이어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상태이고, 알려진 바로는 셰실리코프가 공을 세워 남작위에 올랐다합니다.”

“그 놈팡이놈이?”

“삼광 또한 한 지역의 영주, 그리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이니 저쪽에서 저자세로 나와주면 받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받아야 합니다.”

“선택지가 없으니 좋은 기분은 아니로군.”

“차기 소드마스터 사위, 좋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진짜….”

결론이 나자 슬쩍 농을 건네는 사가하라 공작. 투툰 후작 또한 그가 나쁜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노려보면서도 한숨만 쉬었다.

나쁘게 여겨봤자 사위가 될 자에게 밉보일 뿐이었고, 그리 된다면 바포 백작과 적대시하게 될지 몰랐다.

그리고 기껏 이어준다 해놓고 삼광을 멀리하면 5공녀 션샤인 폰 투툰 또한 그에게서 떠나갈지 모르는 일.

사랑은 때론 순진한 여자를 과격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으니까.

“제길, 언제까지고 내 품에서 자랄 줄 알았는데.”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에서 한 여인의 아비로 돌아온 투툰 후작이 투덜거렸다.

“5공녀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닙니다. 2차 성장도 끝난지 오래이지요.”

“누가 뭐라나? 너무 아까워서 그렇지. 그 아이라면 더 좋은 놈과 결혼할 수도 있던 것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렇고 데릴사위를 생각하고 있던 후작에게 사가하라 공작이 조언을 건네주었다.

“사돈관계가 됐으니 마정석과 향신료의 수급도 원활해지겠군요.”

“사돈은 무슨….”

따지고 보면 셰실리코프와 불릿은 자식이라고 할 정도로 나이차가 나지도 않았다.

핏줄 또한 이어져있지 않았으니 남남이나 마찬가지, 그저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이 외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쪽에서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게 됐을 뿐이지. 바포 백작이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최상급 정령사가 굳이 치졸한 수를 사용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에게 야심이 있었다면 위험천만하고 척박한 변경백에 처박혀 있지도, 협박에 따라 결사대로 향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쯔읍.”

입맛이 썼는지 이를 쑤시듯 공기를 빨아먹는 투툰 후작은 보드카를 단번에 들이켰다.

꿀꺽!

“크악! 자야겠다, 취기가 도는군.”

딸그랑-.

잔속에 들어있던 얼음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사가하라 공작도 그의 방에서 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럼 바포 변경백과는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조치하겠습니다. 저는 나가보겠으니 편안한 밤 되시기를.”

물러나려던 사가하라 공작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든 투툰 후작을 볼 수 있었다.

“드르렁-, 푸우우….”

“후작님?”

“드르렁-.”

“…….”

대꾸도 못하며 깊은 잠에 빠져든 그를 보며 사가하라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를 들어서 침상에 옮겨놓았다.

“커어억!”

“괜찮으십니까 후작님?”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몸짓이 멈췄던 투툰 후작은 공작이 밖을 향해 급히 사람을 부르려던 순간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푸우우-….”

“…어휴, 후작님만 아니었으면 진짜.”

코골이가 주먹을 부를 만큼 고약했기에 침착함을 고수하던 사가하라 공작은 저도 모르게 속내를 입으로 꺼내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잠들어있는 투툰 후작이었기에 그는 콧김을 길게 내쉰 후에야 방에서 나갈 수 있었다.

달카닥.

문이 닫히며 어둠만이 자리하자 알퐁스 드미리치 폰 투툰 후작은 깊게 고뇌하던 문제가 사라져서인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수마에 빠져들고 있었다.

“드르렁! 푸우우….”

5공녀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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