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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203화 (203/241)

00203  몬스터 웨이브  =========================================================================

눈을 뜬 불릿이 가장 먼저 뱉은 소리는 바로 이거였다.

“씨발.”

밑도 끝도 없이 욕설부터 내뱉는 그의 음성에 아래에서부터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부, 불릿?”

덜덜덜.

흙덩이는 자기가 해놓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놀랐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불릿도 그녀의 떨림이 전해지고서야 흙덩이가 자신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일어섰다.

“허어.”

한껏 힘을 억제해서인지 범위는 이전보다 좁았다. 이전이 정령력 총량의 절반을 사용했다면 이번엔 그보다 적은 4/10을 사용한 게 이유이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범위가 작다고 위력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 취, 취리릿…

파충류일지 갑각류일지, 신체가 무너져내린 놈의 생김새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다섯 마리가 있었으나 이젠 다 죽어가는 단 한 마리의 하급 마물만이 생존한 상태.

그러나 신체의 대부분이 날아가 머리로 추정되는 부위만 간신히 남아있어 살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수십 미터나 뻗어 병사들을 도륙하던 혀는 인간의 혀만큼 짧아져 그런 게 있었다는 표시만 나타내는 상태.

불릿은 자신들이 만든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아까보다 더 심하군.”

그러면서 자신의 품에서 덜덜 떨며 똑같이 무서워하는(자기가 해놓고서) 흙덩이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참으면 안 좋은 것이야.”

…뭘 참으면 안 된다는 것인지 몰라도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흙덩이에게 말을 걸었다.

“흙덩아, 마무리를 해야지?”

“으으, 이거 이제 하기 싫어…, 힘들고 무서워.”

나이가 어린 만큼 그녀의 의지력은 쉽게 포기하고 쉽게 끓는 성향이 있었다.

냄비근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그녀는 불릿의 말이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랐기에 연령대에 비해 의젓해 보이긴 했다.

그는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기 시작했다.

“저놈만 잡으면 이제 쉴 수 있다.”

“…정말? 얼마나?”

쉰다는 말에 칭얼거리던 것도 멈추고 불릿을 올려다보는 흙덩이.

불릿은 아이돌보기를 해본 적은 없으나 화전마을에서의 경험을 살려 흙덩이를 다루는 데엔 그럭저럭 도가 텄다.

“오늘밤에 오빠랑 푹 쉬고 나서도 내일까지도 쉴 수 있지.”

같은 말이라도 되도록 길게 늘려서 더 많이 쉬는 것처럼 말하는 전법.

그냥 말장난이었으나 이제 세상구경 2년차인 흙덩이에겐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럼 나 할래! 어서 줘!”

그의 품에 안겨있는 상태였기에 흙덩이는 비비듯이 폴짝폴짝 뛰며 애원했고, 그래서 그런지 가슴이 비벼져 기이한 마찰열을 일으켰다.

“크흠, 알았으니 그만. 곤란하다(?).”

우우웅-!

불릿은 탈진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양만 남기고서 정령력을 그녀에게 전달해주었고, 그것을 전달받은 흙덩이는 곧장 기술을 시전했다.

“죽음의 대지!”

슈슈슈슈슉!

그러자 쑤욱하고 땅에서부터 3미터는 족히 될 법한 백여 개의 송곳이 솟아올라와 죽어가던 마물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 츄라락!!

푸확!

삽시간에 파육음을 내며 끈적끈적한 액체를 흘린 마물은 이내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크으.”

불릿이 비틀거리며 신형이 지면에 맞닿으려하자 흙덩이는 그를 부축하고서 뒤에서 멀거니 지켜보던 병력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군인 아저씨들! 도와주세요!”

뭔가 서글픈 말을 하는 흙덩이였다.

* * *

흙덩이와의 약속대로 불릿은 그날 저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편히 쉬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이동하기가 뭣해서이기도 했는데, 마치 폭풍전의 전야였다는 것처럼 땅이 파일 정도로 거센 폭우가 쏟아졌기에 시체를 수습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그래도 최고 공로자인 불릿이 탈진해서 돌아온 마당에 정령술을 사용해 달라 차마 말할 수 없어 브룩 남작은 심신이 지친 군대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

느낌표가 붙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불릿은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흙덩이로 인해 상념을 접었다.

“이얏!”

퍽.

“윽, 뭐하는 것…이니.”

“헤헤, 불릿 품에 다이빙하기.”

그의 품에 안겨온 흙덩이가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비자 불릿도 야릇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흐, 흙덩아, 아까 얘기했던 그거나 할….”

“새액-, 새액-.”

“까…, 어, 음. 자, 잘 자라.”

포근하고 따스한 이불과 불릿의 품이라는 점, 그리고 비 내리는 소리에 그녀는 금세 잠이 들었고, 불릿은 말을 꺼내다 말고 민망했는지 흙덩이의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둘이 안락함을 만끽하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젠장, 꼭 이럴 때 방문하는군.’

정령력이 거의 바닥나서 피곤함과 흙덩이와 응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가이아 여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등의 스트레스가 쌓인 불릿이 한껏 짜증을 내며 소리를 냈다.

“들어오게.”

이런 늦은 저녁에, 그것도 은밀한 행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르는 둘의 침실에 방문할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알긴 하나보군.”

“…? 아, 예. 죄송합니다.”

브룩 남작도 그가 왜 짜증을 내는지 대략 짐작을 했는지 한 번 더 사죄를 구하자 불릿은 자신이 뭐하는 짓인가 떠올린 후 한숨을 쉬며 소곤거렸다.

“이제 막 잠든 찰나이니 목소리를 낮추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거기 앉게. 짧은 이야기도 아닌 것 같으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불릿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잠이든 흙덩이를 치울 기력도 없었다.

그런 기력이 있다 하더라도 올리비아나 유실리아에게 위로받지 못해서 그런지 2주차에 접어든 지금 욕구를 풀지 못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만든, 일을 마칠 때까지 성교를 하지 않겠다는 맹세도 어길 정도로 자제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흙덩이가 잠든 지금은 그저 품에 안고 있는 걸로 만족하려 했다.

브룩 남작은 비스듬히 누운 상태의 불릿과 거의 헐벗은 듯한 상태의 흙덩이를 번갈아보다가 그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흠, 주변에 더 이상의 몬스터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고, 하급 마물 다섯 마리는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어지는 말엔 병사들의 시신이 빗물에 쓸려갈지도 몰라 위험하지만 야간작업을 통해서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수습하고, 다음날부터는 주간 작업만을 진행한다 했다.

“그리고 마정석에 대한 부분은 워낙 강한 공격기를 선보이셨기에 작은아씨의 공격에 휩쓸린 몬스터에 대해선 부서진 마정석의 잔해만이 발견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것까지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에 남은 마물로부턴 하급의 마정석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흠, 겨우 그거 하나 얻자고 이 난리를 겪은 것은 아니지만 속이 쓰리군.”

2000명이 넘는 대병력이었는데 남은 인원은 겨우 1200을 간신히 넘겼다.

그것도 병사만이 아니라 십인장과 백인장을 합한 인원으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까지 합하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성벽도 부서지고, 외성은 거의 대부분을 수리와 재건을 반복해야했으니 몬스터로부터 얻는 재화보다 나가는 재화가 곱절을 넘어섰다.

시간과 돈 모두를 버리게 된 상황이지만 그나마도 불릿과 흙덩이가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하급 마물이 다섯이나 뭉친 것은 강한 시너지를 발휘했고, 몬스터들 또한 그에 반응해 더욱 강한 힘을 냈었다.

“각하, 혹시 이번 일도 흑마법사의 소행인 것입니까?”

불릿이 흑마법사 토벌을 가신들에게 얘기한 마당이니 이번처럼 기이한 경우엔 흑마법사를 제외하곤 딱히 떠오르는 뒷배경이 없었다.

흙덩이가 깰까봐 말을 아끼던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의 동작에 브룩 남작도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깨닫고서 말 대신 행동으로 대신했다.

‘…답답하군. 차라리 빨리 끝내고 내보내야겠어.’

어차피 응응(?)을 할 수 없다면 체력회복의 수단은 잠을 자는 게 최고다.

그렇게 생각한 불릿은 목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음량을 조절하며 입을 열었다.

“자넨 마수의 숲의 주인이 누구라 생각하는가?”

“으음, 갑자기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생각해뒀던 답변에는 없던 질문이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브룩 남작에게서 말이 나왔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종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수의 숲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고, 검은 귀 부족이 강하다곤 하지만 인간을 피해 다니는 것을 보니 자신들의 부족함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모르는군.’

그의 대답에서 불릿은 브룩 남작이 가이아 여신에게서 전해 들었던 검은 귀 부족의 진실을 모름을 알 수 있었다.

마수의 숲은 마계와 중간계를 넘나들 수 있는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조건이 구성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막고자 우락크라 불리는 신화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따지고 보면 고대종이라 부를 만 한가?’

인간에게 있어 고대 이상의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기에 고대종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아온 우락크.

그러니 고대종이라 하면 우락크를 뜻한다 해도 맞을 것이다.

“그렇군, 그랬어.”

“무엇을 말입니까?”

혼잣말에 브룩 남작이 궁금증을 드러내자 불릿은 흙덩이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을 들어서 작게 저었다.

“바람이 머무는 곳은 괜찮을 것 같나?”

화제전환이 빨랐지만 브룩 남작은 굳이 그걸 지적하진 않았다.

“마수의 숲의 생태계를 생각하면 거의 모든 몬스터가 이곳으로 몰렸다 여겨지는군요. 그렇다면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적은 몬스터를 상대하지 않겠습니까?”

마수의 숲이 아무리 넓다고 한들 인간처럼 옹기종기, 살인을 금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화목하게 지낼 리가 없었으니 그 수는 정해져있을 것이다.

그러니 근 4천에 달하는 몬스터 군단을 상대한 바스톤에 대부분이 몰렸다고 봐야 옳으리라.

불릿은 여기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우락크는 마계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라 했다. 그런데 마계의 존재인 하급 마물은 왜 가만히 놔둔 것이지?’

하급이라 하지만 명백히 등급이 설정된 마물이다.

등급이 없는 밤 스티드만 하더라도 매우 위협적인 것을 상기하면 우락크는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봐야한다.

‘지금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질 않는군.’

어차피 찾아가는 것은 몬스터 웨이브가 종료된 후에나 가능했다.

바스톤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마을과 도시가 불릿의 도움을 필요로 했었다.

그러니 마수의 숲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우락크를 찾아 헤매기보단 몬스터 웨이브를 끝낸 후 찾아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브룩 남작.”

“예, 각하.”

“내일까진 본인과 흙덩이는 휴식을 취할 것이니 뒷수습은 자네가 알아서 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시간에 뵙도록 하지요.”

신하된 자로서 윗사람의 방문에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불릿이 팔을 뻗어 붙잡았다.

덥석.

“…? 왜 그러십니까?”

“그게 말이지…. 어흠.”

잠시 헛기침을 하던 불릿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을 뱉었다.

“식사는 내 흙덩이와 알아서 할 터이니…, 어흠.”

“……아, 예.”

“흠흠. 흠흠흠.”

이건 체력과 정령력의 회복을 위해서이지 절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거듭 위안 삼는 불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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