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1 몬스터 웨이브 =========================================================================
상황이 암울하다하여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남들 위에 선 자의 책무였기에.
출정준비를 위해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레너드 자작을 비롯한 군인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가신들이 참가한 상태였다.
마침 무언가를 정하기엔 좋은 자리였으니 불릿은 아크 체인에게 말을 걸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언제부터 시작될 것 같소?”
“1주일. 더 짧을 수도 있고, 마수의 숲은 지금이라도 습격당할 수 있을지도.”
말이 짧은 아크 체인의 대답이었으나 본래 그의 말투가 이러한 것이었으니 이점을 지적해봤자 시간낭비였다.
그의 말을 들은 불릿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알던 몬스터 웨이브가 아니라 흑마법사의 전술이 녹아들었을 가능성은?”
“…잠시.”
이 물음에 아크 체인은 10분이 넘도록 고민했다. 그의 대답이 지체될수록 회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무거워져갔는데, 30분 째가 되어서야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가능성 높음. 본령과 토의 후 답 주겠음. 3일후. 그럼 이만.”
저벅저벅.
드드드, 철컥.
아크 체인은 자기 할 말만 하고서 곧바로 문을 밀고 나갔는데, 그가 열기 힘들어하자 문을 지키던 병사가 열어주니 채 열리지도 않은 문에 몸을 디밀고서 나가버렸다.
“저, 저저….”
“이래서 요술쟁이 놈들은, 쯧.”
“예의가 없습니다, 예의가.”
대부분이 귀족출신인 가신들의 눈엔 그런 그가 천박해보였으나 방금 전에 말싸움을 하던 자신들의 모습은 생각지 못하는 듯했다.
“…3일 후 다시 모일 것이다. 그가 답을 가져오지 않는 경우 오늘 이 시간부터 1주일 안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칠 것이니 전쟁준비를 하라. 사무예드?”
불릿이 더 이상 답이 나오질 않는 회의를 일찍 끝내려하자 수행원직이 처음인 사무예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크게 외쳤다.
“최고사령관께 대하여, 경례!”
“충성!”
저벅, 저벅.
호위인물도 다 물리친 채 홀로 복도를 거니는 불릿.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어떻게 이런 경우가 가능한 것이지?’
일부 지역에 한정하여 몬스터를 조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비록 많은 시간과 돈이 소모되지만 흑마법사는 마계의 마족도 소환할 만큼 마기를 다루는데 익숙하기에 마기에 홀리는 몬스터를 사역하기란 쉬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전 대륙, 그것도 동시에 그 누구도 미처 대비하지 못할 정도로 몰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했으면 진즉에 저번 전쟁에서 써먹었을 것이고, 연합체는 패배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대체 왜?’
가신들이 불안해 할까봐 짐짓 강한 척 했지만 그 또한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흑마법사의 꼬리를 간신히 발견한 이때에 더 이상 전열에 서지 않기로 결심한 불릿이었는데, 시대는 또 다시 그에게 전투를 강요하고 있었다.
“씨발.”
목숨이 위태로워도 어지간해선 나오지 않던 쌍욕이 불릿의 입에서 터져 나오니, 그에게 말을 걸렸던 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유실리아, 마침 잘 만났다.”
불릿이 전시체제를 선포했으나 아직까지 모든 구역에 그 소식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최근엔 기사로서의 활동을 대부분 잠정 중단한 유실리아에게 이러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다가오자 불릿은 덥썩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어머.”
“올리비아와 흙덩이를 내 침실로 불러와라. 아무래도 몬스터 웨이브가 터진 것 같다.”
“네? 아직 1년이나 남았는데요?”
유실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질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으나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관련된 것 같다. 전시체제로 돌입했으니 어서 데려와.”
전쟁이란 말에 유실리아는 온순한 레이디에서 강인한 여기사로 자세를 돌변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아침도 거른 불릿인지라 복도에서 그와 마주쳐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전쟁이란 주제에 그녀는 어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나머지 여자들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불릿은 자신도 준비를 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끼이이…
“불릿이 셋을 불렀다!”
도도돗!
흙덩이가 요란법석을 떨며 들어서자 올리비아가 그녀를 혼내며 따라 들어왔다.
“욘석, 중요한 얘기니까 장난치지 말랬지?”
“셋이서 하는 거야? 앗, 넷이네? 헤헤.”
“작은아씨, 이번엔(?) 그런 게 아니에요.”
달칵.
셋이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 불릿은 침상에 걸터앉은 채 그녀들을 반겼다.
“일단 거기 앉아라. 흥분하면 안 되니까 차라도 들고.”
언제 준비해놨는지 불릿은 탁자에 홍차 네 잔을 준비시켜놨는데, 일반적인 담화는 아닌 듯 다과는 놓여있지 않았다.
“여긴 내 자리!”
흙덩이가 밝게 외치며 앉자 불릿을 포함한 나머지 셋도 의자에 앉았고, 차를 한 모금 들던 불릿이 입을 열었다.
“…유실리아에게 대충이나마 들었겠지만, 아무래도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난리도 아니던데.”
“막, 막 사람들 뛰어다녀! 누구 죽이려나봐, 엄청 무서웠어.”
올리비아와 흙덩이가 말을 하자 불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수비만 하고 끝나던 몬스터 웨이브가 아니다. 흑마법사가 개입된 순간 이것은 이미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흠칫.
“……너 설마, 또 싸우려는 생각은 아니지?”
불릿의 발언에 올리비아가 몸을 굳히며 물어오자 그는 차를 홀짝이는 흙덩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 벌써 군단을 넷으로 쪼갠 상태고,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면 나라도 손을 보태야….”
“안 돼에에에에!!!”
“…….”
“후르르, 켁, 푸헥, 콜록콜록!”
“작은아씨, 여기 뱉으세요, 퉤-, 하세요, 퉤.”
“콜록콜록!”
올리비아의 비명과 흡사한 외침에 흙덩이는 사례가 들렸는지 코와 입에서 붉은 찻물이 흘러나왔고, 유실리아가 그녀의 턱에 손수건을 받쳐주니 눈물을 글썽이며 홍찻물을 뱉어냈다.
“훌쩍! 올리비아 미워! 푸헹!”
“옳지옳지…, 잘하셨어요, 아이 착하다.”
“히잉, 훌쩍!”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비아의 충혈된 두 눈동자는 오직 불릿에게 향해있었다.
“전쟁을 하더라도 밑에 사람들 있잖아! 또 앞으로 나서거나 하지 마! 네가, 네가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나는, 난,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러며어어언!!”
“올리비아! 진정해!”
“네가, 오빠가 또 그러면! 난 죽는단 말이야아!!”
움푹 패였었던 볼에 살이 차올라 보기 좋아졌던 볼을 벅벅 긁어대니 손톱에 긁힌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랐고, 그런 올리비아를 불릿이 손을 낚아챘다.
탁!
“진정하라고 했잖아!”
“유, 유실리아, 올리비아 무서워.”
“괜찮아요, 오라버니가 있잖아요.”
“으응….”
“올리비아, 날 봐, 날 보라고! 난 여기 있어, 네 눈앞에!”
“싫어싫어싫어! 나가지마, 전쟁 하지 마!”
또 다시 그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다 나은 줄 알았던 올리비아의 광증이 수면위로 올라왔고, 불릿이 낚아챈 손목 대신에 몸을 껴안아줘도 도통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올리비아!”
“싫어싫, 읍!”
결국 입술을 입술로 틀어막자 충혈된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가 점점 원래의 동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푸하!”
“진정하라고 몇 번을 말해.”
“하지만….”
“올리비아.”
“응.”
불릿이 양쪽 어깨를 잡고서 몸을 고정시키자 올리비아도 그와 시선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오빠 못 믿어?”
“응, 못 믿어.”
비틀.
“크흠, 좀 믿어주지?”
“이게 벌써 몇 번째야? 매번 괜찮다면서 정신을 잃은 것만 세 번은 넘는다.”
“……크흠.”
올리비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깨를 붙잡은 것이지만 외려 불릿이 몰려가는 상황이 되자 그가 말을 돌렸다.
“이번은 다르다. 수천, 수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 게다가 마물까지 날뛴다면 조기에 진압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있지.”
여기서 말하는 마물이란 하급 이상의 등급이 책정된 놈들을 뜻했는데, 하급 마물이야 덩치가 워낙 크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중급 이상만 되더라도 체격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알 수 있는 방법으로는 사람의 몸이 찢기고 터져나가야 그 강함을 보고서 마물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그럼, 그럼 불릿은? 오빠는 죽어도 괜찮아? 오빠만 바라보고 사는 나는? 흙덩이는? 유실리아는 어쩌고?”
“……해야만 한다.”
“굳이 오빠가 나설 필요는 없잖아? 이런 상황에 써먹으려고 군대를 만든 거 아니었어?”
“그건….”
군대란 게 전쟁을 대비해서 존재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들 또한 사람이고, 가족이 있다.
불릿에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하위병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둘도 없이 소중한 피붙이이며 연인이기도 할 테니까.
그가 말을 흐리자 올리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흙덩이는 어쩌고? 쟤는 오빠 없으면 죽는단 말야! 제발 우리를 봐줘!”
“싸우지 마, 울지 마, 히잉, 훌쩍, 훌쩍….”
둘의 언성이 높아지자 흙덩이도 나쁜 분위기에 전염되어 슬퍼하기 시작했고, 유실리아의 안색도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해선 안 되지만, 오라버니가 전쟁에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실리아 너까지….”
“그리고 오라버니가 전쟁에 나선다는 말은 작은아씨도 그곳에 참가해야한다는 뜻이잖아요? 작은아씨는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녀도 데려간다.”
불릿이 정령력을 제대로 뽑아내기 위해선 흙덩이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젠 정신체만 존재하는 게 아닌,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연약한 인간의 몸인지라 자칫 화살이라도 잘못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었다.
불릿이라고 이러한 점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자기만 나서면 정령사라는 의미가 퇴색된다.
“불릿 오빠, 사람이 죽는 거, 당연히 있어선 안 될 일이야. 하지만.”
올리비아는 유실리아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흙덩이를 바라보다 시선을 옮겨 불릿을 직시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오빠가 지켜야할 사람엔 우리는 포함되지 않아? 우리가 저번처럼 되도 좋아?”
“절대 아니다, 내게 있어선 너희가 가장 소중하다.”
“그런데 왜 그래? 왜 자꾸 죽으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그러냐고!”
“이해해주면 안 될까?”
대영주란 위치, 그리고 중급을 넘어 상급일지도 모르는 정령사라는 존재.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무거운 짐이 되어 불릿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귀족출신인 올리비아가 모를 리 없었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전장에 제 발로 향하겠다는데 말리지 않을 여인은 없었다.
“제발 가지 말아줘. 불릿은 할 만큼 했잖아? 죽을 뻔한 위기를 대체 몇 번이나 넘겨, 응? 노블레스 오블리주? 적당히 해, 자기는 더 이상 홑몸이 아니라고.”
“옥체를 보중해주세요, 오라버니.”
“흐에엥, 불릿 죽지 마…나 두고 죽지 마….”
결국 흙덩이의 울음보가 터져버리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불릿은 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