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2 상처 입은 올리비아의 마음 =========================================================================
거리에서의 키스로 인해 너무 시선을 끌었다 생각한 불릿은 올리비아를 데리고 좀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올리비아는 불릿이 또 야한 짓을 하려는 줄 알고 가슴을 콩닥콩닥 거렸는데, 기대와는 달리 응응(?)을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번화가에서 외진 곳으로, 아이들이 주로 노는 놀이터가 있었다.
“꺄르륵!”
“네가 술래!”
“또 술래야, 체.”
“나 잡아봐라-!”
과연 중앙영지의 번화가답게 귀족의 자제나 부유한 평민계층이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단순히 아이들의 놀이터라고 하기엔 미적, 공간적, 심지어 방어적인 측면에서도 나무랄 게 없었다.
곳곳엔 납치를 주의하기 위해서인지 순찰병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불릿을 발견하고 흠칫하다 그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가에 검지를 가져가자 어정쩡한 자세로 멀어져갔다.
“불릿 오빠, 여기는 왜 온 거야?”
“흠, 위장을 위해서 오빠라고 부르는 것인가. 괜찮은 선택이군.”
“뭐야, 이 바보가.”
웬만큼 역사가 있는 가문에선 같은 가문의 남매라도 오빠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남들처럼 경어를 붙여 부르거나, 그도 아니면 최대한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 오라버니였다.
그러니 올리비아가 오빠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불릿이 누구인지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다 불릿의 얼굴이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지만.
연설을 제외하곤 젊어진 이후로 앞에 나선 적이 없으니 영지민들은 잘 모를 만도 했다.
“예쁜이가 오빠라고 부르면 실실 웃기만 하면서….”
“이곳에 오니 어떤가?”
대꾸는 않고 딴말만 하는 불릿에게 볼을 부풀렸으나 이내 시선을 돌린 올리비아가 감탄을 터뜨렸다.
“또 말 돌리기는…, 뭐어, 난 애들은 다 못생긴 줄 알았는데 여기 애들은 귀엽네.”
그녀는 놀이기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뱉었는데,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어릴 때가 가장 깨끗한 피부를 가졌다지만 저렇게 뛰어다니며 더러워진 상태에서 씻는 것을 싫어하고, 꾸미지 않는 아이들은 못생겨 보일 수 있다.
골격이 다 자라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고, 다 제쳐놓고서 가장 큰 이유는 그냥 평균 외모의 비율이 그렇다는 거다.
전부 다 예쁘면 예쁘다는 기준은 평범하다는 기준으로 하락될 테니까.
“내 젊을 적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 한번 데려와 봤다.”
“와, 불릿의 젊을 적? …? 뭔가 이상한데.”
이들이 격렬한 성교를 거치며 사랑을 키워왔다지만 그 외엔 아직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오자 올리비아는 호기심을 드러냈는데, 이곳에 그녀를 데려온 이유도 그것에 관해서여서 불릿도 시원시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거리구경을 하자곤 했지만 나는 그런 유흥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다.”
대영주의 자리에 오르고 20년, 그 기나긴 세월동안 불릿은 오는 여자도 마다하고 딱히 휴일을 가져본 적도 없이 오직 일만 해왔다.
취미라곤 독서나 기껏해야 산책. 가끔가다 어머니의 형상을 띠고 있는 물의 정령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물의 정령들이 그를 혐오스러워 했기에 장시간 볼 수도 없었지만.
“가끔 생각했지. 내가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내 아이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불릿….”
그것은 추억이라기보단 회고와도 비슷한 성격을 띠었다.
만약, 만일, 그랬다면, 그러면, 저들처럼….
또 다시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가족을 갖기를 거부한 이들이 흔히 보이는 망상.
고위귀족인 백작의 위를 가졌으며 대영주의 자리에 앉은 불릿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래서 더욱 결사대의 대원들에게 애착을 가졌을지 몰랐다.
평소 농담을 거의 안 하던 불릿도 그곳에서 만큼은 곧잘 농을 주고받았고, 때론 조언도 아끼지 않으며 분쟁과 화합을 조율해나갔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 그들은 죽었고 불릿은 가이아 여신의 은혜로 살아남았다.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외면하게 됐던 혼인에 대한 문제도 절로 해결됐으니 그에게 있어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흑마법사에 대한 복수와 장렬히 산화한 결사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릿의 남은 인생의 목표일 것이다.
꼬옥.
불릿이 추억에 잠겨들자 그녀는 그를 뒤에서부터 안아주었다.
이 때문에 불릿의 상념은 멈춰 섰는데, 올리비아는 약간 물기가 스며든 어조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행복할거야, 불릿의 아이인걸? 행복하지 않을 수 없어.”
“내가 아무리 자유롭게 풀어준다 하여도 주위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바포가의 혈족이 된다는 것을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올리비아를 안심시키면서 하던 불릿의 고민, 그것이 바로 이름의 무게였다.
부모의 이름에, 부모의 명성에, 또는 형제자매의 뛰어남에 눌려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던 귀족들을 불릿은 많이 보아왔다.
자신이야 얼마든지 아이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으니까.
“바보, 우리가 낳지 불릿이 낳아? 양육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까 불릿은 걱정하지 마.”
“…내 씨앗인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
붉으락…
“바, 바보야! 씨앗이라니, 그런 야한 말을….”
“음? 아, 이런.”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 선정적이란 것을 깨달은 불릿은 혹여 놀이터의 아이들이 듣진 않았을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호위하기 시작한 순찰병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흠흠.”
“휘, 휘-.”
그들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거나 땅을 툭툭 차는 둥, 딴 짓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모습에서 불릿은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끙.”
“…적당히 뿌려, 아무데나 농사지었다간 혼쭐을 내줄 거니까.”
“음?”
“…….”
씨앗이라는 표현에 얼굴을 붉히던 올리비아가 그것을 캐치해 말을 엮어내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불릿이 물음표를 띄우니 그녀는 입을 닫아버렸다.
자신이 아는 장소 중에서 그녀에게 보여줄 만한 곳에 데려왔는데,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지는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토토토톳-.
덥썩!
“불릿이다! 아하하하!”
“네가 여긴 어떻게…?”
여기저기 모래를 잔뜩 묻힌 흙덩이가 안겨오자 불릿의 눈동자가 동그래해졌고, 그때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유실리아가 등장했다.
“작은아씨, 어딜 가시는…아.”
“유실리아까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건가?”
“뭐, 뭐얏! 너희가 여긴 어떻게?!”
한창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던 찰나에 흙덩이와 유실리아가 등장하자 당황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커졌고, 자연히 아이들의 움직임도 멈춰 서게 되었다.
“얘들아! 우리 오빠야! 인사해!”
흙덩이가 팔을 들며 아이들을 향해 외치자 마치 군대라도 움직이는 것처럼 우르르르 흙먼지가 일었다.
“와아아!”
“변태 아저씨…가 아니네?”
“??? 형인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달려온 아이들이 불릿을 순식간에 둘러싸자 순찰병들이 그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놓기 위해 다가왔다.
처척.
“죄송합니다 각하, 즉시 아이들을 떼어놓고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움찔.
험악한 인상의 순찰병들이 다가오자 보호자라고 여겼었던 그들의 태도전환에 아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아찌 무셔.”
“뭐, 뭔갈 잘못한 건가??”
“피에릭 아저씨, 우리가 뭐 잘못했나요?”
이러한 놀이터에서 노는 것은 대부분이 10살 이하의 연령을 지녔고, 많아봤자 보호자격으로 따라붙은 12살 정도의 소년소녀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정도 나이면 충분히 불릿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냅다 허리를 숙였다.
“대, 대, 대영주니이임! 죄송합니다아아!”
“부, 부디 용서를!!”
“우아앙! 형아 왜 그래!”
“우, 울지 마, 훌쩍!”
“우에에엥….”
삽시간에 눈물바다로 변하는 현장에 불릿이 한숨을 쉬며 순찰병들을 노려보았다.
“자네들 장난하는가? 주의를 주려면 조곤조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던가, 다짜고짜 인상을 찌푸리며 위협을 가하면 아이들이 알겠냔 말이다.”
불릿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충성심을 알리려 했던 순찰병들은 반대로 당황하게 되었다.
“그게 아니지 말입니다….”
“저희는 각하께서 보다 원활한 암행을 위해….”
“암행? 무슨 개소리지 그건? 본인이 오랜만에 마실을 나온 것을 어떻게 해석하면 암행까지 도달되나? 위에서 전달사항을 받지 못했나?”
대영주라는 위치는 항시 보호와 감시를 받는 자리이다. 그래서 어디를 향할 때마다 가신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었는데, 그가 무슨 목적으로 밖에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 것은 순전히 순찰병들의 책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앞뒤로 달라붙은 여자들도 잊은 채 화를 내고 있었는데, 이런 그에게 쩔쩔매는 순찰병들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유실리아였다.
“불릿님, 이들에겐 잘못이 없어요. 저희가 여기에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전달사항을 받지 못한 것뿐인걸요?”
“여기 재밌어! 오빠야도 놀아!”
“으, 으음.”
유실리아가 그를 감싸는 이유엔 평민기사로서 병사들의 고충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었다.
“자기야, 그만 화 풀어.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응?”
“……흠흠, 오늘의 경우 개인적으로 마실 차 나온 것이니 개인 대 개인으로서 대하도록.”
한차례 헛기침을 뱉은 후 불릿이 용서해주는 말을 내뱉자 순찰병들은 유실리아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우렁차게 답하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으니 조용히 좀 하게. 올리비아와의 첫 데이트인데 다 망치고 있군, 쯧.”
“데, 데이트…?!”
펑!
올리비아는 데이트라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는데, 어느새 불릿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도 놓고선 안절부절 못했다.
“첫, 처음이란 말이지…? …우후훗, 역시 내가 처음이었어.”
첫 경험, 첫날밤, 첫째부인…그리고 첫 데이트까지.
올리비아는 불릿의 처음을 자신이 가져간다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녀가 음흉한 미소를 띠자 울음을 그친 아이들이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언니 이상해.”
“왜 혼자 웃어?”
“린, 그러면 안 돼, 어머니께 혼난다고?”
“잉, 어째서?”
“대영주님의 피앙세시란 말이야.”
“헉, 결혼해? 뽀뽀도?”
여자아이가 놀란 음성을 보이자 주변의 아이들도 여아에게 동조했다.
“누가누가? 뽀뽀 누가해?”
“저 언니가 대영주님이랑 뽀뽀한대!”
“근데 대영주님이 누구야?”
“이 바보들아, 저분이 바로 우리가 사는 바포 변경백의 주인, 불릿 폰 바포 백작님이시잖아!”
아이들의 바보 같은 대화를 참다못해 여기선 큰형님 격인 13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외치자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으앙! 잘못했어요!”
“자모해쪄요!”
“용서해주세요!”
덜덜덜덜-.
단번에 겁을 집어먹은 아이들이 바닥에 엎드리며 대성통곡하자 불릿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후우….”
결국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군지 밝혀지자 원하지 않던 반응이 나왔고, 놀이터는 난장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