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드러나는 실체 =========================================================================
카텐령의 국경선으로부터 반나절,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는 불릿이 흑마법사로부터 공격당한 지하공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엔 아예 작정을 했는지 중앙영지에서 끌고 온 제노시스 휘하 천여 명의 병력이 막사까지 지어가며 경계를 섰고, 불릿은 일부 병력이 마탑지부의 마법사들과 내려가 하루의 시간동안 위험요소가 없는지 조사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지하공동으로 들어섰다.
뚜벅, 뚜벅.
또옥-
“앗, 차가.”
불릿과 함께 지하공동을 둘러보던 흙덩이는 천장에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에 목을 움츠렸는데, 그녀의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덜미는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함께 묘한 색기를 흘리고 있었다.
“자기얌, 위에서 물 떨어져.”
“물이라고…?”
스윽.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말대로 천장의 일부분엔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뭐지? 물이 맺힐 수 있다고?”
나무한그루 없는 지상보다 지하가 더 시원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러나 불모의 황무지의 땅은 수분을 머금지 못하는 악질적인 토질을 자랑했기에 돌로 이루어진 공동이라 하더라도 이런 현상은 말이 되질 않았다.
철그럭, 철그럭.
“각하, 저것은 깨끗한 물이오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깨끗하다고? 조사보고서엔 들어있지 않았는데?”
이전과는 다르게 풀 플레이트 메일로 완전무장한 셰실리코프.
한여름의 불모의 황무지에서 이런 무장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천인대, 즉 대대라 명한 부대와 함께 이동하면서 장비를 따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셰실리코프는 물론이고 지하공동의 주변을 빈틈없이 메운 병력들 모두가 이러한 복장을 취하고 있었으니 불릿이 얼마나 단단히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송구합니다, 각하. 위험성이 배제되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누락되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지난날 여기서만 백 명이라는 정예병이 와치의 비명에 의해 죽었었다.
불릿이야 가이아 여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종기사로 내정됐다한들 기본적으로 그들은 병사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기에 미천한 마나로 인해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했다.
가뜩이나 인재부족에 시달리는 변경백이었기에 불릿의 이러한 조치는 돈은 소모되더라도 안전성 하나만큼은 보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베르, 본인에게 보고하지 않은 사항이 더 있는가?”
불릿의 부름에 연신 디텍티브라는 탐지마법을 펼치고 있던 자베르가 마법을 거두고서 다가왔다.
“안심하시지요. 그 외엔 누락된 사항은 없습니다.”
“안심하라니, 농이 지나치군.”
“…예?”
불릿이 손을 한번 휘젓더니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불모의 황무지에 생명이 살 수 없는 이유는 수분을 머금을 수 있는 지역이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하라곤 하나 이곳엔 또렷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물방울이 맺히고 있다.”
“…아! 그렇군요!”
“자베르, 카텐령이라는 외진 지역에서 지내느라 감이 떨어진 것인가? 본래 마탑의 지부장은 다들 그러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명백한 그의 실수였기에 자베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흙덩이가 아니었음 또 다시 지나칠 뻔했군.’
불릿이라고 이걸 미리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흙덩이의 귀여운 반응이 아니었더라면 그도 무심코 지나쳤을 만큼 별것 아닌 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별것 아닌 부분이라도 이곳은 흑마법사가 은둔하던 공간, 사소한 점 하나라도 놓쳐선 아니 되었다.
문득 이런 흙덩이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가 파닥파닥 손짓을 했다.
“헤헤, 불릿이 쓰다듬어준다.”
“약간 쌀쌀하군.”
추위를 느낀 불릿은 자신의 옷가지를 추스르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흙덩이에게 눈길이 갔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입혀주었다.
“입으렴, 여자는 항시 몸을 따듯하게 해야 하는 법이니까.”
“불릿 냄새, 킁킁. 히-.”
그의 가슴에나 간신히 닿는 작은 체구의 흙덩이였기에 불릿의 외투를 입자 몸 전체가 가려질 정도였는데, 그런 그녀가 냄새를 맡아대자 불릿은 흙덩이에게 부탁을 했다.
“흙덩아, 주변에 수맥이 있는지 확인해주겠니?”
“수맥이 뭐야?”
“물이 흐르는 길, 아니면 물이 고여 있는 곳. 이해하기 어려우면 그냥 물이 많은 곳을 찾아주면 된단다.”
“그것만 하면 돼?”
흙덩이가 외투로 가려진 손을 뻗어오자 불릿은 그것을 꼭 잡아주며 말을 이었다.
“대지의 기억으로 놈들이 여기서 무얼 했는지도 알려주고, 아. 그건 마법사라고 하는 아저씨들한테 알려주렴. 기록이란 걸 해야 하거든.”
“잉, 흙덩이 바쁘네?”
“오늘만 고생해주렴.”
“알았어! 헤헷!”
그 말을 끝으로 불릿은 고개를 돌리며 자베르와 옆에 조용히 서있던 행정관을 쳐다봤다.
“잘 들었겠지?”
“문서화하여 기록, 보관해두겠습니다.”
“흑마법사에 대한 연관성과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었는지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행정관은 4급의 직급을 지닌 서기관으로, 이번처럼 중요한 일들을 기록해야할 때 불려 다니는 인물이었다.
비록 이우우스 1급 행정관보다 직급은 한참 떨어졌지만 그의 위치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고, 언제나 말이 없으나 모든 일을 빠트리지 않고 적어냈기에 믿을 수 있는 이만이 담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본인은 주변을 좀 더 둘러볼 테니 흙덩이와 함께 힘써보도록.”
“불릿은 같이 안 하는 거야?”
그의 말에 흙덩이가 불릿의 소매를 잡고선 놓아주질 않았다.
“바로 근처에 있을 거니까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단다.”
“마법사 싫어, 나쁜 사람이야. 바보멍청이. 내 몸에 손대는 변태들.”
“으, 으음….”
“작은아씨,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마법사 변태들, 흙덩이는 다 기억하고 있어. 마법사의 탑이라는 땅에서 내 몸 더듬고 가슴도 주물럭거렸는걸?”
그녀는 정령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불릿의 뒤에 숨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래봤자 아기 고양이처럼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이토록 거부감을 보이니 불릿도 그녀를 떼어놓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놀러온 것이 아니었고, 지난 시간처럼 어영부영 보내다간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불릿은 흙덩이와 눈높이를 맞춰주며 입을 열었다.
“아가, 우리 아가. 내 소중한 아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이번만큼은 싫더라도 해줄 수 없겠니?”
“자기는 내가 변태들한테 만져져도 좋아?”
그녀가 불안에 떨자 불릿은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자베르가 그런 짓을 한다면 마탑은 대륙에서 사라질 것이다.”
웃으며하는 말이었으나 자베르는 불릿의 발언을 쉬이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진심이다, 농이 아니야.’
대놓고 화를 내는 것보다 저렇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 더욱 무서운 법이다.
불릿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흙덩이까지 잃어버릴 뻔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가 보여주는 웃음과는 별개로 뒤편으로는 정령력을 끌어올리기라도 했는지 위압감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각기 호위, 경계임무와 조사를 해나가던 인원들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단 자신의 착각이 아님을 깨달은 자베르는 한층 더 몸을 수그렸다.
‘지적을 당하다니, 부끄럽기 그지없군.’
그것 외에도 명색이 골드등급의, 자랑스러운 게이트웨이학파의 마법사가 불모의 황무지의 특성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점은 부끄러워할 만했다.
‘그렇다곤 해도 마탑을 상대로 저런 광오한 말을 내뱉다니, 걱정도 된다.’
군주가 자신감이 있는 것은 좋지만 마탑을 상대로 없앤다니 어쩌겠다니 하는 말은 자칫 위험한 발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자베르가 불릿에게 호감이 있고, 또 미안한 감정도 있기에 참고 있어서 다행이리라.
“알겠지? 내가 말한 거.”
“응! 수맥 찾기, 흙인형 만들기, 또, 대지의 기억으로 인형놀이하기, 또….”
비슷한 말이 몇 번이고 나왔지만 아직 말이 익숙지 않을 뿐, 영특한 흙덩이라면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했기에 걱정을 접었다.
“흙덩아.”
“웅?”
츄르릅, 츄릅-
“흐응, 하아아….”
흙덩이의 혀를 빨아가던 불릿, 그는 진공이 풀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복숭앗빛 혀를 풀어주면서 이마에도 짧은 키스를 해주었다.
“흐에에?”
“열심히 일하면 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따 저택에 돌아가서 보자.”
“아저씨, 빨리 가자! 일하자, 일!”
“그렇게 늙은 것도 아닙니다만….”
“빨리!”
“알겠습니다, 작은아씨. 백작님, 그럼 나중에 뵙지요.”
“음, 고생하게. 자베르, 서기관.”
흙덩이에게 손을 흔들어준 불릿은 뒤로 돌아 놈들의 서적이 발견됐다는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뚜벅, 뚜벅.
“흐음.”
설마 불모의 황무지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무언가 대단한 물건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불릿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책을 뒤적였는데, 하나같이 흑마법과 관련된 서적과 그간 전쟁과 관련된 첩보 등을 제외하면 건질 만한 것은 보이질 않았다.
펄럭펄럭-.
“무슨 땅속에 굴을 파서 이동하고 다니는지, 이래서 쥐새끼들이란.”
보고에 따르면 이곳은 이동통로중 하나일 뿐이었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뻗어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이동할 수도 없는 것이 그 통로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고, 설령 위험이 없다 하더라도 광활한 불모의 황무지에서 얼마나 걸어야 다음 목적지에 닿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도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곳에 숨어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펄럭, 펄럭.
그래도 이러한 조사를 멈출 수 없는 것은 대륙을 가로질러오며 불릿이 보았던 놈들의 행적 때문이다.
비록 금방 토벌되는 하급의 마물이라지만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었고, 자신의 영토만 하더라도 놈들이 수작을 부린 흔적이 보였다.
게다가 얼마전 자신은 직접적으로 목숨의 위기까지 겪지 않았는가?
이렇게 당하고서도 가만히 있다면 불릿이 아니다.
멈칫.
“백지?”
심드렁하게 페이지를 넘겨가던 불릿은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을 멈추고 있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장이 있었는데, 온갖 글로 빼곡하던 이전 페이지와는 확연히 차이 났다.
그는 백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책을 덮고서 제목을 확인했다.
「72악마군주 ‘여신’ 아스타로트(Astaroth)」
“……? 여신?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봐 미친 소리를 잘도 적어뒀군.”
흑마법사와의 전쟁에 참여한 이들, 그 중에서도 결사대의 일원들만큼 마탑을 제외하고 흑마법사를 잘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72악마군주의 아스타로트는 지옥이라 불리는 마계의 마족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족들을 의미하는데, 마왕을 제외하면 이들을 상대할 이들은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마계에서 강력한 권세를 자랑한다.
흑마법사들은 그들 중 하나라도 중간계, 즉 인간계라 불리는 이곳에 72악마군주를 소환하려 애를 썼는데, 온갖 피의 제물을 바쳐 소환에 성공한 이름 모를 마족에 의해 결사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 불릿은 마족도 소멸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온전한 힘을 가지고 소환된 악마군주만큼 무서운 놈들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