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7 드러나는 실체 =========================================================================
불릿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번쩍 들리는 손.
그 중에서 누구를 고를까 고민하던 불릿은 이우우스에게 권한을 넘겨주었다.
“자네가 고르도록. 어차피 다 들어봐야 할 것이니.”
“예, 대영주님. 레너드 자작에게 발언을 허한다.”
이우우스의 말이 떨어지자 레너드 자작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거늘, 바쁘다는 핑계로 각하를 지켜드리지 못하였나이다!”
사실상 변경백의 제 2인자가 된 레너드 자작의 사과에 불릿은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됐네, 본인의 고집으로 돈 몇 푼 아껴보자고 일을 벌이다 생겨난 사건이었으니 말이야.”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각하.”
아무리 불모의 황무지 개간에 불릿이 필수 불가결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정예병력으로만 그의 호위를 맡긴 것은 군단장인 레너드 자작의 탓도 적지 않았다.
군단장이란 직위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지를 파악할 줄 알아야 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조사와 병력분배에 모든 신경을 쏟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럼 그에 대한 것은 이번 흑마법사의 잔당을 토벌하며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윗사람이 괜찮다고 하여 진짜로 괜찮은 줄 아는 자는 사회생활을 못하는 얼치기일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이고 되뇌이는 레너드 자작이었고, 불릿의 말을 통해 그는 자신이 시험대에 올랐었단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렇듯 불릿은 너그러운 군주이면서도 가신들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와 주의를 주어야 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만 행동할 수 없는 자리, 그것이 바로 군주인 것이다.
“유실리아는 딸 낳을 거야, 아들 낳을 거야?”
“부끄럽게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작은아씨….”
“그래야 올리비아한테 다른 걸로(?) 낳으라고 하지.”
“…불릿님을 닮은 씩씩한 아드님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여자들과 노닥거린다고 하여 얕보다간 큰코다칠 것이다.
아마도.
“크흠!…유실리아?”
“어머, 들으셨어요?”
화들짝 놀란 유실리아가 입을 가리며 묻자 불릿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취했다.
“…이따 밤에, 알겠나?”
발그레.
“네에…….”
“흙덩이도 같이해?”
“……유실리아는 긴 밤이 좋나, 짧은 밤이 좋나?”
불릿이 이런 걸 묻는 이유는 흙덩이의 치유능력이라면 밤새도록 응응(?)을 할 수 있는 정력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유실리아도 알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붉어지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였다.
“………긴 밤……이요…….”
“들었지, 흙덩아?”
그리고 이 모든 대화는 흙덩이가 불릿의 무릎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했다.
“헤헤, 재밌겠다.(?)”
다리를 흔들거리며 방실방실 웃는 흙덩이의 모습에 심각해지려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붕 떠버렸다.
“대영주님, 그냥 내일로 날을 잡을까요? 급하시면 저희가 회의실에서 나가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크흠.”
이우우스 행정관의 물음에 유실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손사레를 쳤고, 불릿은 뭔지 모를 의미의 기침만 뱉었다.
그의 말을 해석하자면 자꾸 이런 식으로 대화의 흐름을 끊어놓을 거라면 이 자리에서 수십 발을 빼고(???) 내일쯤엔 현자모드(….)가 될 테니 그때 냉정을 유지한 채로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다.
“흙덩아, 쉿.”
“쉿, 히히.”
“유실리아도, 쉿.”
“네…쉬잇….”
어린애도 아니고, 아, 흙덩이는 제외. 나이상 따지면 어린아이가 맞으니까.
불릿과 유실리아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러한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야 조용해졌다.
“커허험! 이번 사건을 통해 후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에 그러는 것이니 가신들은 오해 말도록.”
변명 같은 말이었으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가신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주일이 넘으면 참기 힘들지.”
“몰아서 하면 평소보다 더 많이 하더라.”
“출장 갔다 오면 아내가 더 예뻐 보이지 말입니다.”
웅성웅성.
회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으나 불릿과 관련된 주제였기에 딱히 말리는 인물도 없었다.
다소의 소란이 있은 후 점차 줄어든 잡담. 더 이상 말을 꺼내는 이가 없자 불릿이 입을 떼었다.
“이것들이 내가 죽다 살아나니까 빠져가지고….”
레너드 자작이 군단장이라면 불릿은 군대의 가장 높은 사람인 최고사령관이었다.
“…….”
“…….”
조용함을 넘어 적막할 지경이 되자 불릿은 만족했는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어갔다.
“세스터스 백인장.”
“…….”
“세스터스 백인장?”
“…….”
“라체나 대원 세스터스, 못 들었는가?”
“…….”
불릿의 부름에도 답하질 않자 그가 4번째로 부르려는 순간 레너드 자작이 대신 반응하였다.
“각하, 세스터스는 어제부로 백인장의 자리에서 내려왔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본인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불릿은 라체나의 기사들을 가신들 중에서도 중히 여겼다.
대영주 직속 기사단이기도 하며 비록 유명무실해지긴 했으나 신생 라체나가 새로이 탄생하려는 이때, 예전부터 라체나의 단원이었던 그가 있으면 좀 더 원활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기에 그렇다.
그런데 자신의 기억에도 없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자신의 임무에 소홀하고 각하의 목숨을 빌어 명을 연명한 바, 그에 대한 책임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조치했습니다.”
“군단장이 내린 명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그때 흑마법사와의 전투는 불릿이 잘못한 점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크레파토스와 세스터스가 잘했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지휘관들 중 그 누구도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이가 없었는데, 불릿은 자신이 선택 때문에 그리됐다 여겨서 그냥 넘어가려고 생각했었다.
헌데 저렇게 콕 집고 넘어가려니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스터스는 본인의 돌격명령에 의해 지하로 내려갔던 것이네. 다른 벌을 주더라도 직위는 복권시켜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각하, 각하의 목숨이 위중했나이다. 이건 대립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으으음….”
“토벌이 될지 전쟁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좀 더 내실을 튼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의 레너드 자작을 기억하기에 가신들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불릿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결코 뜻을 굽히려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군단장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불릿은 천천히 입을 열어 이에 답했다.
“불가. 그를 복권시키게.”
“각하.”
“단, 셰실리코프와 마찬가지로 큰 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현재의 직위에서 승진은 불가하다.”
“연유를 알려주셔야 다른 가신들도 납득할 것이옵니다.”
불릿이 으름장을 놓긴 했으나 충분한 이유가 없이 일을 강행시키면 가신들 사이에서 불만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사전설명은 매우 중요한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무릎에 앉아서 졸다가 품안에 파고들며 새근새근 잠든 흙덩이의 머리를 고양이처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스윽… 스윽…
“흠, 셰실리코프가 본인을 보호하지 못한 이유는 크레파토스와 세스터스가 발목을 잡아서지.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를 대자면 과인이 잘못된 명령을 내려서이다.”
“…각하, 그들이라면 충분히 흑마법사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셰실리코프가 돌입하자마자 놈들 중 하나를 처단했다하지 않습니까?”
“허허, 레너드 자작, 자네는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자꾸 헛도는 분위기인지라 레너드 자작이 이를 지적하자 불릿이 눈을 빛냈다.
“대륙 전역의 마법사와 정령사의 수준이 한 단계씩 하락한 이때에, 전쟁에서 패배한 흑마법사가 고위소환술인 커스 오브 나이트(curse of night)를 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
“뭔가 있다. 단순히 흑마법사의 잔당이 있는 것이 아니야.”
“그 말씀은…?”
“놈들이 대륙 마법사와 정령사들의 질을 낮췄건, 아니면 자신들만 그 영향에서 벗어났건 간에 무언가 뒷배경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고위마법을 그토록 짧은 순간에 시전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셰실리코프의 수준은 소드익스퍼트 상급, 게다가 검술실력은 단연 으뜸이라 할 정도로 높디높았다.
그런 이를 상대로 단순히 흑마법사 한 명의 목만 내주고서 빠르게 시전한 소환마법.
소환마법은 쉽지 않은 학문이었고, 그 중에서도 여자악령 와치를 소환하는 커스 오브 나이트는 상위에 놓인 소환술이었다.
만약 개나 소나 흑마법사란 이유로 커스 오브 나이트를 시전할 수 있었다면, 전쟁의 향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땅을 지켜야한다. 다른 군벌들로부터 힘을 빌린다한들 그건 빌린 힘일 뿐이다.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알 수 없는 것들이지.”
불릿은 주변을 슥 둘러보고서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라체나의 기사이자 경험이 풍부한 세스터스를 빼놓을 순 없다. 그리고 본인은 세스터스가 필요한데 자네들이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아줄 수 있는가?”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선임기사였던 벤젼스가 천인장을 맡는 마당에 대체 어디서 누구를?”
“…….”
현재 중앙영지를 지키는 이는 천인장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속한 벤젼스가 대표였다.
그런 벤젼스도 라체나라는 불릿의 직속기사단에선 선임기사에 불과했으니, 현재 바포 변경백은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큰 죄를 지은 게 아닌 이상 써먹을 수 있는 인재는 사용해야하는 것이 현실인 바포 변경백이다.
“본인은 세스터스를 복권시킬 것이다. 그리 알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레너드 자작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당장 세스터스를 대신할 인물을 찾기란 요원했으니까.
“그리고 내일은 쥐새끼들이 숨어있던 지하공동을 조사할 생각이다. 본인이 직접 방문할 것이니 채비를 해두도록.”
“각하,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재고가 필요한 사항입니다, 대영주님!”
“대영주님,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곳을 다시 방문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각 가신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말리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며 불릿의 입과 손이 되어야할 이우우스까지 한손 보태자 그는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니까 자네들이 먼저 그곳을 방문해 위험요소를 제거하란 말이다! 설마 간신히 발견한 놈들의 흔적을 이대로 내버려둘 생각인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란 말이다, 생각을!”
매번 불릿이 앞장서서 일을 처리하니 가신들은 자신들이 함정이나 위험한 존재가 없는지 확인할 생각을 못했고, 답답한 나머지 불릿이 호통을 치자 달구어지던 회의실은 또 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이번엔 철저한 준비과정과 조사를 한 후 방문할 것이다. 뭔가 내놓을 만한 증거가 있어야 다른 세력들로부터 힘을 빌리건 말건 할 게 아닌가!”
꼬리를 밟았으니 몸을 누를 차례, 그러기 위해선 증인이 아닌 증거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목소리를 잘 높이지 않던 그가 호통까지 치자 그의 품안에 잠들어있던 흙덩이가 잠꼬대를 했다.
“우웅, 오빠….”
“아, 흙덩아…읍.”
“쪼옥, 쪼옥, 쪽….”
“어머.”
한창 열을 올리던 와중에 흙덩이가 불릿의 목을 끌어안더니 혀를 빨아당기자 유실리아는 눈을 가렸고, 불릿은 들어 올렸던 팔을 내려놓다가 살며시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쪼옥, 츄르릅, 쪼-옥.”
낼름낼름, 후루룩, 쪼옥…
불릿에게 혼이 나던 가신들은 그 광경을 보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레너드 자작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소리를 죽이고 자리를 비켜주고 있었다.
“후릅, 츄르릅- 쪼옥쪽쪽.”
아무래도 잠꼬대는 아닌 듯한 흙덩이였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