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4 그곳에 정령은 없었다 =========================================================================
“어째서 진명을 알아선 아니 됩니까? 비록 지금은 정령이 아니라곤 하지만 정령사는 정령의 진명을 알면 더욱 강해지지 않습니까?”
불릿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의 소중한 아이, 그 아이는 정령이 아니에요. 그 틀을 쓰고 있긴 했어도 엄연히 살아 숨 쉬는 존재…, 그리고 그 아이가 그것을 바란 이유는 당신이 큰 자리를 차지하지요.”
움찔.
이유라는 소리에 불릿은 순간 흙덩이의 말이 떠올랐다.
‘불릿이 나는 안 된다고 했지만…, 이젠 나도 돼.’
“정령이라서, 안 된다고 했기에, 그런, 것인가.”
“네, 맞아요. 그래서 그 아이는 인간이 되고자 바랐던 것이지요.”
생글생글 웃고 있으나 어쩐지 저 시선엔 책망하는 의미도 들어있는 듯했다.
그녀의 대답에 불릿의 마음은 무거워졌고, 이번엔 당황함도 치워버린 채 질문을 이어나갔다.
“흙덩이가 진정 당신의 아이라면, 책임지고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어마, 뜨거워라.”
“장난이 아닙니다. 가이아 여신이여, 당신께서 저를 살려주신다면 세상 그 무엇보다 그녀를 우선시하겠습니다.”
불릿은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에 빠져든 것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놓였기에 신이 개입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토록 긴 시간동안 미약한 육체의 생명력으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불릿은 남의 정신세계에 쉬이 강림할 수 있는 대지계열 최고위 신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한 영토의 대영주가 내뱉는 고결한 맹세였으나 가이아 여신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당신의 곁엔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라는 어린 인간여자들이 있지 않나요?”
“으으음….”
방금의 맹세를 빗대자면 흙덩이를 최우선으로 해야 했기에 그녀들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아예 사랑하지 말아야 했다.
허나 그것은 불릿 본인의 맹세와도 어긋나는 점, 살아나야 한다는 강박감에 말을 잘못 내뱉은 것이다.
“어때요, 그녀들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나의 가녀리고 소중한 아이를 위해서?”
“그것은…, 올리비아는, 유실리아는….”
“버려요, 그러면 살려줄 수 있어요.”
눈에 띄게 흔들리는 동공. 매우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기에 불릿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의 추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불릿의 입을 통해 나온 대답.
“죄송합니다, 그녀들 또한 소중한 아내들, 그들을 버린다면 흙덩이 또한 슬퍼할 것입니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하기에요?”
“죄송합니다.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털썩-.
툭.
시종일관 당당함을 보여주던 불릿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가이아 여신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빼버렸다.
“어린 인간여자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대로 죽을 것이고, 그 아이는 다시 저의 품안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래도 괜찮단 말씀이세요?”
까드득….
“마지막으로 의식이 돌아왔을 때 흙덩이가 아프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디 그녀를 치료해주시길….”
끝끝내 회유를 거부하는 불릿의 모습에 가이아 여신의 주변으로 신력(神力)이 소용돌이쳤다.
쿠구구구구-!
대지의 여신답게 대지가 미친 듯이 흔들렸는데, 마치 그녀의 분노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렇게 불릿은 가이아 여신의 처벌만을 기다렸는데, 어느 순간 지진이 멈췄다.
“후훗!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에요! 나의 소중한 아이를 책임지려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호호, 일단 일어나세요. 얍.”
둥실.
“어엇!”
그녀의 손짓에 불릿의 몸이 절로 떠오르더니 자세가 바로잡아지며 제자리에 반듯하게 섰다.
이에 따라 숙여졌던 고개도 올려졌는데, 불릿의 시선엔 흙덩이와 빼닮은, 그러나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가이아 여신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방금 시험을 통과하셨답니다?”
“시험…말입니까?”
“우후훗.”
영문 모를 웃음을 보여주던 가이아 여신은 천진한 소녀처럼 손을 허리 뒤로 모으고서 가슴을 앞으로 모았다.
출렁-.
“…크흠.”
흙덩이와 쏙 빼닮아서, 아니. 흙덩이가 가이아 여신을 빼닮아서 그런지 불릿의 정신은 그녀와의 불타는 성교가 떠올랐고, 그걸 감지한 것인지 가이아 여신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야한 것도 좋지만, 저는 장모라구요?”
“커험, 죄송합니다. 흙덩이와 너무 비슷하다보니….”
“아니에요. 그만큼 우리 아이를 사랑해주신다는 거겠죠? 우후훗!”
불릿의 얼굴이 벌게지는 게 재밌던지 놀려먹던 가이아 여신은 화제를 전환했다.
“불릿은 그 아이가 진짜로 정령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질문하신 의도를 짐작하진 못하겠지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상급 마정석을 흡수하면서 인간으로 변한 게 아닙니까?”
“세상의 법칙이 그리 쉽게 변하진 않는답니다.”
‘무슨 소리지?’
분명 최상급 마정석이 사용된 마(魔)의 꽃방울을 흡수해서 벌어진 인간화였다.
그게 아니라면 계기도 없고 원인도 없었기에 뭐가 이유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가이아 여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 아이는 신격을 하락당한 신의 아이랍니다. 본래부터 살아 숨 쉬던 순수 인간이에요.”
“…?!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분명 흙덩이는…!”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선 얘기를 이어갔다.
“그 아이는…어떻게 태어났는지는 생략해도 되죠? 호호. 아무튼 그렇게 태어난 아이까지 숙명이란 이름의 굴레에 가둬두기 싫었기에 신격을 격하시켰고, 다행히 불사의 저주는 풀 수 있었답니다.”
“죽지 않는 것이 어찌 저주라 하십니까? 지금 흙덩이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위태로운지 아시고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고서도 홀로 존재한다면 그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하지만 제가 최고위 신들 중 하나라지만 그러한 굴레를 벗겨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답니다. 덕분에 그 가엾은 아이를 정신체만 떠도는 정령이란 모습을 입혀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심연 깊숙한 곳에 봉인당한 아이, 세월이 지나 몸은 자랐어도 정신체는 따로 떨어져 나와 육체가 봉인된 인근을 부유했다.
봉인된 곳은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었기에 사람도, 정령도, 심지어 생명이란 것이 없었기에 언어는커녕 무언가를 배운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렇게 홀로 떠다니며 그저 존재하기만하는 흙덩이가 안쓰러웠던 가이아 여신은 때마침 마족소환의 순간을 발견했고, 그때의 대폭발을 이용해 불릿을 살려내면서 친화력을 땅속성으로 변경, 흙덩이와의 계약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도 모르는 흙덩이가 계약을 성립시킬 수 있던 거군요.”
“미안해요, 사위님. 그래도 우리 아이가 힘들게 하진 않지요?”
“물론입니다. 흙덩이를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릿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하자 가이아 여신은 살짝 홍조가 오르며 미소 지었다.
“후훗, 그래서 그 아이에겐 세상 모든 것이 다 처음이었고, 하는 행동이 어려보이는 것도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렇군요….”
대꾸를 하던 불릿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이번엔 자신이 질문을 가했다.
“흙덩이의 나이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봉인의 역사와 관련됐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알고 싶습니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에게(?) 부모가 몇 살인지는 알려주고 싶었기에 물었던 것인데, 예상외의 대답에 불릿의 정신이 나갔다.
“사위님이 우리 아이와 만났을 당시에 어떤 모습이었죠?”
“그야 여덟에서 아홉사…설마?!”
“거기까지 해두도록 해요. 철컹철컹?”
“…….”
‘미친!’
차마 신 앞에서 욕을 할 수 없었기에 속으로 삼키는 말이었으나 그것만큼 불릿의 심경을 대변하는 단어도 없었다.
가이아 여신이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세워서 핥퀴는 시늉을 했는데, 철컹철컹과 저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다면 불릿은 영계중의 영계를 키잡(?)한 것이 아닌가?
그동안 봉인되어 있었다고 하니 모든 것을 자신이 가르친 것이 되고, 그렇다면 이건 키잡(…?)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질 않았다.
“괘, 괜찮습니까? 나이차가….”
“어머, 귀족이면서 그런 걸 따지시나요? 곁에 있는 인간여자들만 하더라도 이제 갓 성년….”
“알겠습니다, 잘 키우겠습니다.(??)”
“후훗, 잘 부탁드려요, 사위님.”
원피스자락을 살짝 집으며 마주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흙덩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녀의 쌍둥이언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닮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가이아 여신은 애달픈 눈으로 불릿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사위님이 아는 한도 내에서만 말씀을 드릴 수 있어요. 그 외에는 안타깝게도 비밀이랍니다.”
“흑마법사에 대해선 제가 스스로 대처하겠습니다.”
“또 저번처럼 그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시면 안돼요?”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검지를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불릿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아, 잠시만, 한가지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이제 진짜로 시간이 없는데….”
“잠시면 됩니다.”
“뭔데 그러세요?”
상황으로 보건대 불릿의 육체를 살려놓으려던 것 같았으나 그는 방금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흙덩이는 정신체인 상태에서 육체를 가지게 됐다는 소린데, 그때의 상황과 마의 꽃방울은 왜 사라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래부터 육체를 가졌다고 한들 아무도 모르는 심연에서 불모의 황무지까지 한순간에 옮겨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원래 신체를 지녔다면 마의 꽃방울은 대체 왜 사라졌단 말인가?
그것만 있었어도 불릿이 마기에 의해 죽음까지 직면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나참, 그럼 그 먼 거리에 있는 육체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정신체와 융합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어요? 이 세상에 대가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답니다?”
“……설마 흙덩이가 하는 일들을 모조리 보고 계셨단 말입니까?”
“아차, 헤헷?”
잘못 말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콩 찧으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 가이아 여신에게 불릿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었어요. 사위님이 진정 우리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인지를, 그리고 육체를 가져올 수 있는 매개체가 와 닿는 순간을 노렸어야 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가이아 여신은 흙덩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시 보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불릿과의 응응(?)도 실시간으로 봤다는 뜻이 된다.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나 떠본 말에 저런 반응을 보이니 아마 맞을 것이다.
“우리 아이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글래머러스하지만 너무 많이 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명색이 신인 제가 보기에도 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구요?”
화아악-
말은 가이아 여신이 했으나 얼굴이 벌게지는 것은 불릿이었다.
“이제 진짜로 돌아가실 시간이네요, 사위님.”
지이잉-
주변의 백색공간이 요동치며 공명음이 울리자 불릿도 그것을 깨달았다.
“…흙덩이와 만나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우리 아이… 말인가요.”
가이아 여신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던 것은 그녀가 흙덩이를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과 봉인한 이후로 단 한 번의 만남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하기엔 이상할 정도로 제약이 많았기에 물어본 것이었으나,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원래 신들은 인간사에 개입해선 안 된답니다. 그것은 저라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굴레이고, 숙명이에요. 그래서 그 아이만은 이런 영원한 악몽…, 아하하. 겪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
최고위 신이라는 자가 스스로의 자리를 악몽이라면서 까지 싫어하는 모습에 불릿의 마음은 복잡 미묘해졌다.
“사위님이 흙덩이라 부르는 아이가 어른이 된다면, 그래서 저를 원망도 하고, 애타게 찾기도 하고, 그리고….”
점점 흔들리며 일그러지는 시야에는 눈물을 떨구는 가이아 여신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형태를 빌려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건 너무 가혹하잖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그 아이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지만 그들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할지 몰랐다.
그 누구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당신이 흙덩이라 부르는 아이를.”
“당신…, 장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도 됩니까?”
불릿의 물음에 이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신형이 일순 흔들렸다.
“제가 누군지는 알려주지 마시고, 사랑한다고만 전해주세요.”
“흙덩이를 대신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이이잉-!
불릿은 육체로 되돌아가기 직전, 슬피 우는 가이아 여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