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3 그곳에 정령은 없었다 =========================================================================
끼이익…
‘흙덩아….’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고 있는 흙덩이가 보였고, 그녀의 곁에서 땀을 닦아주는 하녀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하녀는 불릿이 들어서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불릿이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며 밖을 가리키자 어리둥절해 하다가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걸음으로 밖을 향해 나서던 하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불릿을 바라보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너무도 소중한 것을 만진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흙덩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달칵.
사르륵, 사르륵-
“아가, 흙덩아, 내가 왔어….”
사르륵-, 사르르륵-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약간 윤기가 적었으나 여전히 찰랑이는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병색이 완연한 흙덩이의 모습은 미소녀인 그녀의 미모를 한층 부각시켜주었는데, 불릿은 이런 흙덩이의 모습에 너무도 안타까웠다.
“으으응….”
껌뻑, 껌뻑.
“일어났니?”
“…부우…리…?”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을 간신히 열고서 확인한 불릿의 모습에 흙덩이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너무 애처로운 광경에 불릿은 아랫입술을 깨물다 꾹 참고서 그녀를 반겨주었는데, 여전히 흙덩이는 믿지 못하는 듯했다.
“헤…헤…, 나도…부리 겨트로(곁으로)…가나바(가나봐)….”
“흙덩아….”
주륵.
“보고 싶……, 오…빠…….”
“……그래.”
스윽, 스윽.
불릿이 눈앞에 있어도 진실로 믿지 못하는 흙덩이, 게다가 흐리멍덩한 눈동자는 초점도 맞지 않아 보였다.
더 이상 기다렸다가는 흙덩이가 먼저 죽을 판이었기에 불릿은 이불을 걷어냈다.
사르륵-.
“추…어….”
부들부들.
병마와 싸우는 통에 가뜩이나 체온이 상승한 터라 조그마한 환경변화에도 견디지 못하는 흙덩이.
그러나 불릿은 그녀의 옷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나가고 있었다.
스륵, 사라락.
“흐아아….”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오빠가 낫게 해줄 테니까.”
흙덩이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던 불릿이 웬일로 그녀의 말에 응답해주며 자신도 옷을 벗어나갔다.
풀썩.
바닥에 내던져진 옷가지들, 흙덩이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릿을 보며 밝게 웃었다.
“아아…불…릿이 보여….”
발음도 정확히 못하던 흙덩이가 또박또박 말을 내뱉자 불릿은 어떤 현상을 떠올렸다.
마치 노을이 사라지기 전 가장 아름다운 햇살을 발산하는 것처럼, 그녀도 위험한 상태라 판단한 불릿은 애처로워 보이는 흙덩이에게 함부로 손을 대기 싫었으나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응응(?)을 시도했다.
“사랑한다, 흙덩아.”
그는 가쁜 숨을 내쉬는 흙덩이의 혀를 빨아당기며 천천히, 그리고 애타게 하나가 되어갔다.
* * *
“누구냐!”
갑작스럽게 들리는 음성에 불릿이 소리치자 여성은 물러서지도 않고서 그에게 대답했다.
“장모님이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무슨…, 헛. 소리가…??”
이곳은 불릿의 뇌내세계, 즉 망상속이란 소리였는데 그래서 갖가지 상상이나 기억을 회상할 순 있어도 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목소리를 떠올리더라도 이토록 생생히 듣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불릿은 생각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현실감 넘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신의 힘이 개입했으니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어요.”
“신? 신이라니, 사신이라도 되는가?”
이미 자신은 죽었다 생각하는 불릿이었기에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었으나, 그의 말에 그녀는 웃음만 지어보였다.
“난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은 현실도 아니지. …사후세계가 진실로 존재했군.”
뭔가 혼자서 납득하는 듯한 모습에 여성이 혼잣말에 끼어들었다.
“저기, 사위님? 사위님은 죽으신 것도 아니고 여기가 사후세계인 것도 아닌데요….”
그녀의 말에 불릿은 힐끔 시선을 돌렸으나 다시 홀로 중얼거렸다.
“사람은 죽는 순간 주마등이 스친다더니 그것과 비슷한 건가? 그래도 흙덩이를 추억할 수라도 있으니…아아, 흙덩아, 미안하다….”
“저기 있잖아요? 저기요? 여보세요?”
“아아, 올리비아, 유실리아, 흙덩아…, 모두 미안해, 내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아예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한 불릿은 홀로 추억에 빠져들었고 자책과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려댔다.
비록 자신의 말을 듣진 않았으나 그가 그녀들을 얼마나 소중히 대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기에 여성도 잠자코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상에 강림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단연코 특이한 인간 첫손에 꼽힐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불릿이었으나,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정상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죽음을 받아들여 삶을 되돌아보는 자, 적어도 그녀가 봐왔던 인간들에게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후훗, 더욱 맘에 드는걸요?’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짓자 어둠으로 물들었던 세계가 환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기현상에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던 불릿도 흐느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의 동공은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무슨…?”
아무리 주마등이라지만 이건 조금 심한 변화였기에 불릿은 백색으로 변해버린 주변을 둘러보다 눈앞의 여성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애달파 보이는 눈, 가녀린 신체, 찰랑이는 머릿결, 그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과 존재감을 뽐내는 둔부까지.
허리라인으로 인해 더욱 강조되는 몸매였던지라 절로 눈길이 갔고, 그러면서 그녀의 미소를 보며 불릿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흙덩이…?”
“그 아이를 아껴주고 사랑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 누구냐! 쥐새끼의 끄나풀? 아니지, 정신에 관여할 정도면 수뇌부겠군! 네 이놈! 감히 내 머릿속을 뒤져!”
불릿이 자세를 취하며 공격할 태세를 보이자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던 그녀도 당황함을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저는 그 아이의 어….”
“이 쥐새끼! 핫!”
불릿은 들을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는데, 이는 올리비아에게서 배운 체술 중 하나였다.
간결하면서도 빠른, 그러나 확실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공격이었기에 올리비아가 불릿의 위에 타고서(?) 갖가지 비유를 대며 가르쳐줬던 것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펼쳐진 공격이었으나 그녀는 황당해할 뿐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않았다.
부웅-!
“헛?!”
자신의 공격이 그대로 통과, 목표물인 여자가 사라지자 불릿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살펴보고 있자니 그의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하아아, 조금 진정하시는 게 어떠세요?”
“거기냐!”
부웅!
또 다시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주먹질에 그녀는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서 가만히 있었다.
우웅-
멈칫.
“읏?!”
갑자기 동작이 멈추자 불릿은 사력을 다해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그게 되질 않자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이 몸을 건드려?”
“진정 좀 하세요. 무슨 짓을 하려고 했으면 벌써 하지 않았을까요?”
“…….”
‘냉정히, 침착하게.’
또 다시 육체에 휘둘리는 꼴을 보이던 불릿은 한가지 의문이 떠올렸다.
“…? 나는 죽었을 텐데, 어찌하여 이토록 쉽게 흥분하는 것인가.”
“후훗,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척.
그녀는 흙덩이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에 손을 얹더니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살아있으니 육체에 영향을 받는다, 너무 당연한 일이네요. 헤헤”
“……흐, 흙덩이?!”
순간 불릿은 소름이 쫙 돋았다.
“당신이 내 적도 아니고 이게 현실이 맞다면, 대체 무슨 현상이지? 게다가 그 모습은 영락없는….”
“맞아요, 당신이 흙덩이라 부르는 아이의 모습이기도 하죠.”
한차례 뱅그르르 돌던 그녀는 마저 말을 이어붙였다.
“제 모습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어떻게 흙덩이라는 거지? 놀리려는 생각이면 그만둬라. 난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코앞까지 마주한 불릿이기에 세상에 미련은 있어도 누군가의 수작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젊어진 육체에 휘둘리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 더는 자신과 관련된 이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기 싫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그녀는 더욱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장모님이라고 부르라니까요? 저의 소중한 아이를 데려가셨으면서 너무하시네요.”
“…으어?”
“그 아이의 순결까지 가져가셨으면 절 좀 더 소중히 대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의미모를 말이었으나 흙덩이와 관련된 주제였기에 불릿은 섣불리 말을 내뱉지 못했고, 그녀는 그런 불릿이 귀엽다는 듯 흙덩이와 같은 차림, 그러니까 새하얀 원피스자락을 살짝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위님. 저는 사위님이 흙덩이라 부르는 아이의 엄마랍니다.”
그녀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당시 흙덩이가 보여주던 애달픈 눈동자로 미소 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남들은 저를 가이아라고 부르지요.”
“가이아 여신?! 대지계열 최고위 신!!”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불릿이었다.
“우리 아이가 절 닮아서 좀 예쁘지요, 후후후.”
“서, 설마 그럴 리가?”
그냥 신도 아니고 최고위 신들 중 하나인 가이아 여신과 접신하게 될 줄은 몰랐었기에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가 등장함과 동시에 어둠이 사라진 것처럼, 백지장이 되어버린 머리로는 논리적인 사고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무, 어, 그게, 음, 자, 장모님?”
‘멍청하게!’
그토록 다짐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신과는 격이 다른 존재와 마주치자 심히 당황한 불릿.
그래서 얼떨결에 튀어나온 단어였으나 가이아 여신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바로 그거예요! 우리 아이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예, 별말씀을….”
‘응? 이게 아닌데….’
부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나 가이아 여신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너무 많이 하시는 건 아닌가요? 그 아이의 육체는 가녀리고 연약하답니다?”
순간 벌게지는 불릿의 얼굴. 그렇다고 장모되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순 없었기에 변명 아닌 변명을 꺼냈다.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냥 그, 사랑해서? 예, 사랑해서 그런 겁니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와, 설마 제 앞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실 줄은 몰랐네요.”
“헛,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는 불릿.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가이아 여신이 상징하는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가이아 여신은 대지의 여신, 대지를 딛고 살아가는 생물이라면 모든 생명을 사랑한다고 일컬어지는 신이었기에 그녀 앞에서 사랑 운운하는 것은 조금 실례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근데 실례지만 흙덩이는 대체 누구의 자식인지….”
아이를 낳으려면 응응(?)을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불릿이 묻자 대화시작 무렵부터 미소만 짓고 있던 가이아 여신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그 아이는 저의 마지막 남은 미련이랍니다.”
“미련…말입니까?”
그녀는 두 눈을 감고서 오른손을 자신의 윗가슴에 얹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숙명이란 굴레에 그 아이까지 얽매이게 하기엔 너무도 안타까웠기에 제 손으로 직접 신의 자리에서 격하시켰지요.”
이젠 미소까지 사라진 가이아 여신의 얼굴엔 애틋함, 간절함, 그리고…
“그 아이의 진명은 $%&^^&*, 나의 희망, 나의 소망, 나의 사랑….”
“자, 잠시, 진명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녀는 불릿의 물음에 다시 밝게 웃으며 이에 대꾸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사위님이 지어주세요. 신격을 버린 존재에게 진명을 되찾아준다는 것은 신의 위치에 되돌려놓겠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 작품 후기 ==========
월요일부터는 1일 1연재, 밤 12시에만 올라오게 됐습니다.
비축분이 줄어들기도 했고, 다른 문제도 있어 사정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완결까지는 문제없이 달릴 것이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계속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