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0 죽음 =========================================================================
불릿이 마기에 노출된지 9일째, 그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가신들은 밤을 새가며 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주변 영토에서 그에게 호의적인 이는 아무도 없었고, 투툰 후작과는 아직 만남조차 갖지 않았으니 말이다.
불릿이 머물고 있는 카텐령은 그의 여자들을 제외하면 횅하다 못해 썰렁할 지경이었다.
“불릿이 죽으면 어떡하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방법이 없어, 마정석도 못 구하고, 이대로라면 불릿이….”
중얼중얼…
올리비아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자폐증을 앓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영지에서 아일렌이 직접 내려왔으나 딱히 소용은 없었다.
“마님, 뭐라도 좀 드셔보세요.”
“여기 맛 좋은 과일이에요.”
탁한 눈동자를 지닌 올리비아는 그것을 스윽 바라보더니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떡해야하지, 불릿이 없으면 난 뭐가 남을까, 엄마아빠처럼 불릿까지 죽으면 난 어떡해야….”
그녀의 증상이 심각해보이자 참다못한 아일렌이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마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런다고 각하의 병세가 좋아지시진 않으세요!”
아일렌의 발언에 순간 올리비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불릿에 대해서 뭘 아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올리비아의 몸은 수수깡처럼 깡마르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보기 좋던 육감적인 몸매는 어디가고 언뜻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허리라인.
홍조가 보기 좋았던 두 볼은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머리는 미친년의 그것처럼 산발된 상태였는데, 흙덩이의 머리를 다듬어주던 정성은 내팽겨 친지 오래였다.
“마님, 제발, 마님까지 이러시면 각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아일렌의 간절한 부탁에 씩씩 성을 내던 올리비아는 이내 기운을 잃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불릿이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또 다시 샘처럼 차오르는 눈물에 아일렌은 물론이고 루나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님….”
아일렌이 그녀를 감싸 안자 올리비아는 이제 목놓아 울지도 못한 채 아일렌의 품에서 조용히, 그러나 처절하게 슬픔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시각, 흙덩이의 상태도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흐으으, 흐으으…….”
“작은아씨…, 어쩜 좋아….”
유실리아의 손길에도 흙덩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가쁜 숨을 내쉬며 조그마한 입술을 통해 헐떡임과 신음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었다.
유실리아라고 몸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번 흑마법사 습격사건 때 지하공동에 있었던 병사들은 모두 사망했고, 기사들 중에서도 경지가 낮은 이들은 아직까지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거동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의 뒤로는 저택의 하녀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유실리아는 흙덩이를 자신의 손으로 간호하고 싶다며 이를 거부했다.
“작은아씨, 힘내세요. 불릿님도 분명 이겨내실 거예요.”
“하아, 하아.”
유실리아의 응원에도 흙덩이는 가쁜 숨만 내쉬는 상태.
이대로라면 불릿은 물론이거니와 흙덩이까지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불릿이 복권한 이래 가장 불안정한 시기, 그래서 가신들은 최소한의 업무량만 소화하며 어떻게든 마정석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신전 쪽으로는 그동안 불릿이 펼쳤던 정책이 발목을 잡아 단번에 거절당했기에 오직 상급 이상의 마정석만이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스륵-.
유실리아는 흙덩이의 기다란 머리칼을 간질였는데, 평소 흙덩이는 불릿이 이렇게 머리칼을 간질여주면 대단히 좋아하며 그에게 어리광을 부렸었다.
하지만 유실리아는 불릿이 아니다, 그를 대신할 수 없다.
당장 그녀만 해도 불릿을 격하게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분의 품이 너무도 그리워….”
물기가 스며든 음성이었으나 그녀는 꿋꿋하게 참아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마저 슬픔에 잠식되면 정말 방법이 없었기에.
한 명이라도 제정신을 차리고서 불릿을 보필해야할 때였다.
그렇다곤 하나 마기가 골수까지 스며들어 약간의 충격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운 불릿의 침실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오직 자베르만이 하루 한번 들려선 각종 마법을 퍼부은 후 돌아갔는데, 문틈사이로 보이는 불릿의 모습이 짧게나마 그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올리비아는 오열을 했는데, 불릿이 자신의 울음소리에 충격을 받을까봐 차마 큰 소리로 울지 못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은 오히려 더욱 애달프게 보였다.
“유실리아님, 그러다 건강을 해치십니다.”
“…난 괜찮아.”
“하지만 벌써 며칠째 침상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
소드익스퍼트의 경지가 대단하다곤 하나 유실리아는 그 중에서도 제일 아래라는 하급, 정상적인 몸 상태도 아닌데 밤을 새며 흙덩이를 간호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몸을 해하는 짓이었다.
그녀는 하녀의 말을 무시하며 흐트러진 흙덩이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저희를 도와주세요….”
* * *
10일째, 가신들은 카텐령의 마탑지부장 자베르의 호출에 의해 거의 대부분이 모이게 되었다.
………
회의실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으나 숨소리를 제외하곤 기나긴 침묵만이 자리를 지켰다.
이러한 가운데 마법사 라르벨로 자베르가 입을 떼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으으음….”
누군가의 신음소리, 그것은 아직까지 방법을 마련하지도, 마정석을 찾아내지도 못했다는 의미였다.
만약 누군가 마정석을 찾아냈다면 벌써 불릿을 치료하려는 시도를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 중에서 그 누구도, 심지어는 가장 넓은 인맥을 보유한 베니스 남작조차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자베르는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하아…자정을 지나면 음기가 강세해 마기가 들끓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백작님께선 이전 직스 자작의 행보를 그대로 답보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다. 그보다 더 심할 것이다. 직스 자작은 마의 꽃방울이라는 정제된 아티펙트에서 새어나오는 마기에 노출된 것이고, 불릿은 악령 그 자체인 와치라는 마계의 존재에게서 정통으로 공격받았다.
아마 희대의 폭군 또는 발작을 일으키듯 괴상한 행보를 보이다 짧은 시일 내에 죽을 것이다.
이곳에 자리한 가신들은 그쯤은 조사한 바가 있기에 더욱 긴 침묵을 고수하는지 몰랐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자베르를 제외한 누군가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번 사건의 책임자가 누군가?”
“레너드 자작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그럼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뎁슨 레너드 자작이 강렬한 안광을 폭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떡!
“얼마나 무능했으면 각하를 곁에서 모시면서도 자신들만 멀쩡하고, 백성을 위해 직접 발로 뛰시는 각하께오서 저리 되셨냔 말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레너드 자작의 말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크레파토스, 셰실리코프, 세스터스는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그나마 연륜이 깊은 크레파토스가 입을 열자 레너드 자작이 그를 노려보았다.
“크레파토스, 자네는 명색이 호위병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놀기라도 했소? 실력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막았어야 할 게 아닌가!”
따끔한 질책에 나이 지긋한 크레파토스가 고개를 푹 숙이자 이번엔 셰실리코프에게로 화살이 돌아갔다.
“삼광, 자네에겐 정말 실망이로군. 미래의 소드마스터라고 받들어주니 세상이 우습나? 한 지역의 영주이면서 우선순위를 못 찾겠느냔 말이다!!”
“…미안, 하오.”
“닥치시오! 당신이 각하께 부탁을 드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헛짓거리를 했군. 뭐에 눈이 멀었는지 몰라도 차라리 검을 버리고 밭이나 가는 게 더 낫겠어!”
울컥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셰실리코프는 담담히 이를 받아들였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불릿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동료인 크레파토스와 세스터스를 우선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기에.
다음 화살은 안 봐도 뻔한 자였다.
“세스터스, 넌 군율에 의거 강력히 처벌하겠다. 백인장이나 되는 이가, 라체나의 기사라는 자가 남의 도움이나 받으며 목숨을 연명해? 그것도 각하의 옥체를 위험에 빠트리면서?”
“죄송합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세스터스는 백인장의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며 각하께서 승하라도 하시면 너 또한 죽은 목숨이다. 이는 군단장의 권한이며 가족만은 건드리질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도록.”
“…감사합니다.”
작위도 없고 비중도 낮은 세스터스에게 혹독할 수 있는 처벌이었지만 그래도 가족만은 연좌제를 면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시퍼런 안광을 쏟아내며 사위를 둘러보자 마땅한 대책수립을 못한 가신들이 저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다.
“쯧, 역시 각하께서 없으시니 영토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군.”
불운한 소식에 가신들이 혼란에 빠지자 이를 수습하고 있는 것은 이우우스 1급 행정관이었다.
그가 휘하 행정관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부여받은 영토는 물론이고 이곳저곳을 보살피고 있었는데, 그가 아니었더라면 불릿이 안정화시킨 바포 변경백은 또 다시 암울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영주들조차 자기 영지도 수급하기 급급한 가운데, 신임 영주인 벙스 카텐 준남작이라고 잘 해낼 리 없었다.
“벙스 카텐.”
움찔.
“예, 옛, 레너드 영주님.”
잔뜩 긴장한 모습의 벙스 카텐이 대답하자 레너드 자작은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넌 대체 뭐지?”
“예?”
“자비로운 각하께서 기회를 주셨으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내 듣기론 영지에 틀어박혀서 딱히 한 것도 없더군.”
“그것은 대영주님의 명에 따라….”
“변명, 변명, 듣기 싫군! 자네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가?”
“…….”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속에 레너드 자작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는 정보도 없어, 병력은 꽁꽁 숨겨둬, 그렇다고 정찰을 하는 것도 아니야, 영지의 발전도 각하와 작은아씨의 능력에 기대고 있지. 자네가 할 줄 아는 게 대체 뭐냐고 묻고 있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줄 알면 진즉에 잘하던가, 지금 장난하는가? 영주직이 애들 장난이야? 그냥 어영부영 따라가면 다 되는 줄 아냔 말일세!!”
쿠구구-
레너드 자작이 소드익스퍼트 상급의 경지답게 기세를 발산하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며 가신들을 압박했다.
그중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벙스 카텐의 앙다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륵.
“죄송, 합, 니, 다, 크윽.”
“그쯤 하시오, 레너드 자작.”
“…브룩 남작. 자네도 할 말은 없을 텐데?”
질책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자 목에 난 긴 자상이 인상적인 브룩 남작이 나섰고, 레너드 자작은 기세를 거둬들이고선 그를 쳐다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잘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소. 그것은 레너드 자작이라고 다를 바 없는 것이오.”
“……알고 있소.”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가 서로를 질책하기 위함은 아니질 않소? 진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소.”
브룩 남작의 말대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한탄과 한숨만이 수많은 가신들의 틈에서 새어왔다.
“마음의…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자베르의 말에 그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무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