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165화 (165/241)

00165  불모의 황무지  =========================================================================

마탑지부장 자베르가 불릿과의 대화를 통해 정신마법에 걸렸을 가능성을 제시하자 다음날 열린 긴급회의는 난리가 났다.

퀘엥-.

“각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크레파토스의 물음에 불릿은 손을 저었는데, 그마저도 힘이 실려 있지 않아 더욱 피곤해 보였다.

“각하께서 밤새 고민하셨나보군.”

“사안이 심각한가 봅니다.”

불릿이 밤새도록 고민한 줄 알고 다섯 가신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심각한 열기를 더하려는 순간, 올리비아의 볼에 홍조가 올랐다.

스윽.

왠지 고개를 살짝 돌리고서 딴청을 피우는데, 이 모습을 발견한 셰실리코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 같았다.

“마님.”

“어, 어?”

화들짝 놀라는 올리비아의 반응에 셰실리코프를 비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납득했네.”

“…적당히 하시지요. 각하의 옥체에 무리가 갑니다.”

“작은아씨도 끼어계셨으면 저리되시지 않았을 것이니 두 분이서만 하셨나 보군요.”

“??”

제노시스를 제외한 모두가 알아먹은 가운데, 올리비아의 얼굴은 그렇게 빨개질 수 없었다.

화아악-.

“으, 아? 그, 그게 아니라…, 부, 불릿이 자지 말라고 해서….”

검지를 맞대며 콕콕 찌르는 올리비아는 민망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선 괜히 옆에 있는 흙덩이에게 말을 속삭였다.

“예쁜아, 도와줘.”

“알았어!”

흙덩이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불릿의 손을 잡고서 정령술을 사용했다.

우우웅…

미약한 빛에 따라 불릿의 상태는 점점 호전됐는데, 눈 밑이 거뭇하던 것도 사라졌고, 감겨가던 눈도 서서히 뜨여졌다.

이내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녀는 생글생글 웃었다.

“헤헤, 이제 괜찮아?”

“우리 애기 덕에 살았다. 너의 치유능력까지 잊을 정도로 피곤했었나보군.”

불릿이 흙덩이의 손등을 매만지며 내뱉는 말에 올리비아의 얼굴은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콧등을 살짝 튕겨주었다.

“아얏.”

그녀는 자신이 바란 건 이게 아니라는 듯 볼을 부풀리더니 그의 옆에 내정된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유실리아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불릿 바보. 피.”

“회의 중이니까요, 작은아씨.”

“? 하지만 여기 왔을 땐 사람들 많이 있는데도 마차에서….”

“험험! 회의를 시작하지!”

가만히 들어줄 이야기가 아니자 불릿은 서둘러 회의시작을 알렸고, 가신들도 흙덩이의 발언은 조금 당혹스러웠던지라 애써 외면했다.

“카텐령 마탑지부장 라르벨로 자베르와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암시마법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웅성웅성.

사람은 몇 없으나 심각한 주제였기에 그들의 입은 한층 빨라졌다.

스윽.

그때 제노시스가 손을 들자 불릿이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말해보도록.”

“감사합니다, 각하. 음,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에도 조예가 있고, 특히 보조계열 마법에는 민감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예,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소신은 마법에 걸렸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마법사는 아니지만 준 마법사, 또는 수습생 정도로 쳐줄 수 있는 제노시스의 발언이었기에 믿을 만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고위보조마법 헤이스트를 발동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이런 제노시스의 발언에 불릿은 이해하게끔 말해주어야 함을 인식했다.

“그 점에 대해선 제노시스는 따로 자베르에게 설명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일단 자네가 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났던 것은 마검사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지.”

“예?”

“제노시스 천인장, 본 백인장이 말해도 되겠소?”

“…아, 그러시오.”

나이는 제노시스가 훨씬 어렸으나 그는 천인장이었고 세스터스는 백인장이었기에 반존대가 오고갔는데, 이것은 군대라 할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암묵적인 룰이었다.

나이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세스터스는 기사였으니까.

제노시스가 엉거주춤하게 앉자 발언권을 넘겨받은 세스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암시라 하면 걸어서 진군하던 것을 일컫는 것입니까?”

“정확한 지적이네, 세스터스.”

“감사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땡볕아래 그 먼 거리를 걸어서만 이동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에 말을 타며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없을 때는 몰랐으나 말에 올라타고 나니 그동안의 행보가 걸렸던 것이다.

무엇보다 불릿을 자신들처럼 걷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암시가 걸렸던 시점은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습격했을 당시로 보이고, 아마 얼마간 지속되는 단기성 마법으로 예상된다.”

갑자기 나타났던 자이언트 스콜피온, 그리고 일열횡대라는 지능이 낮은 몬스터가 보일 수 없는 전술.

덧붙여 그 시점을 기점으로 불모의 황무지의 안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단 한 번도 말(馬)이라는 것을 언급한 자가 없었다.

그때 그 자리에 위치했던 자들에게만 유효한 마법이라면 제노시스와 함께 온 병대가 이의를 제기했을 터인데, 그들도 토벌대를 따라 국경선 인근에 말을 묶어둔 후 이동했다.

“계획된 습격이었단 것이로군요.”

삼광(三光) 셰실리코프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불릿도 이에 대꾸하였다.

“적들은 멍청하지 않다. 쉽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어리석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사옵니다, 대영주님.”

“각하께오선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아니, 아니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벙스 카텐 준남작을 비롯한 가신들이 불릿을 높여주려고 했으나 전날 낙담할 대로 낙담했던 불릿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낙담했던 일은 올리비아가 잘해서(?) 훨훨 날려 보냈다. 남은 거라곤 육체적 피곤뿐.

“하지만 이로 인해 밝혀진 바가 하나 있다.”

자책하는가 싶던 불릿이 다른 얘기를 꺼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신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칭얼거리는 흙덩이를 보필하던 하녀 루나조차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급 마물을 제외하면 등급책정이 된 마물은 현재 대륙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고위마물, 또는 마족을 소환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며 이런 같잖은 수를 써야할 정도로 운용할 병력이 없음을 뜻하지.”

하급이라지만 확실히 마물은 강하다. 당장 등급책정도 되지 않은 밤 스티드만으로도 불릿을 위기로 몰아넣지 않았었는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급 마물은 기사들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고, 밤 스티드는 자폭하고 나면 끝이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으로 시선을 끌고 그 사이에 암시마법을 설치, 국경선 인근을 지나는 자들에게 ‘걸어라’라는 얄팍한 수를 썼다.

그 후 등장한 밤 스티드는 확실히 불릿을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결과적으론 실패했고, 그것은 불릿의 경각심을 끌어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흙덩이와 밤이 새도록 격렬한 응응(?)을 통해 정령력과 몸을 회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밤 스티드와 같은 자폭형 마물을 200밖에 안 되는 병력에 20기나 때려 박아야할 만큼 나쁘단 말씀인지요?”

“…표현이 조금 저렴하군. 그렇다. 놈들은 효율적인 병과를 사용할 만큼 남은 여력이 없다.”

벙스 카텐의 물음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증거는 자베르와의 심도 깊은 대화를 통해 밝혀낸 것이니 믿어도 좋다.”

“그는 겨우 마탑의 지부장이지 않습니까?”

신중한 크레파토스답게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는 지적을 선보였는데, 이에 불릿이 입을 열었다.

“그 겨우 밖에 안 되는 인물이 현재의 주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발언을 삼가도록.”

“……송구하나이다.”

“함부로 남을 얕잡아보지 말라. 이는 타 직업이건, 적이건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대영주님.”

“충.”

“…….”

기사가 마법사를 무시하고, 마법사가 기사를 천시하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넘어갈 만도 했으나 불릿은 자신의 영토에선 그런 일은 없었으면 했다.

이는 루드밀라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선한 성향을 지닌 불릿이었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따끔한 충고이후 가신들이 입을 다물자 불릿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루나에게 말을 건넸다.

“루나, 아일렌은 잘 지낸다고 하던가?”

“어머, 관심있으신가요?”

중앙영지에 남겨진 아일렌의 근황을 묻자 그녀의 친구인 루나가 의미심장한 물음을 남겼다.

“유실리아의 친우이니 당연한 걸 묻는군. 하녀들만의 정보망이 있다 들었는데, 알고 있겠지?”

“네, 네?”

갑작스런 질문에 루나가 당황하자 불릿이 씩 웃어보였다.

“설마 본인이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했나? 안나와 청춘을 함께 보낸 지가 몇 십 년이 지났는데, 그녀는 언제나 다른 영토의 누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수다떨기를 참 좋아하더군.”

“그, 그게 말이에요….”

비밀호위대의 특성상 자신들이 드러날 수 있는 정보를 내뱉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대영주의 물음에도 우물쭈물 거리던 루나.

그런 루나를 구해준 것은 아일렌의 또 다른 친구, 유실리아였다.

“불릿님, 아일렌은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흠, 무언가 들은 게 있나?”

유실리아가 알 것 같진 않았으나 그녀는 오른쪽으로 넘긴 머리칼의 리본머리끈을 매만지며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편지는 주고받고 있었거든요. 그녀가 잘 지내고 있냐고 자주 물어요.”

“그래? 뭐라고 하던가?”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흥미를 가지는 불릿에게 유실리아의 귓불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아기는 언제 가지냐고…요….”

“…….”

“…….”

“……….”

“나도 아기 가질래!”

“자, 작은아씨.”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어색함으로 치달은 회의실 안에서 흙덩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외치자 루나가 어쩔 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했다.

“나 닮은 딸! 맞지, 자기얌?”

“어, 어? 어…, 그러면 좋지.”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대꾸를 해주자 흙덩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못다한 일을 마저 이었다.

“쮸-웁!”

“흡.”

흙덩이는 아까의 복수라는 양 의자에 착석한 불릿의 얼굴을 잡고선 입술을 들이밀었는데, 이번엔 그녀가 자신이 참 좋아하는 진공키스를 직접 해주고 있었다.

“뽀옥-, 뽀오옥-.”

몸집이 작아 폐활량도 낮기에 공기가 새는 소리도 났으나 그것만으로도 불릿의 얼굴은 점차 풀려가고 있었다.

이들의 애정행각에 모두가 멍하니, 아니.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올리비아는 부럽다는 듯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었다.

뽕.

“헤헤, 맛있다.”

“흙덩아, 아직 회의가 안 끝났….”

“낼름낼름.”

그녀는 복숭앗빛 작은 혀로 불릿의 입술을 핥았는데, 그곳에 묻은 모든 침을 빨아먹고 나서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포옥.

“아, 맛있다. 루나, 나 이제 목 안 말라!”

그러면서 자신의 앞에 놓인 물컵을 옆으로 밀어내는 흙덩이에게 루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아가씨….”

“루나도 할래? 기분 좋아!”

“아, 아녜요! 저는 괜찮아요!”

흠칫한 루나가 손사레를 치자 흙덩이는 아쉬워했다.

“아기 많이 낳아서 같이 놀고 싶은데.”

흠칫.

흠칫흠칫.

멈칫.

“불릿이 나 닮은 아기는 예쁘다고 하던데, 헤헤. 빨리 보고 싶다.”

응응(?)을 놀이라 칭하며 탁자에서 엎드린 채 파닥이는 흙덩이를 보며 불릿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자네들 앞에선 줄여보도록 하지.”

어쩐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3연재! 다만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밤 12시 10분이 아니라 12시로 일찍 당겨졌다는 부분입니다.

흠...

근데 어째 주인공이 불릿이 아니라 흙덩이 같은 기분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