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투툰이라는 무게 =========================================================================
알퐁스 드미리치 폰 투툰 후작 진(眞). 불릿과 함께 진(眞)의 이름을 계승중인 둘밖에 안 되는 가문의 가주이자 루드밀라 왕국의 실질적인 1인자의 이름이다.
그러나 불릿의 바포가가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아 진의 이름을 수여받은 것이라면 투툰가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이미 루드밀라가 탄생하기 전부터 이 땅을 지켜오던 이들로, 왕국의 역사보다도 긴 세월동안 존재해온 자들이기에 왕실이 강세하던 시절에도 투툰 후작령에는 손도 대지 못했었다.
사실 후작이라는 작위도 그들의 명성에 비하면 낮은 작위였으나, 공작의 위는 왕족만이 받을 수 있기에 후작이란 작위가 최대치였던 것이다.
“사가하라 공작. 우리 아가는 아직도 방에 틀어박혀 있는가?”
무려 공작이라 불리는 이에게 하대를 하는 사람은 의외로 평범한 체구에 약간 푸근해 보이는 외모의, 곱게 늙어가는 중장년층의 남성이었다.
고풍스럽긴 하나 그렇다고 사치스럽진 않은, 그런 의자에 앉아있는 남성은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사가하라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심성이 고우셔서 아직까지 슬피 울고 계십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간다.
“투툰이시여, 삼광이라 하면 차세대 소드마스터로 일컬어지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딴 후레자식이 우리 아가에게 손을 댔는데 얌전히 넘기란 말인가? 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를?”
얼마나 화가 났던지 투툰, 왕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하는 후작령의 가주가 부들부들 손을 떨며 버럭 성을 내었다.
“내가 우리 아가를 어떻게 키웠는데! 오냐오냐 키워도 그저 아버님, 아버님하면서 따르는 여린 아이를, 감히 쥐뿔도 없는 개새끼가 발정이 나서 감히, 감히이!!”
투툰 후작의 분노에 사가하라 공작은 식은땀이 흘렀다.
‘존재만으로도 이런 위압감을 내뿜는다니, 투툰가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이다.’
왕의 사촌동생인 사가하라 폰 루드밀라는 왕실파가 아닌 투툰 후작의 측근이었는데, 가망이 없어 보이는 왕실이기도 했고, 또 자신이 왕이 될 가능성도 없었기에 일찌감치 최고라 여겨지는 투툰에게 붙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폰’이란 고위귀족에게 붙는 것으로, 왕을 제외한 모든 고위귀족들에게 들어가는 미들네임이다.
“저는 삼광을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일단 들어는 보시지요.”
“씨익, 씨익… 들어는 보지.”
아무리 흥분했어도 그는 거대한 투툰 후작령을 다스리는 가주, 판단력은 언제나 또렷했다.
자신의 딸인 션샤인 폰 투툰을 건드렸다고 하는 삼광(三光) 셰실리코프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기에 화를 꾹 눌러 참고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호는 삼광, 한순간에 세 번의 칼질을 빛살처럼 뿌린다하여 붙여진 별명으로 그의 검술을 일견한 이치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불려집니다.”
“크흥, 그래봤자 천한 출신이겠지.”
“…맞습니다. 검술실력에 비해 출신내력은 바포가의 가신으로, 본래 정령사가문이었던 것이 그의 대에 이르러선 몰락해 검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아무리 공작이라 하더라도 단시일 내에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나 사가하라 공작은 일전에 보았던 삼광의 검술이 내리에 남아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었기에 일전에 찾았던 정보와 더불어 새로이 찾아낸 정보를 취합해 투툰 후작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검술은 기존 기사들의 기본검술에 독자적인 기교를 넣은 것으로, 바람의 정령사였던 시조의 이름을 따 칼바람이라고 지었다 합니다.”
“유치하군, 유치해! 자신의 얼굴이랄 수 있는 검술에 어린애 장난 같은 이름을 지었어!”
“…일단 좀 더 들어보시길. 공녀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크흥!”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는다면 분명 자신이 아가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하는 5공녀 션샤인이 슬퍼할 것이다.
지금도 자신 때문에 밤낮을 지새우며 만나지 못할 셰실리코프를 그리워하는데, 여기서 더 이상 슬퍼했다간 실신할지도 몰랐다.
“삼광 셰실리코프도 자신이 공녀께 어울리지 않는단 것을 깨달았는지 한가지 약속을 맺고서 본인의 영지로 돌아갔다 합니다.”
“영지? 놈의 작위가 어찌 되는가?”
“제 기억이 맞다면 준남작일 것입니다.”
쾅!
“이런 같잖은 놈을 보았나! 귀족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놈이!!”
작위조차 형편없이 낮았기에 투툰 후작은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직 사가하라 공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준남작의 작위를 지녔지만, 곧 남작으로 올라선다는 말이 돌고 있으며 실제로 영주라는 위치를 고수하고 있고, 부족한 마나만 충족된다면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설 것이라는 얘기가 다분합니다.”
“……흥.”
벌떡 일어섰던 후작은 그의 말에 자리에 앉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사가하라 공작은 그가 지금 보이는 반응이 ‘마음엔 안 들지만 참을 정도’는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녀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는 모종의 이유로 되돌아갔고, 공녀와 맞는 수준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쯧, 우리 아가는 어쩌다 그런 놈팡이와 엮였을꼬.”
사가하라 공작이 백날 얘기해봤자 투툰 후작에게 삼광의 좋은 점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그는 핵심적인 내용을 꺼내놓았다.
“만약 그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공녀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면, 그것을 해결해줄 자는 단 한 명밖에 없습니다.”
“게슐린 그랩 자작? 뎁슨 레너드? 그도 아니면 돈만 많은 베니스 남작? 어느 하나 구심점이 될 수 없는 것들인데 대체 누구에게? 아,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 붙었었다고 했지?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처럼 투툰 후작은 겉으로 보기엔 딸바보인 평범한 중장년층의 아저씨였지만, 가벼운 말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있었다.
모르는 척 사가하라 공작에게 물으면서도 셰실리코프가 누구의 편에 서고 있는지, 바포 변경백의 중요인물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등 말이다.
“아무래도, 그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멈칫.
“……흐음, 누가? 그 놈팡이 놈이 아직까지 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지.”
셰실리코프를 비꼬는 말이었으나 사가하라 공작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공녀께 확인한 정보입니다. 그와 잠자리를 가지면서 들은 얘기로, 혼인을 앞둔 주군이라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
“이런 개후레자식이!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공작은 억지로 말을 이어갔다.
“…습니다. 후작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지요. 왕실에 선전포고를 건 우둔한 구울 백작 때문에 주변 영토의 분위기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의 세력들이 무도회에서 발을 뺀 이때에 다른 이도 아니고 갑자기 영주이자 검사인 셰실리코프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삼광이란 놈이 무도회로 가야만 하는 이유와 영주인 놈을 보내도 되는 이유가 겹쳐졌겠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묻는 투툰 후작의 말에 사가하라 공작도 일부러 물었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셰실리코프는 마부도 동원하지 않은 채 홀로 무도회를 찾아갔습니다. 준남작이라곤 하나 일반 귀족가의 영애들도 그러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사교계와는 연이 없던 그인 것을 상기하면 세력에서 밀려났거나, 어떤 죄를 지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들은 바포 변경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보가 차단됐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음에도 단순히 셰실리코프가 무도회를 찾아왔다는 점, 그리고 5공녀의 말을 토대로 꽤나 정확한 추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자 투툰 후작도 장난기를 버리고 다시 근엄한 후작령의 가주로 돌아갔다.
“…으득, 아직도 이가 갈리는군. 어쨌든 간에, 우리 아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상황과 겹쳐져 바포 백작이 귀환했다는 뜻이 되겠군.”
“그렇겠지요. 게슐린 그랩 자작은 영주라면 모를까, 대영주가 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니까요.”
영주들을 그러모으기 위한 대영주가 되기 위해선 단순히 폭력만을 갖추었다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랩 자작의 경우 무력조차 부족했지만 말이다.
“그래, 백작이 귀환했다 치자. 그래서 영토를 수복했다 치자고. 그렇다면 게슐린 그랩 자작은 숙청당했을 텐데, 놈에게 붙었던 후레자식은 어째서 살아있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배신에 배신이라도 한 것인가? 그래도 이상한데….”
아무리 이들이라도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기에 셰실리코프가 숨죽이고서 게슐린 그랩 자작의 밑에 있다가 절호의 기회 때 뒤통수를 친 행동은 미지의 수였다.
그들에게 있어 셰실리코프는 전형적인 검사였으니 말이다.
“그래, 이 말들이 다- 맞다고 치자고! 그런데 바포 백작이 혼인을 해? 아니, 앞뒀다고 했지. 바포 백작의 성정은 내가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하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나이 40넘어서 여자를 멀리하는 것을 보면 놈은 성불구자거나 남자를 좋아함이 틀림없다.”
“……끔찍한 소릴 하시는군요.”
“본인이 거짓이라도 말했는가?”
“…일리 있다고 여겨지긴 합니다.”
“그렇지?”
역시 이들이 보기에도 불릿의 지난 행동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결혼은 안 할 수도 있지만 섹스도 하지 않는다니, 아니 대체 왜 참는단 말인가?
한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건전히 즐기면 될 것이지.
무슨 수도승도 아니고 후계도 낳지 않고서 홀로 독수공방을 하느냔 말이다.
“아, 놈팡이자식 때문에 또 열이 오르는군! 그 후레자식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우리 아가 시집보내기도 그르게 생겼어!”
다시 딸바보로 돌아온 투툰 후작에게 사가하라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연유로 복귀하자마자 혼인부터 하려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까지 추측해 보건대 삼광이 부탁할 만한 이는 그밖에 없습니다.”
“후레자식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간 것은 아니겠는가?”
“삼광은 그럴 인물이 아닙니다.”
단번에 부정하는 사가하라 공작에게 투툰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포 백작이 제정신이라면 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터인데?”
“혼인이라는 행사가 중간에 끼어있다면 가능성이 있지요.”
“…? 이보게, 공작. 내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어도 바포 백작은 매우 신중한 인물일세. 한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자가 아니야.”
아니다, 최근엔 많이 흔들렸다.
“40이 넘도록 독수공방하던 바포 백작입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혼인을 하겠다고 가신들에게 알렸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가 여태까지 혼인으로 인한 이득도 포기했던 걸 생각하면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하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내 딸자식을 둔 아비로서 한마디 하겠는데, 만약 그렇다면 바포 백작이 그 후레자식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야.”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더라도, 귀족이라는 신분에 있는 바포 백작은 나이가 무려 40, 올해로 41살이었다.
이미 손주를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란 소리였다.
투툰 후작은 자식들 다 성혼시키고 막내딸만 남은 상황에 그런 저질스런 행각을 바포 백작이 벌였다면 자신은 아쉬울 것도 없으니 절대 이 결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삼광은 미련한 자가 아닙니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테지요.”
“흥, 미련하지가 않다? 그런 놈이 우리 천사 같은 아가를 건드려서 인생을 망쳐? 이번 기회에 영토확장이나 해봐야겠군.”
“…후작님.”
“슬슬 보여줄 때도 됐지. 이 어리석은 놈들에게 본인이 누구인지를 말이야.”
‘피바람이 불겠구나…, 과연 삼광이 이 피바람을 칼바람으로 베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셰실리코프가 시작한 일은 이제 불릿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 작품 후기 ============================
하앜..
비축분이...
너무 빨리 사라져..
밤 12시 10분에도 1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