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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147화 (147/241)

00147  수련꽃  =========================================================================

침실로 돌아온 불릿은 흙덩이를 침상에 눕혀놓고선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지역은 이미 대지의 축복을 내린 지역이 대부분이니 제외하고서 보고만 받도록 하고, 투툰 후작에게는….’

짐을 꾸리는 와중에도 투툰 후작만 생각하면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듯 불릿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대체 어쩌자고 후작의 공녀를 건드린 것인지 모르겠군.”

투툰 후작은 자식들을, 그중에서도 제 5공녀를 가장 아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별로 이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오히려 손해 보는 짓만 간청하는 션샤인에게 호위무사로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인물을 맡겼던 것이다.

셰실리코프의 말에 의하면 실전경험은 없는 것 같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할 것이다.

소드익스퍼트 중급이라 하면 웬만한 영지에선 기사단장을 꿰찰 수 있을 만큼 높은  경지였다.

“되도록 만남을 늦추고 싶었거늘, 결국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가.”

불릿은 젊어졌다. 그것도 단순히 젊어진 것을 넘어서 친화력의 원소까지 뒤바뀌었다.

게다가 그의 시선에 닿고 있는, 살짝 홍조가 떠오른 이 가녀린 소녀가 정령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투툰 후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미 각오한 바, 어쩔 수 없다.”

흙덩이는 정령시절부터 가신들을 포함, 대대적인 행사에서 영지민들에게도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니 이러저러 변명을 한다고 해도 아는 자가 너무 많았기에 숨길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맹세했으니 불릿은 흙덩이를 세상에서 숨길 생각이 없었다.

스윽.

짐을 꾸리던 불릿, 그는 몇 안 되는 일을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여린 천사의 콧등에 자신의 코를 마주 대보았다.

톡.

“우웅….”

부스럭, 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이는 흙덩이. 불릿은 아직 출발까지 시간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선 그녀가 좀 더 잘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똑똑.

그때, 문가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목청을 내기 싫었던 불릿은 직접 옥체를 움직여 문을 향해 걸었다.

달칵.

“…유실리아로군. 채비는 갖추고 있는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유실리아가 대꾸를 않고 우물쭈물하자 불릿은 재차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을 않는…!”

“쪽!”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기습공격에 불릿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불릿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자 유실리아는 동공이 흔들리면서 불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유실리아,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잖은가.”

질책이라기보다는 이루어져선 안 될,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말이었으나 그녀는 애틋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수련꽃은 물이 있어야만 살 수 있어요. 저는, 저는 각하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사랑하고 싶지 않답니다….”

수련의 꽃말은 청순한 마음, 그야말로 청순미가 돋보이는 유실리아를 위한 단어였다.

곱게 땋은 머리를 오른쪽 가슴으로 넘긴 유실리아의 모습은 불릿의 마음도 흔들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본인은, 나에겐 올리비아와 흙덩이가 있다.”

완곡한 거절의 의미였으나 유실리아는 다시금 그의 품에 안겨왔다.

포옥-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저를 안아주세요. 각하의,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

이러한 행동이 좋지 못함을 알기에 불릿은 흔들리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꾹 참아내고 있었다.

이미 하체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폭발할 듯 빳빳해졌으나, 그렇다고 반응할 때마다 허리를 놀린다면 짐승과 무에 다르겠는가?

대화가 길어지자 흙덩이가 깰 것 같았던 그는 아예 방밖으로 그녀와 함께 나가버렸다.

“자네라면 자네만을 바라봐줄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이미 두 명의 여인이 있는 나에게 왜 그러는 것이지?”

“각하는 두 분을 사랑하시나요?”

이미 기사로서의 유실리아는 집어던진 후였기에 말투가 그 나이대의 소녀로 돌아온 유실리아.

그녀의 물음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둘 중 그 누구도 버릴 수 없다.”

“…한눈에 반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유실리아는 각하에게 빠져버렸어요.”

불릿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예전 흙덩이가 보여주던 애달픈 눈동자가 겹쳐 보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해달라는 과분한 상은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저, 그저 한번만 안아주세요, 부탁이에요….”

“……평생을 혼자 살겠단 말인가?”

아무리 여기사라 할지라도 독수공방은 괴롭다. 불릿에게 있어 하룻밤 불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유실리아는 오직 그와의 짧은 사랑만을 기억한 채 평생을 홀로 살아갈 것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그런 괴롭고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는 상상에 불릿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불릿의 물음에 유실리아의 애달픈 눈망울에서 하나의 눈물이 보석처럼 또옥 떨어진다.

“당신이 한번만 안아주신다면, 그래서 아이를 밸 수 있다면 그 아이를 사랑의 징표로 삼아 살아갈 수 있어요.”

그야말로 지고지순한 사랑의 답변이었기에 불릿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젊어진 데다가 이미 여자맛을 보게 된 육체는 빨리 안으라고, 뭣하러 참느냐고 재촉을 했지만 선뜻 그녀에게 손을 대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부디, 부디 저에게도 그 사랑을 조금만 나눠주세요…, 제발….”

“유실리아…….”

자신의 품에 안겨서 간절히 비는 이 여인에게 불릿은 허락도, 그렇다고 거절도 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안아달라고 비는데 거절한다면 그만큼 비참한 것도 없을 것이고, 허락한다면 올리비아와 흙덩이를 배신하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 그들의 대화가 컸던 것일까, 불릿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

“불릿? 유실리아?”

흙덩이는 잠에서 덜 깼는지 눈을 비비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유실리아가 깜짝 놀라하면서도 불릿의 품에 안겨있자 자신도 그의 허리춤을 뒤에서 껴안으며 해맑게 웃었다.

“히힛! 잡았다, 불릿!”

“으, 으으음.”

“둘이서 뭐하고 있었어?”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자, 작은아씨….”

마치 불륜의 현장이라도 들킨 것처럼 당황하는 둘이었으나 흙덩이는 널따란 불릿의 등에 볼을 비비며 입을 떼었다.

“유실리아도 불릿이 좋아?”

“네?”

“나는 알아. 유실리아가 항상 불릿을 바라봤다는 사실을. 유실리아도 불릿이 좋지? 그렇지?”

흙덩이의 돌직구에 유실리아는 말도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리다 불릿의 품에 고개를 푹,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네에….”

“흙덩아, 이것은 말이지.”

“괜찮아, 유실리아라면.”

“……?”

이제 막 설명을 하려던 불릿은 앞뒤로 안겨온 그녀들 때문에 고개만 간신히 돌린 상황이었는데, 그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흙덩이의 얼굴엔 자애가 서려있었다.

“올리비아도 이해해줄 거야. 나는 유실리아도 좋고, 올리비아도 좋은걸? 그런데 둘이 불릿을 좋아해주니까, 내가 좋아하는 불릿이 사랑받아서 참 좋아.”

“…흙덩아,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서 하는 것이냐?”

영리한 흙덩이였으나 아직 인간세상에 나온 지 2년도 채 안 되는 순진무구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녀가 이해하질 못하면서 말을 내뱉는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리비아가 아들 낳고, 내가 딸 낳고, 그럼 유실리아는 누굴 낳는 거야? 궁금하다, 헤헤.”

퍼어엉!

흙덩이의 발언에 불릿과 유실리아의 얼굴이 동시에 붉게 달아올랐다.

“흐, 흙덩아! 그 무슨 말이더냐!”

“아, 아가, 아니, 작은아씨! 그게 아니라요, 저는 그냥, 각하의 사랑을 조금만 갖고 싶…아니, 그게 아니라!”

둘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함에도 아직 잠에서 덜 깬 흙덩이는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지은 채 불릿의 허리만 껴안을 뿐이었다.

“불릿은 상냥하니까 셋이 함께해도 똑같이 사랑해줄 거야. 그치?”

“정말로 괜찮은 것이더냐? 너희는 이런 걸로, 자신만 사랑받는 게 아니라도 괜찮다는 거냔 말이다!”

아무리 불릿이 공평하게 사랑을 나눠주더라도 그 대상이 셋이나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한쪽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의도하건, 아니건 그것은 늘어나는 수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인 것.

그러나 유실리아는 흙덩이의 말에 용기를 받았는지 불릿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각하.”

그녀, 유실리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불릿의 입술에 다시금 살며시, 그러나 이번엔 기습적이 아닌 느릿하면서도 진한 딥키스를 시도했다.

“츄웁, 츄웁-.”

그는 유실리아의 키스를 받으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다가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흙덩이의 따스한 온기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와락!

“하악!”

두툼한 남성의 팔이 유실리아의 뒤통수와 어깨를 둘러싸자 그녀의 입에서는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고, 불릿은 그대로 올리비아에게 했던 것처럼, 또는 흙덩이에게 했던 것처럼 정열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입맞춤을 이어갔다.

“나도 쪽 해줘, 쪽.”

흙덩이까지 포함된 즐거운 놀이(?)가 시작되었다.

* * *

덜컹!

마지막 짐까지 싣고 나자 크레파토스는 불릿에게 정중히 의사를 물었다.

“이제 탑승만 하시면 출발이 가능하옵니다, 각하.”

“그런가, 크레파토스.”

“예, 각하.”

크레파토스는 어쩐지 불릿의 음성이 아까보다 시원시원해졌다는 기분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시선을 돌리니 웬걸, 흙덩이야 원래부터 불릿에게 안기는 걸 좋아했다 치더라도 호위의 목적으로 왔었던 유실리아까지 그의 곁에서 수줍게 서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그러나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기뻐하면서도 흥분된 어조로 불릿에게 말을 건넸다.

“각하! 유실리아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커험, 커허험!”

노골적인 말인지라 불릿이 헛기침을 뱉었으나, 물음의 당사자보다도 그의 곁에 서있던 유실리아의 얼굴이 오히려 더욱 빨갛게 변해있었다.

불릿이 대꾸를 않자 대신 말문을 열어준 것은 다름아닌 흙덩이였다.

“셋이서 재밌게 놀았어!”

“…셋이서 말씀이십니까? 소인은 잘 이해가 아니 갑니다만, 작은아씨….”

“응, 그건 말이야, 불릿이 올리비아에게 했던 것처럼 쪽쪽 하면서 유실리아랑 막 하고, 나도 처음으로 했는데, 처음엔 아팠다가 나중엔 뽀뽀처럼 기분이 좋….”

“흙덩아, 먼저 마차에 오르거라.”

“응? 에헤헤, 알았어! 영차.”

이번엔 불릿의 도움 없이 마차에 오르는 흙덩이를 보며 불릿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그리 되었네, 크레파토스.”

복잡 미묘한 불릿의 발언에 그는 유실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 유실리아. 앞으로 각하께 부끄럼 없는 첩이 되어야할 것이야.”

“……네, 아버지.”

이번에도 호위기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인 호칭인 아버지라는 단어를 내뱉는 유실리아.

그녀가 크레파토스의 수양딸이기에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이런 대화들을 지켜보고 있던 셰실리코프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그리고….”

“유실리아라고 불러주세요.”

“흠, 그리하겠소. 축하드리오, 유실리아. 사랑이 결실을 맺으셨구려.”

“네에….”

또 다시 발그레해지는 보조개. 그녀는 슬쩍 불릿의 소매를 손끝으로 잡고선 우물우물 말을 걸었다.

“…저도 이제 괜찮을까요?”

유실리아의 물음에 불릿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러나 참았던 욕구를 풀었기에 개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타시게나, 부인.”

불릿은 하면(?) 책임지는 남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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