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사랑과 전쟁! =========================================================================
아군 한 명 없이 껄렁한 자세로 검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사내가 입가에 풀을 매달고선 자신의 대전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질겅질겅.
이미 햇빛은 정수리를 내리쬐는 상태, 3시가 넘었음을 시사하고 있었기에 사내는 입에 물고 있던 풀을 바닥에 뱉어버렸다.
“퉤-, 이봐! 대체 내 상대는 언제 나오는 거야!”
사내의 불량한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일단 잘못한 것은 반대편 진형이었기에 넓게 형성된 진형에서 지휘자로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기다려라.”
간결한 기사의 말에 사내의 이마에 힘줄이 솟는 듣했다.
빠직.
꽃샘추위 속이었지만 가장 따스할 오후 3시어서인지 열을 받을 대로 받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쳤다.
“이래서 병신같은 루드밀라는 안 된다니까? 찌질이새끼들만 모여서는….”
사내의 말은 선한 성격이 대부분인 루드밀라의 백성들을 비꼬는 것인지라 병사들은 울컥했으나 각기 중간지휘관으로 들어선 기사들 덕분에 혼란이 생기진 않았다.
사내는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발로 툭, 돌멩이를 적군이 위치한 방향으로 걷어찼다.
투둑, 툭.
데구르르…
탁.
그때, 바닥을 구르던 돌멩이를 밟아서 멈춰 세운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번 일기토의 상대인 여기사였다.
“입에 걸레를 물었나, 할 줄 아는 말이 그런 것밖에 없어?”
몸의 윤곽을 살리는 미적 감각을 살리면서도 실용성을 해치지 않은, 백색갑옷을 입은 미녀의 말에 일기토의 상대인 사내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와우, 네년은 또 뭐냐? 내 가랑이라도 핥아주려고? 크크큭.”
여성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음담패설이었으나 백기사, 올리비아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랫도리를 두 갈래로 잘라서 그대로 찢어주리?”
움찔.
용병생활로 터득하고 갈고닦은 욕설에 대전상대인 귀신(鬼神) 아부토가 입을 다물자 그녀는 만족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일기토를 앞둔 대전상대에게서 튀어나온 발언이었다.
자신을 상대할 인물이라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을 터이니, 만약에라도 그녀가 그것을 성공한다면 이기더라도 이긴 게 아니게 된다.
“……올리비아 경, 각하께서 지켜보고 계시오.”
“헛….”
이전 같았으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사랑고백까지 받은 직후에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올리비아가 무신경한 여자는 아니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불릿이 흙덩이와 함께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잘 안 들리나 싶었는데 흙덩이가 조잘거리자 안색이 굳는 불릿.
거리가 있다곤 하나 흙덩이의 범위에 있었던 것인지 대화내용을 들었나보다.
“저 요망한 기집애가…….”
불릿이 자신을 이상한 여자로 보면 어떡하나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불릿이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 무슨 의미로 저러시는 것인지 모르겠군.”
백인장의 말에 올리비아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그가 손을 흔들며 외치자 금세 사르르, 굳었던 얼굴이 풀려버렸다.
“힘내시오, 올리비아!”
자신을 응원하는 외침에 올리비아도 이에 답해주었다.
“응! 이겨서 돌아갈게!”
올리비아는 자신이 전신갑옷을 착용한 것도 잊었는지 두 팔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선 붕붕 휘둘렀는데, 둘의 대화를 아부토가 막았다.
“씨발, 빨리 좀 하자고 개 같은 년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이미 약속된 시간에서 20분이 경과된 상태인지라 아부토는 단단히 뿔난 듯 사이한 기운을 흘리며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흔들던 팔을 멈추고 그대로 안면여닫개를 내리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올리비아가 뽑아든 검은 명검의 반열에 든 것인지 조용히 갈무리된 예기 속에서도 섬뜩함이 엿보였다.
꽃샘추위 속 바람이 불며 말라붙은 나뭇잎 한 장이 그녀에게로 향했으나, 검을 앞으로 내민 것만으로도 사르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대인전에 능한 귀신 아부토는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눈동자 안에 담았는데, 겉으론 빈정거리면서 얕보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니기미 씨팔, 들은 얘기랑 다르잖아!’
대전상대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일기토를 제안한 그랩 자작 측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바포 변경백의 기사들에 관해선 모든 정보를 수집한 그였기에 올리비아만 그 속에 집어넣으면 됐었는데, 크레파토스를 통해 그녀의 무용담과 직스 자작령의 정보통으로부터 B급 용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그녀의 검술실력이 뛰어나지만 익스퍼트엔 올라서지 못했다는 것으로, 늙어서 행동이 굼뜬 크레파토스를 이길 순 있어도 비슷한 급의 검사라면 진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씨발, 씨발.”
사이한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던 아부토는 상대로 나올 만한 인물 중에서 가장 확률이 낮다 여겨지던 올리비아가 나오자 너무 쉽게 끝날 게 아니냐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완전 진국인 인물이 아니던가? 이정도면 못해도 소드익스퍼트 상급, 아니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반대로 올리비아는 그녀 나름의 걱정이 있었다.
“…으득.”
아부토가 흘리는 사이한 기운에 대항하느라 올리비아는 진땀을 뺐는데, 헬름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금세 들켰을 것이다.
불릿의 도움으로 그녀는 불안정한 익스퍼트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깨달음 없이 진입한 경지이기에 온전히 마나를 다룰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귀신이라 불리는 아부토를 긴장시키게 해줬던 것은 오로지 장비와 아티펙트의 역할이 컸다.
‘이런 멋진 검은 어디서 났을까?’
문득 자신과 아부토 사이를 가르고 있는 홀로 빛나는 아름다운 검.
이것은 불릿이 과거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준남작에게 하사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라고 들었다.
그때는 한창 흑마법사와의 전쟁이 진행 중이었기에 결사대에 참여했던 불릿이 미처 그에게 전해주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작위식과 함께 충성의 맹세를 받으며 건네주려던 것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올리비아의 손에 쥐어졌으니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게 하사하려던 것이 지금은 적군이 되어버린 셰실리코프에게로 향하고 있으니, 이 사실을 안다면 별칭으로 유명한 셰실리코프가 꽤나 배 아파할 것이다.
“하아…….”
긴 숨을 토해내며 애써 긴장을 풀려하자 어디선가 치솟는 활력에 올리비아는 갑옷으로 가려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후훗.”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였으나, 그것은 불릿이 올리비아의 안전이 걱정되어 목에 직접 걸어준 ‘마(魔)의 꽃방울’이라는 아티펙트 때문이었다.
마의 꽃방울이 아티펙트라는 사실은 이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으나, 대체 무슨 기능이 있길래 아티펙트라 불리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추측만 난무하던 가운데 불릿이 정보의 유출을 각오하면서까지 마탑 지부에 물품감정을 의뢰했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모른다’였다. 그래서 그들이 미안해하는 것과 직스 자작령에서 이미 죽은 직스 자작과 결탁했던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것을 빌미로 물품만 텔레포트 시켜 본토로 전송했었다.
“고마워, 불릿….”
최상급 마정석을 이용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를 흡수하여 사용자에게 이로운 기운으로 되돌려준다.
마(魔)라는 것에서 꽃을 틔울 수 있게 된다하여 마의 꽃방울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인데, 그동안 아무도 사용하질 않아 점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이가 적어져 근래에 들어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마탑에서 모를 정도면 얼마나 긴 세월을 세상에 떠돌면서 사람의 손을 거쳤던 것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축적된 마기는 사용을 해주어야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데, 그것을 몰랐던 기존 소유자들은 마기에 오염되었다.
마의 꽃방울이 세상을 떠돌게 된 비사, 그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릴 들었던 것일까, 아부토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이나 파는 년이 감히 날 무시해!”
아부토의 으르렁거림에 올리비아도 정신을 차리고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철컥-.
“넌 상대를 잘못 골랐어.”
“흐흐흐, 누가 누구를? 곧 있으면 내 아래에서 앙앙대며 울게 될 네년인가?”
심한 말이었지만 올리비아는 한발 내딛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아부토도 떠들던 입을 다물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차핫!”
“뒈졋!!”
챙, 채채챙-
쾅!
푸스스…
검이 움직이고 사람은 그에 뒤따른다. 마치 검이 사람을 조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이한 광경이었으나 수준 높은 대결이라는 점에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채채채채챙-!
“올리비아….”
명품 갑옷과 명검으로 무장했으며 마정석으로 경지를 끌어올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잊혀진 아티펙트 중 하나인 마의 꽃방울을 달아주었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쉽사리 귀신 아부토를 제압할 수 없었는데, 그만큼 상대측의 용병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인지라 불릿네 군단은 놈들이 명예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통성명도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놈들도 결사항전 할 생각인지 욕설을 퍼부운 후 전투로 직행했다.
“각하, 놈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현 바포 변경백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를 꼽는다면 뎁슨 레너드 남작을 빼놓을 수 없었다.
뎁슨 레너드 남작, 올리비아, 벤젼스, 크레파토스가 불릿 쪽을 대표하는 검사라면 게슐린 그랩 자작 쪽에선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용병과는 별개로, 일단 게슐린 자작 본인도 소드익스퍼트 중상급의 인물이며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을 겸직하고 있다.
부단장인 인물로 레베다 아인그루츠라는 자가 있는데, 비록 작위는 없으나 상급, 또는 최상급이라고 추측되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들의 아래로 보루너와 빌 해그먼이라는 단원들이 존재했는데, 부단장 아인그루츠와 더불어 그랩 자작의 삼견, 머리 셋 달린 켈베로스로 불리는 놈들이 있었다.
“저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레베다 아인그루츠가 나설 줄 알았는데, 저런 놈이 등장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바입니다.”
붉은 장미 기사단이야말로 게슐린 그랩 자작의 최대 무력원일 텐데 난데없이 외부에서 용병을 차출해 중요한 일기토에 내보냈다.
그런 만큼 경계를 했어야 했는데, 자신의 안일한 생각에 올리비아가 위험에 처했다고 여겨져 뎁슨 레너드 남작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나 불릿은 고개를 저었다.
“자책은 나중에 하고, 자세히 보도록. 올리비아가 놈의 움직임을 약간이지만 앞서는 것 같지 않나?”
채채챙-.
카가가가가각!
불똥이 튀며 검이 이리저리 흔들렸으나, 올리비아는 착실히 아부토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간간히 반격도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오직 공격일변도인 아부토가 올리비아를 눕히지 못하는 것을 보니 밀린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수비도 상대의 경로를 읽고 차단하거나 그걸 따라갈 수 있는 동체시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이에 레너드 남작은 긍정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아가씨의 체력이 우려됩니다.”
은근슬쩍 아가씨라고 언급하는 레너드였으나 여기서 이걸 꼬집어낼 필요는 없다.
“괜찮네, 내 조치를 취해놨으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상대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여성이 남기사를 따라잡는 방법은 오로지 마나를 수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기에 육체적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고, 그래서 여기사들은 유연하며 재빠르다는 평을 받고 있던 것이다.
이는 굳이 기사로 국한된 것만이 아닌, 전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여성 특유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놈이 쥐새끼라면, 올리비아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일세.”
불릿이 알 수 없는 발언을 언급하자 레너드 남작이 재차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올리비아에게로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캉, 캉!
‘근육통에도 흙덩이의 치유능력이 통할는지 모르겠군.’
불릿은 올리비아가 이기고 돌아올 생각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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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같은 시각인 저녁 6시와 밤 12시 10분에 연재가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