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영지순회 =========================================================================
“흙덩이여,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재현해보시게.”
- 내가?
흙덩이가 되묻자 불릿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부가설명을 이어나갔다.
“할 수 있다면. 흙이나 돌로 된 인형을 만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게.”
불릿이 흙덩이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이전에 보았던 땅의 정령사들의 능력을 알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정령사라면 원소에 상관없이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 수 있었다.
인형이라고 해봤자 모양만 그렇게 만들어 움직이게 만들면 됐기에, 기운을 자신의 몸처럼 다루는 정령에게 있어 그런 일은 손쉬운 일이었다.
다만, 며칠이나 지난 대지의 기억을 읽는 것은 오직 땅의 정령사만이 가능한 일.
물은 흐르고, 바람은 정처 없이 떠돈다. 불? 불은 한순간에 타오르고, 끝난다. 남는 것이라곤 타버린 재밖에 없다.
- 올리비아가 인형을 보여주긴 했었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흙덩이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더니 바닥에서 흙을 쭈욱 뽑아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어머, 신기해라-.”
“와, 뭐야 이게?”
이번에는 올리비아도 편한 복장이었기에 딱히 동참할 필요도 없던 하녀 루나도, 마찬가지로 따라올 필요가 없었음에도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상단이 습격당했던 자리로 찾아온 불릿을 따라온 올리비아, 둘의 놀란 음색에 흙덩이도 덩달아 콧대가 높아졌다.
- 흐흥, 너희는 이런 거 못하지?
이렇게 자신만만해하는 흙덩이가 땅에서 일으켜 세운 것, 그것은 근 오십에 이르는 산적을 ‘흉내 낸’ 병사들이 상단을 습격하는 장면이었다.
“게슐린 네 이놈….”
불릿은 흙덩이가 재현하는 인형극을 보며 이를 악물며 기억을 회상했다.
* * *
카질런 남작의 영지에 도착한 불릿과 일행은 예상치 못한 일과 직면했었다.
“아니, 베니스 남작? 자네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인가?”
이에 베니스 남작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으면서도 불릿에게 먼저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마중드리러 왔습니다, 각하.”
“환영합니다, 각하.”
그와 더불어 불릿을 맞이하는 이는 동쪽의 지배자, 카질런 남작이었다.
사실 이곳은 카질런 남작의 영지였기에 그가 있는 것이 맞았다.
문제는 어째서 베니스 남작이 여기에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할 때.
“저녁 만찬까지는 시간이 있사오니 베니스 남작과 얘기를 나누시지요, 각하.”
“고맙네, 카질런 남작. 그럼 이따가 보도록 하지.”
“예, 각하.”
카질런 남작은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적당한 각도로만 고개를 숙인 후 호위대장인 크레파토스와 호위병대의 위치선정을 위해 저택 밖으로 나섰다.
올리비아와 하녀는 저택에서 나온 시녀들을 따라서 객실로 향했는데, 올리비아의 경우 몸매를 부각하는 드레스차림인지라 피곤함이 배는 예상되어 불릿이 배려한 결과였다.
그렇게 불릿과 베니스 남작, 둘은 따로 방음이 되는 방으로 들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여기는 신기한 구조네? 밖으로 소리가 안 나갈 것 같아.
불릿이 부탁한 것은 아니지만 흙덩이가 신기하다는 듯 벽을 만지며 알려주자 그도 이곳에선 비밀이 보장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흙덩이에게 시선이 꽂힌 베니스 남작이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훑어본 후 천천히 읊조렸다.
“…각하, 정령입니까, 소녀입니까?”
“……일단은, 정령인 것 같네.”
“…….”
“……….”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본 둘이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방을 둘러보는 것을 그만둔 흙덩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옥-.
소파에서 공기가 빠지며 흙덩이의 존재감을 드러내자, 불릿도 닫혔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그, 어. 그래, 자네가 어이하여 이곳에 있는 것인가?”
어색함을 덜고자 불릿이 대화를 물꼬를 틀었고, 베니스 남작도 한차례 헛기침을 뱉으며 이에 응답해주었다.
“으흠, 각하께서 걱정하신 것처럼, 저 또한 그 문제로 인해 직접 마중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선을 짧게 하여 되도록 일찍 만나고 싶었다는 뜻.
그만큼 베니스 남작도 이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네 생각엔 범인이 누구인 것 같나?”
언뜻 추궁하는 것도 같고, 걱정하는 것도 같은 불릿의 화법에 베니스 남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전에, 어째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인지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베니스 남작은 불릿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기 전에 약간의 시간을 번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 백작각하의 영지순회는 각하의 영토에 대한 정당성과 정통성을 다시금 부각시키며 바포 변경백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하시오.”
긍정도, 부정도 내놓지 않은 불릿의 대꾸에 베니스 남작의 말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것 자체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첫 순회지로 직스 자작령을 선택한 것, 그것이 지금의 사단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번엔 ‘OO같다,’라는 약간 돌려 말하는 간접적 수법이 아닌, 직설적인 말을 내뱉는 베니스 남작.
그는 자신의 데 리치 상단이 습격당한 이유가 불릿에게 있다고 언급하고 있던 것이다.
“…….”
불릿이 잠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여긴 흙덩이가 나섰다.
도도도-
척.
불릿의 앞으로 나선 흙덩이가 두 팔을 벌리며 그를 막아서며 하는 말.
- 불릿은 잘못 없어. 이 바보 멍청아.
‘말이 하나 추가된 것 같은데….’
흙덩이는 멍청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소 격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게 언어가 늘은 것인지, 그냥 과격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모르겠군.’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선 접어두기로 하는 불릿.
“인정하네. 게슐린 그랩 자작이 이러한 행동을 보인 이유가 자신의 영토와 인접한 직스 자작령을 방문한 본인으로 인한 것임을.”
“…송구스럽습니다, 각하.”
딱히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불릿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수 접어주는 모습의 베니스 남작.
대영주라는 위치에서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그도 알고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아직 불릿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네의 태도가 옳다고는 못하겠군.”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불릿에게서 베니스 남작은 한창 날카롭고 예민하던 시기의 불릿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가씨를 만나고 순해졌다 생각했거늘, 착각이었나.’
부모를 여의고 폭우로 초토화된 영지를 예전보다 더욱 번창하게 만들었던 카리스마, 그것이 엿보이자 베니스 남작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조용히 되내었다.
“항명하겠나?”
여기서 말하는 항명(抗命)이란, 명령을 어긴다는 뜻만 아니라 불순한 태도나 불만 등, 그런 기색을 보일 때도 쓰는 말이었다.
불릿의 말에 베니스 남작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각하. 그저, 제 뜻은 저도 이런 피해를 입었사오니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싶었기에 그런 것이옵니다.”
그럴 듯하면서도 상황을 벗어나는 말에 불릿도 피식 웃으며 흙덩이를 낚아챘다.
- 응? 왜?
“자네는 본인의 곁이 자리일세.”
그러면서 흙덩이를 오른편에 얌전히 앉히고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본인도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자네도 정보를 입수했겠지. 게슐린 그랩 자작이라 추측되지만, 정확한 것이 맞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놈이 확실합니다.”
단호한 대답. 모른다면서 그놈이라고 한다.
그랩 자작에게 단단히 화가 치밀었는지 꼬박꼬박 작위를 붙여가며 부르던 베니스 남작이 그놈이라며 하대하는 모습에 불릿도 이에 동조했다.
“놈이란 증거는?”
불릿의 물음에 베니스 남작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오히려 되물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움직이겠습니까? 겁쟁이 태티스?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그도 아니면 왕실을 먹으려고 선전포고를 날린 구울 백작?”
겁쟁이 태티스. 역시 그 또한 한 지방의 영주였으나 정보에 따르면 자신의 영지를 그랩 자작에게 넘기고 몸을 의탁한 상황이라 한다.
지금이야 그랩 자작이 잘 대해주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버려질 것은 누가 봐도 예상하는 바인데, 어리석기 그지없는 인물.
삼광 셰실리코프는 검을 빛처럼 빠르게 세 번 휘두른다 하여 붙여진 별명을 가진 검사였다.
작위는 준남작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수의 숲과 인접한 바스톤의 영주 브룩 남작과 마찬가지로 영지를 가진 유능한 인물이었다.
“삼광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삼광 셰실리코프는 그 스스로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검사. 불릿이 알기로 그의 경지가 소드익스퍼트 상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핏줄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쟁취한 작위였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불릿이 생각하기에 셰실리코프가 그랩 자작의 수하로 들어간 것은 뼈아픈 실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삼광은 뼛속까지 검사 그 자체입니다. 전장에서 적을 살려 보내지 않을지언정 비열한 수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불릿의 바포 변경백에 속한 가신 중 하나였으나 삼광은 게슐린 그랩 자작과는 별로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자면 불릿과 더욱 어울리는 인물인데, 어째서 그런 비열한 작자의 하수인이 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인물.
“상대가 본격적인 견제에 들어섰으니 저희도 대비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쯧, 관리를 좀 하려했더니 방해를 하는군.”
불릿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엉망이 된 영토를 수복하며 예전 모습으로 돌리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게슐린 그랩 자작이라는 놈이 지 욕심만 채우려고 방해공작을 펼치니 열불이 솟은 것이다.
불릿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화내는 모습에 베니스 남작은 겉으론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속으론 매우 놀란 상태였다.
‘각하께서 젊어지신 이후로 많이 변하셨구나.’
혈기왕성한 모습이나 이렇게 화를 낼 땐 화끈하게 내는 모습, 그리고 여자문제 등(?).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으나 지금까지는 좋은 쪽으로 변화됐다 여기는 베니스 남작이다.
“그렇지, 베니스 남작. 내 생각해놓은 사업계획이 있는데….”
“…? 어떤 것이옵니까?”
사업이란 말에 베니스 남작은 상념도 접어두고 금세 관심을 보였다.
그 또한 상단을 갖춘 인물인지라 이런 쪽으론 민감하게 반응하는 터.
불릿은 그동안 생각해왔던 특산물에 대해서 차곡차곡 꺼내기 시작했다.
“본인이 생각한 사업계획은, 특산물에 관해서인데….”
* * *
“와, 막 싸운다, 그지?”
“예, 아가씨.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니, 신기해라-.”
- 흙덩이가 한 거야. 엣헴.
올리비아와 루나가 흙덩이가 만들어낸 재현극을 구경하며 터트린 감탄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불릿이 흙덩이에게 다가왔다.
“흙덩이여, 크게도 가능한가?”
몸체가 작은 흙인형으로는 생동감은 느낄 수 있어도 육안으로 세세히 확인하기가 불가능했기에 나온 물음.
이에 흙덩이가 대답해주었다.
- 되긴 하는데, 1개씩만 돼. 크면 불릿이 힘들어.
크면 불릿이 힘들다, 이 말은 정령력의 소모가 흙인형의 크기에 따라 덩달아 소모된다는 의미였기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인형을 크게 만들어주시게.”
- 자, 불릿만큼 큰 인형이다-.
불릿의 요청에 따라 커진 흙인형은 역동적이게 움직였으나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주고 있었다.
감탄사를 터뜨리던 올리비아가 그것을 보더니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불릿, 이거 산적 아닌데?”
“어떤 점이 말이오, 올리비아?”
용병 때처럼 편한 복장을 한 올리비아가 흙인형처럼 검을 휘두르는 척 행동을 선보인 후 입을 열었다.
사사삭-
“이렇게, 움직이는 거. 마나연공을 수련한 기사들의 수법이거든? 이 사람, 누군지 몰라도 정통검술을 연마했어.”
올리비아의 증언에 불릿은 확정적인 힌트를 얻은 듯했다.
“그렇군. 고맙소, 올리비아. 당신 덕분에 조금의 의문도 남지 않게 되었구려.”
모처럼 만의 불릿의 칭찬에 올리비아가 몸을 배배 꼬으며 좋아라했다.
“우리사이에 뭘, 우훗.”
“좋으시겠어요, 아가씨.”
“얘는, 좋긴 뭘 좋아…. 좋긴 하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녀틱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를 제쳐두고 불릿은 흙덩이의 손을 잡고서 곳곳에서 흙인형을 통해 현장을 재현하고 있었다.
- 불릿은 나를 더 좋아하는데, 바보들.
아마, 자신이 더 신체접촉이 많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어쨌든 간에 게슐린 그랩 자작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확보한 불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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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다가 급히 올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