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75화 (75/241)

00075  수확제  =========================================================================

지난 2달간의 시간은 불릿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대지의 기력을 돋워 수확제 직전에 작물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만들었고(맛은 없지만), 그동안 공사대금 대신 배식했던 식량으로 굶주렸던 영지민의 건강을 원상태로 되돌렸던 것이다.

그 외에도 치안의 불안정함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직스 자작’으로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비록 자신의 수련엔 소홀하게 되었으나 폐허가 될 뻔했던 영지를 가까스로 수복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불릿이 높은 곳에 위치한 저택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레파토스도 동의하여주었다.

“이 모두가 백작각하의 은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크레파토스는 불릿이 얼마나 갖은 노력으로 영지를 끌어올렸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절절한 마음으로 대꾸하였으나,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모두 이 몸이 부족해서이거늘, 과인의 잘못으로 백성이 고통 받았으니 은혜랄 것도 없겠군.”

“망극하나이다, 각하.”

뭐라 위로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던 크레파토스는 그저 고개를 조아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불릿이 자리를 비우게 된 경위도 주변의 군주들과 연합체의 압박에 의해서이지, 그가 비우고 싶어서 그리 됐던 게 아니었다.

결사대에 참전한 와중에도 틈틈이 영지를 위한 일지를 작성하던 불릿이었으니 그 누가 그를 욕할까?

그러나 결과가 이리됐으니 자괴감을 느껴도 어쩔 수 없으리라.

“불릿, 너무 그러지마. 너는 최선을 다 했어.”

불릿의 한탄에 맑은 고음이 울려 퍼졌는데, 마치 마음을 치유하는 듯한 목소리에 불릿은 몸을 돌려 그곳을 확인하였다.

그곳엔 정갈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는데,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칼이 그녀의 활발함을 알려주는 듯했다.

“올리비아, 그런 말투는 어디까지나 우리끼리만 있을 때 사용해야 할 것이오.”

“알았어, 알았다고. 나도 알고 있네요, 베에-.”

불릿의 핀잔에 올리비아는 혀를 내밀며 장난을 쳤는데, 예의에 어긋나는 장면임에도 크레파토스는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 크레파토스는 이전에 불릿이 가신들을 불러들인 후 따로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올리비아가 본인에게 말을 놓더라도 놔두시게. 그녀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당사자인 불릿이 괜찮다는데 그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게다가 예법에 어긋남을 지적할 마음을 가진 가신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불릿도 슬슬 장가를 가야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조금 늦은 감, 아니.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몸은 젊어졌으니 비슷한 연배의 처녀와 혼인을 맺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가신들끼리 상의한 것이 아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일치가 되고 있었으니 평소 바포 변경백의 가신들이 불릿의 후계자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 예의가 없는 여자네?

불릿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흙덩이는 그의 팔에 매달린 상태로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는데,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올리비아는 뭔가를 알아챈 모양이다.

그녀는 슬쩍 불릿의 곁으로 다가와 옆에 섰는데, 드레스로 인해 한껏 부각된 두 덩이의 융기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불쾌해졌는지 흙덩이의 미간이 살짝 찡그러졌다.

둘의 행각에도 불릿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둘의 기 싸움이 그냥 장난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틀 뒤부터 수확제의 시작인가?”

불릿의 물음에 문가에서 대기하던 집사가 허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대영주님. 이틀 후면 바포 변경백 전역에서 수확제가 실시될 것이고, 각 지역의 영주들이 중앙영지로 모여들 때이지요.”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에 굳이 부가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으나 이것은 이곳의 수확제에 대해 잘 모르는 올리비아에 대한 배려로, 모두가 은연 중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발언이었다.

불릿은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불릿 폰 바포 백작’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우리 쪽도 가야겠지. ‘직스 자작’이 말이야.”

불릿은 아직까지도 죽은 지 오래인 직스 자작을 연기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향락과 퇴폐에 빠져있던 직스 자작이 공식선상에 나서지 않은 일은 오래되었음으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게슐린 그랩 자작도 중앙영지로 향할 것입니다.”

“음.”

게슐린 그랩 자작이란 소리가 나오자 불릿은 얕은 침음성을 흘렸다.

게슐린 그랩 자작. 바포 변경백의 2인자이며 현 상태로는 실질적인 1인자의 막강한 인물.

그의 음모는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된 것으로, 불릿이 결사대에 합류하게 된 것엔 그도 손을 쓴 것으로 짐작되고 있었다.

‘내 그렇게 믿었거늘….’

불릿은 그랩 자작을 믿었다. 완전히 등을 맡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직스 자작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길 정도로 유능함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듯 뒤통수를 후려칠 줄이야? 지금 불릿이 보관하고 있는 ‘마(魔)의 꽃방울’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니겠냔 말이다.

마의 꽃방울은 돈이 있다하여 구할 수 있는 것도, 그렇다고 권력이 있다하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이런 귀물을 구했는지 모르겠으나 불릿이 생각하기에 그랩 자작은 회수할 자신이 있기에 최상급 마정석의 부작용을 믿고 직스 자작에게 이걸 팔아넘겼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비는 모두 마쳤는가?”

불릿의 물음에 집사는 다시 허리를 숙이며 대꾸하였다.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마차를 대기시켰으며 중앙영지에 대한 정보도 일부 습득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만 알 수 있도록 바로 보고해보도록.”

현재 이곳에 위치한 인물은 불릿, 올리비아, 흙덩이(?), 크레파토스, 그리고 집사 총 다섯(?)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직스 자작령에서 불릿이 믿을 수 있는 인물들로, 반대로 말하면 이들 말고는 다른 이들이 이 정보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불릿의 말에 집사는 목을 가다듬은 후 나직이,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성으로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중앙영지는 현재 ‘밴’이라는, 대영주님의 저택의 총집사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는 게슐린 그랩 자작과 그 외 영주들이 중앙영지로 강제 입성하려는 것을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막아섰는데, 그 때문에 중앙영지는 위기에 빠졌다고 판단됩니다.”

“밴…, 여전히 본인을 위해 수고를 마다않는군….”

밴. 그는 올해로 나이 60의 노신사였는데, 그 정도 나이면 땅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연세임에도 아직 허리도 굽지 않은 채 불릿의 저택과 성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집사들의 우두머리인 총집사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실, 총집사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그를 인정하므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계속해보게. 그래, 위기에 빠졌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그게…, 대영주님. 흥분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안 좋은 이야기인가보군. 말해보시게.”

집사는 잠시 시간을 두고서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갖출 때가 되어서야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성을 막아내던 도중, 바포 변경백 대영주 직속 기사단 ‘라체나’의 단장과 각 조의 조장들이 의문을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콰앙-!

그 말을 듣자마자 냉정과 침착을 유지하던 불릿은 단단한 책상을 내려치며 성을 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냐아아-!!”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고함에 안에 있던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밖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도 놀라 이곳을 바라볼 정도였다.

다행히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안에 있는 인물들, 집사와 올리비아, 크레파토스와 무표정한 표정의 정령, 흙덩이까지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대, 대영주님, 부디 진정하시옵소서.”

“각하, 옥체가 상할까 염려됩니다, 부디….”

까드득-.

“어떤 개잡놈들이 본인의 기사단을 건드린 것인가? 당장 말하도록!”

불릿이 이만큼 화를 내는 것은 여지껏 함께하던 올리비아로서도 본 적이 없던 장면.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불릿의 팔을 감싸 안았다.

뭉클.

“불릿, 진정해. 화만 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크으으…….”

올리비아의 말과 행동에도 불릿은 좀체 화를 수그리지 못했는데, 그때 반대편에 서있던 흙덩이가 불릿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자 그제야 집사를 노려보던 것을 관두었다.

스윽-

그는 자신의 손을 맞잡고 있는 조그마한 흙덩이를 바라보았는데, 흙덩이는 애달픈 눈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무슨 소리인가 해서 자신의 손을 봤더니 책상을 내려쳐서인지, 나뭇조각과 함께 피가 뭉클뭉클 새어나오는 상태.

그걸 인지하고 나니 극심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우웅…

은은한 빛과 함께 흙덩이가 자신의 손을 치료하자 불릿은 말없이 선 채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쉰 불릿은 양팔에 달라붙은 올리비아와 흙덩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올리비아, 흙덩이여, 모두 고맙네. 덕분에 분노에 잠식되지 않았군.”

“뭘, 이런 걸 가지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있으니까, 응?”

- 아프지 마, 나도 슬퍼…

그들의 위로에 불릿은 간신히 가슴을 진정시키고 육체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이 정도로 표출한 적은 없었는데, 이놈의 육체는 주인의 통제를 듣질 않는군.’

젊어진 것은 좋지만 군주에게 있어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마 홀로 있었다면 가신이 몇이 있었건 간에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들쑤시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올리비아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야.’

뭉클.

지금도 느껴지는 그녀의 감촉, 팔을 껴안았기 때문인지 풍만한 올리비아의 융기, 가슴이…

“커흠.”

거기까지 생각한 불릿은 급히 고개를 돌려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흙덩이는 계속해서 치료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조심해야겠구나. 흙덩이가 아니었으면 한동안 고생했겠군.’

화풀이로 부상을 입어 일을 그르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불릿은 군주로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집사, 계속하도록. 본인은 이제 괜찮으이. 크레파토스여, 그대의 충정 또한 언제나 기억하고 있도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럼, 대영주님. 이어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래, 계속하시게.”

불릿이 진정된 기미를 보이자 집사와 크레파토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눈을 빛냈다.

‘역시 저 여인이 있는 것이 각하께 도움이 되겠구나.’

‘소녀의 모습이기에 영 못미더웠는데, 저 정령이 대영주님께 도움이 되는군요.’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사태가 진정되자 집사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현재 ‘라체나’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벤젼스라는 수석기사로, 그를 제외하고는 일반단원과 종자기사들만이 남아있기에 전력이 크게 급감하였다고 합니다.”

“…벤젼스가?”

전쟁통에 불릿의 기사단도 피해를 입긴 했으나 이러한 와중에 벤젼스가 살아남았다는 데엔 의외의 결과였다.

“예, 그리고 기사들이 사망한 경위에는 연합체가 끼어들었다는 정황이 있으며 게슐린 그랩 자작의 소행도 있음을 시민들이 떠들고 있다합니다.”

“시민들이? 어찌하여 그걸 안단 말인가?”

“거기까진 잘 모르겠사옵니다, 대영주님.”

“흐음….”

무지렁이나 다름없는 시민들이 그런 비사를 알 리가 없었다. 이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흘린 결과일 터인데, 유리한 상황의 연합체과 게슐린 그랩 자작이 그랬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불릿의 아군이 그랬을 텐데, 현재 중앙영지는 고립된 상황이니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한 사람 있군.”

‘안나, 안나가 그랬을 것이야.’

불릿과 같은 나이인 40살의 늙은 하녀장, 안나. 불릿은 그녀가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하고, 이상한 하녀네트워크(?)를 갖추어 온갖 소문을 모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 밴과 합심하여 그러한 소문을 하녀들을 통해 퍼뜨렸을 것이다.

“아직 기회는 있을 것이야.”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 그리고 돕는 가신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면 정당성을 토대로 형세가 역전될 수 있으리라.

‘일단은 가신들에게 ‘나’라는 것을 인정받아야겠지.’

불릿의 젊을 적을 기억하는 이들은 몇 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추리면 더욱 적어질 것이다.

불릿은 자신의 성을 지키는 밴을 비롯한 중축인물들에게 다가가야 함을 깨닫고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게 누구건 간에.”

============================ 작품 후기 ============================

오늘도 6시간 간격으로 3연재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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