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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74화 (74/241)

00074  수확제  =========================================================================

탁탁탁.

뚱땅- 뚱땅-

“거기, 밧줄 좀 똑바로 잡으라고! 넘어지면 누구하나 크게 다쳐!”

“밥을 오늘 아침에서야 먹었다고…. 힘이 날 리가 있냐….”

“그럼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 이따 밥 안 먹을 거야?!”

“한다, 한다고! 에라이, 드러워서!”

그러자 인부들이 힘을 내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영-, 차-, 영-, 차-.”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불릿의 안색은 그리 밝진 않았다.

급한 대로 임금대신 식사를 배급하는 방식으로 주민들에게 일거리를 주었으나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엄청난 인원이 몰려들어 공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각하, 아직 수확제는 멀었습니다만.”

수확제까지 시간이 멀지 않았다고 하나 벌써부터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전부터 준비하면 끝나는 것이 축제의 준비였다.

그러나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말하거늘….

“없는 일자리라도 만들어야 저들을 움직일 것이 아닌가? 뜬금없이 무료로 배식하면, 직스 자작이 내린 명이 아니란 것이 탄로 날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 대중에겐 직스 자작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저 수확제만 끝나면 세금도 다시 걷기 시작하고, 농사하는 틈틈이 할 수 있는 이런 일자리도 사라질 것이라 미리 공고를 내렸던 것이다.

주민들은 그저 불평도 하지 못하고선 이거라도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했는데, 그들에게 사실을 알려줄 수 없기에 이런 선택을 했다.

“저치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배만 부르고 몸이 편해지면 허튼 생각이 생겨날 수도 있음이야.”

“…예, 각하. 과연 그러할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을 직스 자작의 무능에 시달려왔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선 생존조차도 보장받지 못했으니 민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적어도 불릿이 중앙영지로 돌아갈 수확제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축제라는 명목이 있으니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네. 지금의 노동도 다 저들을 위해서이니 저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직스 자작이 망친 영지를 불릿의 지시하에 영지민들이 고쳐나간다.

이것만큼 이상적인 경우는 없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떠나지 않고 영지에 남은 자들로, 누구보다 자신의 고향에 애착이 강했던 것이다.

“각하, 하지만 수확할 밀과 보리가 없사옵니다.”

크레파토스의 말대로 영지는 초토화가 된 상태, 그러나 불릿은 이미 그 대답에 대한 해답도 준비하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정령의 힘을 이용하면 되네. 비록 맛은 좀 떨어지겠지만 배를 곪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장사일 것이네.”

단순히 땅에 축복을 내리는 것이 아닌, 한순간의 지력을 돋워 급속성장을 촉진하는 행위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기에 식물의 열매가 상대적으로 맛이 없었다.

무엇이든 간에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행위는 부작용을 가져오는 법이었으니, 맛이 떨어지는 것 정도는 양호한 수준이었다.

주민들이 축제준비를 위한 공사를 하는 것을 보던 불릿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각하.”

불릿이 연신 주변을 둘러보자 크레파토스는 자신의 주군의 의중을 알아차리려 애를 썼고, 불릿은 그에게 물었다.

“올리비아가 보이질 않는군. 이곳은 돌아볼 곳도 없을 터인데.”

직스 자작령은 모든 것이 망가지고 운영이 중지된 상태였다.

이제 막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뭐를 보고 말 것도 없었다.

구경거리라 하면 공사현장이 있긴 했으나, 불릿과 올리비아는 주민들의 눈에 띄면 안 되었기에 이렇듯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흙덩이도 소환하지 않은 채 크레파토스만 대동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불릿의 물음에 크레파토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각하, 그녀는 저택의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사옵니다.”

“수련? 그렇다고 한들 온종일 수련만 하진 않을 터인데?”

“그것이…….”

크레파토스는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불릿에게 대화를 건넸다.

“사실, 그녀로부터 요청이 있었습니다, 각하.”

“요청? 자네에게 말인가?”

불릿 자신이 아닌 크레파토스에게 은밀히 부탁을 했다는 점에 놀랄 시점.

어째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크레파토스에게 부탁을 한 것일까?

그 의문은 당사자가 직접 풀어주었다.

“그녀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의 일을 짧게나마 들었습니다. 올리비아라는 처자는 아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각하, 그녀는 지금까지 용병 ‘볼레트’라는 사내와 동행을 해왔습니다. 그에 대한 호의도 볼레트에게 있었지요. 허나….”

크레파토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바포 변경백의 주인, ‘불릿 포 바포 백작 진(眞)’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십니다. 그녀의 출신이 귀족이라 추정되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녀는 몰락한 귀족의 후손이 아니겠습니까?”

이 충직한 노기사의 말에 불릿은 올리비아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그녀는 불릿에 대한 호의를 품고서 이 머나먼 타지에까지 동행을 해주었다.

그녀로 하여금 위기도 벗어난 적이 많았고, 의지할 데 없는 불릿이 은연중 의지한 기억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용병 ‘볼레트’인 것이지 백작 ‘불릿’은 해당되지 않았다.

아무리 다짐하려해도 그 무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담이 되어 위장이 아플 것이다.

그리고 직스 자작을 죽일 당시, 그녀는 굉장히 무서워했다.

천하의 여장부라 생각되는 그녀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것은 불릿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 그녀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인가?’

올리비아는 이곳에서 혼자다. 이곳엔 용병도 없고, 자유로이 다닐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반란진압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띤 불릿과 함께하려면 목숨이 몇 개일지라도 부족할지 몰랐다.

그러니 고민이 될 법도 했다, 고 불릿은 생각했다.

“올리비아와 대화를 해봐야겠군.”

“그러시겠습니까, 각하?”

내심 올리비아가 걱정되었는지 크레파토스가 반가운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 또한 늙었지만 기사 중의 기사, 자신을 제압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정통검술을 펼치는 올리비아에게 호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불릿을 돕기 위해 이곳까지 홀로 떠나왔다는 점에서 높은 가산점이 부여되었다.

‘비록 몰락했다지만 귀족출신, 예절도 몸에 배긴 상태이니 각하도 장가는 가셔야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태생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으며 불릿 또한 올리비아를 생각해주는 듯했으니 크레파토스로선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보았으면 싶은 생각이었다.

그동안에도 후계자가 없는 불릿에게 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젊어진 것을 하늘이 내린 기회로 삼아 아예 영계(….)와 혼인하는 것도 좋은 수단인 것 같았다.

“농경지 근처에 사람은 모두 물렸겠지?”

불릿의 물음에 크레파토스가 기분 좋게 즉시 대답하였다.

“말씀하신대로 목격자가 없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가보도록하지. 가세나.”

“예, 각하!”

* * *

“핫! 히얏!”

붕-! 부웅-!

올리비아는 구슬땀을 흘리며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 자체는 아름다웠으나, 막상 검에서는 평소의 날카로운 파공성이 아닌, 몽둥이가 흘리는 바람소리만 요란했으니, 그녀가 얼마나 지쳐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휘두르던 올리비아는 마침내 탈진한 것인지 팔을 늘어뜨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악, 하아악, 하악….”

단내가 나도록 숨을 몰아쉬던 올리비아는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건넨 수건을 받아들었다.

“올리비아님, 수건과 음료를 준비했사옵니다.”

“하아…, 고마워, 잘 쓸게.”

그녀는 자연스럽게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을 마셨는데, 어찌나 시원하게 마시는지 보는 하녀가 침을 삼킬 정도였다.

“꿀꺽.”

“응? 너도 마시고 싶어?”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러면 됐고…, 목욕물 좀 받아주겠어?”

“알겠사옵니다, 올리비아님.”

하녀가 공손히 답하며 물러나자 올리비아는 그제야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우….”

털썩-.

“…….”

잠시간 말이 없던 올리비아, 그녀는 뻐근해진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지….”

불릿과 함께 다니면 언제나 신나는 일만 있을 줄 알았다. 그의 호쾌함, 그러면서도 정중한 태도.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에게서 기품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불릿도 자신과 같은 동류라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익히지 못할 정령술도 배우고 있었고, 자신의 검술이라던가 귀족의 예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었다.

귀족이 그런 먼지구덩이에서 구를 리는 없으니, 그 또한 사정이 있다 생각했는데….

그런데 사실은 전혀 달랐다.

불릿은 볼레트가 아니었고, 무려 한 지방의 패자였다.

대영주란 말에 머리가 아득해졌으나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불릿을 볼 때면 머릿속은 더욱더 헝클어짐을 올리비아는 느끼고 있었다.

두근두근.

“흐으….”

이미 숨은 가라앉았고 편히 쉬고 있기에 힘들지도 않다.

그런데 이 빠르게 뛰는 가슴은 뭐란 말인가?

때때로 불릿을 볼 때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감정을 주체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은 거듭 부정하며 그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것이지 않을까?

“나는 어울리지 않아…….”

하지만 신분의 벽이 너무도 높다. 불릿은 그냥 백작도 아니고 변경백의 군주이자 패자(霸者)인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진(眞)’이란 글자는 대개 개국공신,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존재하는 가문을 뜻한다.

하나의 가문이 그렇게 긴 세월을 존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로, 불릿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름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좋아, 나는?”

그녀는 누군가에게 묻듯 홀로 중얼거렸으나 그녀의 말에 대답해줄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불릿 또한 말이다.

“자네는 언제나 본인을 곤란하게 만드는군.”

저벅, 저벅.

“앗?!”

뒤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부터 털었는데, 그녀의 시야엔 목욕물을 받으러 갔던 하녀를 대동한 불릿이 보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흙먼지로 지저분해졌는데, 그러한 와중에도 고귀함을 잃지 않는 것이 과연 진(眞)이란 이름을 가질 자격을 갖추고 있다 생각되었다.

그렇게 걸어온 불릿은 올리비아의 앞에 서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올리비아, 자네의 고충은 본인이 ‘볼레트’가 아니란 점에서 시작된 것인가?”

“……어, 그게…, 맞나…요?”

불릿에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는 올리비아. 이전처럼 반말을 할지, 아니면 존댓말을 할지, 그녀는 이 순간에도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하녀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대는 본인의 몫까지 준비를 해주시게나.”

“알겠사옵니다, 대영주님.”

극공경, 그것은 올리비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최대의 인사였는데, 하녀가 불릿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바포 변경백에서 불릿보다 높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설사 왕이 오더라도 그에게는 한수 접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미 유명무실해진 왕실이지만.

하녀까지 사라지자 장내엔 올리비아와 불릿, 단 둘만이 남았는데 그렇게 되자 올리비아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올리비아, 그대가 원하는 대로 부르면 되네. 본인은 용병 ‘볼레트’이기도 하고, 군주 ‘불릿’이기도 하네. 자네는 본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어.”

이름, 그것은 웬만큼 친하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보통 사람을 부를 때엔 성이 있을 경우 성씨로 불러주었는데, 귀족들의 경우는 거의 절대적일 정도로 성씨만을 주고받았다.

이름을 허용한다는 것, 그것은 가족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귀족의 예법을 아는 자, 당연히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치를 달성하였다.

“그, 그, 그….”

“자네, 역시 아픈 게 아닌 것인가? 아무래도 흙덩이를 소환해서 치료를 받는 것이….”

“그, 그러지 마!”

덥썩!

올리비아는 흙덩이를 소환하려는 불릿의 손목을 잡더니 매우 조그맣게, 그러나 이때만큼은 나이대에 맞는 소녀로 변신해 하고픈 말을 내뱉었다.

“그냥…, 이대로 있어줘…….”

대체 무슨 의미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불릿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결정했다.

올리비아는 그럴 자격이 있는 자였으니까.

‘땀 냄새도 향기롭군.’

이 와중에 올리비아의 체취를 맡는 불릿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도 점심 12시, 저녁 6시, 밤 12시 10분에 올라올 것입니다.

선작과 추천을 해주신 데에 감사인사를 드리오며 저는 비축분을 쌓으러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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