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토벌의 결과 =========================================================================
뚜벅, 뚜벅.
올리비아와 불릿은 휴식을 취한 후 초대를 받은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향하는 동안 불릿은 기사들의 친절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기사들과 잡담을 나누는 이동하는 동안 불릿은 영주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치장보단 실용성에 중심을 둔 성의 외관, 그러나 단단하면서도 육중한 느낌을 주어 웅장함을 자랑하는군.’
그야말로 ‘성(castle)'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내부로 들어서니 화려하진 않았으나 일정한 구도와 배치로 늘어선 예술품은 영주의 안목이 뛰어남을 알려주었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정갈한 백반이라 할 수 있었다. 깔끔하면서도 맛있는, 그런 느낌.
‘유서 깊은 가문인 것인가.’
역사가 짧은 귀족일수록 외모의 치장에 신경을 쓴다.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이란 존재를 어필할 수 없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석과 사치품으로 무장하는 것인데, 유서 있는 집안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었다.
어차피 영지를 가진 가문이라면 굳이 그런 식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내 영지는 이렇게 잘 굴러 간다’를 알려주는 것이 효과적이니까 말이다.
“영주님의 안목이 매우 좋소이다.”
“그렇소?”
카를로스와 함께 성 내부로 들어선 불릿은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기 오른쪽 갑주위에 걸려있는 그림은 아마 이 영지를 위해 수고한 기사의 상일 것이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카를로스의 물음에 웃으며 대꾸하는 불릿.
“갑옷에 난 수많은 흠집이 격렬했던 전투를 알려주고, 그 바로 위에 인물상이 걸려있으면 그가 이 영지를 위해 많은 노고를 바친 가신임을 알 수 있소.”
날카로운 불릿의 안목에 카를로스는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가신들에겐 보다 높은 충성심을 끌어내면서 여기를 방문하는 이들에겐 과하지 않으면서도 영주님의 취향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니 사전에 실수를 예방할 수 있지 아니하겠소?”
손님이 주인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기에 대화 중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이 영주의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무의식에 ‘전투와 기사’라는 주제를 심어줄 수 있다.
그러면 영주와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그쪽으로 흐를 테니 실수도 적어지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통해 최대의 이익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불릿은 영주가 무능한 인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고, 카를로스는 그런 불릿이 진정 용병이 맞는가를 의심케 되었다.
“대단하시구려. 맞소, 영주님께서는 그런 의도로 곳곳에 가신들이 생전에 아끼던 물품과 초상화를 걸어놓으셨소.”
“죽어서도 이름을 남길 수 있으니 기사들에게 있어 이만큼 큰 보상이 없겠구려.”
“맞는 말이오. 명예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소이다.”
기사들은 흔히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고 한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싫어하진 않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검을 휘두르고 병사를 이끄는 군인의 신분.
잠시도 검을 내려놓을 수 없는 고된 삶에서 명예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기에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를로스는 불릿에게 조금 더 호감이 가는 것을 느끼며 더욱 친절히 안내했는데, 어느새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영주님께서 볼레트 경과의 독대를 청하셨습니다.”
카를로스는 미안했는지 올리비아에게 사과하며 불릿에게 말을 건넸다.
“볼레트 경, 영주님이 기다리시니 안으로 들어가면 되오.”
“알겠소. 올리비아, 잠시만 기다리시오.”
“잘 다녀와.”
올리비아는 상관없다는 듯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해주었고, 불릿은 카를로스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집무실로 들어섰다.
끼이익-
집무실의 경첩에선 기분 나쁜 소리가 났는데, 이는 녹슬거나 기름칠이 덜 돼서가 아닌,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이것을 통해 불릿은 영주가 신중한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군.’
말꼬리 하나를 잡혀 어려운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불릿은 영주와 대면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의자에 앉아 집무를 보는 중년남성이 있었는데, 머리가 희끗한 것이 이제 막 장년층에 들어서고 있는 걸로 판단된다.
“내 업무가 쌓여 초청하고도 이리 홀대하게 되었으니 너무 섭섭지 말라.”
“아닙니다. 군주란 영지민을 보살핌에 소홀해선 안 될지니 당연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호오…….”
의외로 격식 높은 말에 영주가 손을 멈추고 드디어 불릿의 얼굴을 보았다.
달칵.
영주는 깃펜을 옆에 놓고 그를 응시하자 불릿이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시작했다.
“떠돌이 용병 볼레트, 영주님의 존안을 뵙나이다.”
왼팔과 오른다리를 뒤로 빼며 동시에 상체를 약간 숙인다. 그러면서 오른팔은 배를 감싸듯 왼쪽을 향하며 손바닥은 펴고 있다.
기사와 귀족의 예법은 거의 똑같지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이 자세에서 배를 감싼 오른팔의 손이 펴졌느냐, 주먹이 쥐어졌느냐로 갈린다.
일련의 동작이 우아하게 펼쳐지자 영주의 눈이 커졌다.
“흥미가 동하는군. 거기 앉으시게.”
보통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다. 이는 평민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귀족의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영주는 불릿을 어느 정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무식하다 여겨지는 용병에게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의자에 앉을 때에도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며 앉는다. 이 또한 소리를 내는 것을 입으로만 한정시키는 귀족의 체면에 포함된 행위.
용병들이 얼마나 거친 자들인지 영주는 아주 잘 알기에 눈을 번뜩였다.
“그래, 잘 왔네. 본인의 소개를 하자면 데빌로안의 영주이자 필로스 가문의 가주 로또스 라 필로스라고 하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네가 정령사라는 얘기를 듣고 둘을 불러놓고 자네만 먼저 독대하게 되었네. 이점 올리비아에게도 전해주게나.”
“올리비아도 좋아할 것입니다.”
시종일관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태도에 필로스는 그가 널리고 널린 용병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떤 속성의 정령을 다루는가?”
“땅의 하급 정령을 다룹니다.”
“사용하는 기술이 독특하다고?”
“응용만 했을 뿐, 기존에 있던 기술들입니다.”
“듣기로는 힘을 모두 소진한 나머지 탈진했었다는데….”
“영주님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는 일반적인 흐름을 띄고 있었다. 기껏 독대를 청해놓고도 누구나 알 법한 싱거운 질답이 오고갔으니 불릿도 이상함을 느꼈다.
‘굳이 나를 부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이다. 목적이 무엇인가?’
영주는 업무가 밀려있어 접객실이 아닌 집무실로 불릿을 불러들였다.
양해까지 구하며 독대 직전까지 업무를 보던 이가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퍼붓는다?
이상함을 느끼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기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기본적인 상식과 일상적 잡담을 나누던 불릿은 올게 왔다는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예, 말씀하시지요.”
“어째서 자네만 정령의 힘을 유지시킬 수 있지?”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말. 정령사가 정령력을 유지시켜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번만큼은 불릿도 영주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주는 날카로운 어조와 눈빛으로 불릿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왜? 이유가 무엇이길래 정령력을 사용할 수 있냐 물었네만.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이 작자가 대체 뭐라고 하는 것인가.’
정령사에게 ‘정령력을 어떻게 사용해요?’라고 하는 것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딴 게 알고 싶었다면 전문서적을 구하거나 학자를 초빙하던지 왜 용병인 불릿을 굳이 지금 이 늦은 시각에 불렀냐는 말이다.
그가 반응을 않자 영주가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압박을 가한다.
“말하지 못하겠는가? 자네만의 비밀이라서? 그래서 말 못하는 것인가? 응? 응??”
“아닙니다. 조금 당황했을 뿐입니다.”
“왜? 당황을 왜 하는가?”
“그야, 정령사에게 어떻게 정령의 힘을 유지시키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대체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불릿의 말의 의미, 지극히 당연한 말을 질문으로 하니 어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불릿은 영주의 반응에서 무언가 있음을 확신했다.
‘정령과 관련된 무언가에 문제가 생겼나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단순히 정령을 부린 것만으로, 그것도 하급 정령사에 지나지 않은 자신에게 이토록 과민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영주는 불릿의 말을 듣고 의자에 몸을 파묻고선 되물었다.
“그래, 잘 모르겠다, 이 말이지?”
“…굳이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흐음, 다른 이상한 점은 없고?”
‘진짜 뭐가 있긴 하나보군. 정령에 대해 캐묻는 것을 보니.’
그렇게 몇 번의 질응답이 오고가다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자 영주는 불릿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됐네. 그만 나가보시게.”
“예,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불릿이 예를 취하며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서려하자 뒤에서 영주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대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였으니 숙소로 복귀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서 지내주게나. 내 신경 써줄 터이니 말이야.”
“…배려에 감사드리옵니다.”
끼이익-
탁.
드디어 불릿이 방 밖으로 사라지자 영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르는 것인가,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알 수가 없군.”
불릿이 이상함을 느꼈듯, 필로스 영주 또한 이상함을 느꼈다.
누가 잘못된 것인지, 현 시점에서 그것을 밝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끼이익.
불릿이 집무실에서 나오자 방문을 서성이던 올리비아가 다짜고짜 묻는다.
“괜찮아? 어떻게 됐어?”
그들에게 상을 내리기 위해 초대한 것인데 올리비아의 걱정은 과한 면이 있었다.
허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기에 불릿은 싱숭생숭한 마음임에도 일일이 대꾸해주었다.
“별일 아니오. 그저 정령사가 희귀하기에 궁금증을 토로하셨소.”
“이상하네, 겨우 그것만 물으셨다고?”
“…올리비아 씨, 말을 삼가시길.”
“아차. 미안해요, 카를로스 경.”
역시 이상한 대화였다. 올리비아는 가벼운 어조인데 카를로스는 자신의 주군인 영주에게 핀잔을 가하는 말에도 조심스럽게 대했다.
“오늘밤 만찬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소?”
불릿이 카를로스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올리비아와 자신의 대화에 대한 자각이 없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며 불릿에게 대꾸했다.
“손님을 위한 객실은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오늘 밤에 있을 만찬은 승전기념으로 펼쳐지는 것이지만 내부인원으로만 꾸려지는 자그마한 규모이니 파티는 아니오.”
만찬은 손님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를 뜻한다. 영주 체면에 파티를 벌이려면 격식에 걸맞는 인물을 초대해야 하는데, 복귀 당일에 벌어지는 것이기에 그럴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카를로스의 대답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거창한 것은 바라지 않소. 그저 영주님께서 챙겨주신다니 기쁜 마음에 받아들일 뿐이오.”
“훌륭한 마음가짐이오. 그대들을 위한 만찬이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오.”
서로 미담을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에 약간 소외된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쳇, 그만큼 고생했는데 겨우 식사 한 끼라니.”
영주에 대한 불만에 호통을 쳐도 무방하건만, 카를로스는 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고 불릿 또한 무시하였다.
관심조차 끌지 못하자 올리비아가 투덜댄다.
“쟤는 나이도 어린 게 왜 저렇게 늙은이들이랑 잘 어울리나 몰라? 전생에 뭐라도 되남.”
전생이란 말에 뜨끔한 불릿. 신경을 안 쓰려 했거늘 자신도 모르게 반응해버린다.
‘전생이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이란 존재. 그는 죽음을 경험했으나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오히려 젊어진 육체를 지닌 불릿 폰 바포였다.
환생인가, 육체의 재구성인가. 그도 아니면 자신이란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해답을 구할 수 없는 답답함이 여정 속에서 쌓이고 있었고,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통제되지 않는 육체는 그의 불안감을 한층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나, 불릿 폰 바포 백작일 뿐인 것이다.’
자신에게 당당하지 않은 군주가 누굴 다스리고, 이끌어 간단 말인가?
그는 언제나 떳떳하고 위엄있는 영주로서 백성들을 이끌어갈 것이다.
기이한 열류가 불릿의 몸을 휘감으며 대기로 뻗어나가는 듯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 작품 후기 ============================
오늘 밤 12시에 이어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