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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5화 (5/241)

00005  화전마을  =========================================================================

정체를 드러낸 그것은 손가락크기의 곡물과자였다.

영양의 밸런스와 휴대성도 좋다. 포장지까지 씌웠기에 위생상으로도 흠이 없는 물건이었으나 딱 하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으적, 으적…, 웩. 이게 대체 무슨 맛인지….”

은근히 풍겨오는 젖비린내와 씹을수록 올라오는 욕지기. 새로 개발된 전투식량은 오직 영양만을 생각해 조합한 식량으로, 맛이 더럽게 없었다.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불릿이 이걸 먹었다는 것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의미.

“으적…, 꿀꺽. 단거라도 좀 섞었으면 여한이 없겠군….”

그가 단맛을 첨가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제품을 먹어본 결과, 한층 새로운 역겨움을 느꼈기에 그만두었다.

토하는 시늉을 하던 불릿은 나무등치에 기대어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

찌륵찌륵…

짹짹.

간간히 들려오는 벌레와 새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했다.

그는 지금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정령사가 정령을 부르지 못한다. 이보다 쓸모없는 존재가 있을까?

무슨 원리로 육체가 젊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정령력과 맞바꾼 결과라면 안 하니만 못했다.

“본인들 기운이라도 소모해서 찾아와야 할 거 아닌가….”

중급 정령정도 되면 자신의 기운으로 사용자의 곁에 단시간 현신할 수 있었다. 하급 정령이라도 운디네는 자신이 매일 장시간 소환했던 존재. 당연히 가능했다.

비록 한번 사용하면 장기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확인쯤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불릿은 자신의 정령들에게 매우 괘씸함을 느꼈다.

“고얀놈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잘 대해주었는데…….”

평소 불릿은 정령들을 소환해 감상용으로 사용했다. 정령의 현신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른다. 이에 중급 정령인 엘레노아는 미모의 여인으로, 하급인 운디네는 귀여운 미소녀로.

손도 대지 않았고 그저 바라만 보았으나 정령들은 그걸 혐오스러워했다.

“대우가 나쁘다 생각하진 않았거늘, 섭섭하기 그지없군.”

정령의 소환은 오롯이 소환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자신의 정령력을 소모하며 소환해야 하는데, 정령들이 사라졌을 때 탈력감이 발생한다. 이게 장난이 아니라서 웬만하면 필요할 때에만 소환하게 된다.

비록 의도가 불순했으나 불릿은 꼬박꼬박 불러주었으니 배신감을 느낄 만도 했다.

“거처에 있을 때는 이런 푸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거늘!”

허공에 소리쳐도 대답은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뭐하는 짓인지. 아무래도 마정석을 사용해야겠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령력의 회복이 불가능하다 여겼는지 마정석을 사용하려 했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조막만한 마정석. 그것을 손에 쥐고 중얼거린다.

우우웅-

마정석이 공명음을 내며 떨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미간을 찡그리며 그가 눈을 떴다.

“내 몸에서 정령력 자체가 사라진 모양이군. 계약이고 뭐고 연결고리 자체가 끊어졌어.”

그와 정령들을 이어주던 정령력이 사라짐에 따라 계약은 파기되었다. 그렇기에 그가 애타게 정령을 불러도 대꾸가 없었던 것이다.

“마정석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겠군.”

정령력을 마정석으로 대체하는 것은 가문고유의 비술. 조건만 충족되면 이를 통해 정령력을 빠르게 쌓을 수도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를 행하기엔 주위에 그럴 만한 장소가 보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물가부터 찾는 걸 우선시해야겠구나.”

그는 또 다시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생각에 물가를 찾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은 그 활용도가 높다. 일단 물 걱정이 사라진다. 이는 가뭄이 와도 풍부한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인데, 농경사회이기에 대단히 중요했다.

오죽하면 물의 정령을 만물의 근원이라 하겠는가?

“정령력을 되찾으면 철저하게 부려먹도록 하지.”

정령들의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화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여하튼, 물의 정령은 상처치료에도 탁월했다. 오래된 상처는 힘들었으나 자연치유력을 높여 빨리 아물게 해준다. 또 상대를 질식시키거나 물의 탄환으로 몸에 구멍을 뚫는 등.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 취이익…

- 크르르

숲 너머에서 몬스터들의 괴음이 희미하게 들려오자 불릿은 자세를 낮추고 한층 주의를 기했다.

떠돌이오크도 간신히 잡았는데 다른 놈들은 절대 무리였다.

적어도 정령들과 재계약을 맺을 때까진 마주쳐선 안 됐다.

얼마쯤 걸었을까. 불릿은 날이 저물고 탈진상태가 되어서야 간신히 폭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 물!”

벌컥벌컥.

얼굴을 처박고 물을 폭풍흡입하더니 고개를 빼들고 감탄사를 터뜨린다.

“푸하! 내 일평생 살면서 물 걱정을 다 하다니, 계약은커녕 말라죽는 줄 알았군.”

불릿의 영지는 언제나 가뭄에서 한발 비켜 나갔엇다.

영주가 무려 물의 중급 정령사인데 가뭄이 가당키나 하냐 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결사대가 전멸함에 따라 대륙의 정령사의 질은 대폭 하락했을 것이다.

몇 없는 정령사 중에서도 상위에 드는 이들이 대거 참여했었는데 생존한 이가 없으니 말이다.

“나를 제외하곤 말이지.”

나직이 읊조리는 불릿. 그나마도 정령력을 잃어버렸기에 정령사라 불리기도 민망했다.

흥분이 가라앉자 그는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는 강물을 보게 되었다.

“……완전히 젊어진 것인가. 짐작은 했으나 직접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흉터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는 불릿. 이것은 그가 더 이상 늙은 노장(老將)이 아닌,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이가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겉모습에 주의해야겠군.”

혼자일 때는 모르나 남들과 있을 때에도 나이 지긋한 사람의 말투를 내보인다면 다들 이상하게 볼 것이다.

적어도 그를 믿어주는 영지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주머니를 비워야겠군.”

불릿은 주머니에 물을 채우기 위해 소지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툭, 투둑. 짤그랑.

“하나, 둘, 셋… 오십 골드에 단검, 펜던트….”

가지런히 정돈한 물건들을 잠시 바라보다 주머니를 덥썩 쥐고서 물을 담아낸다.

꼬르르륵-.

촤악!

“물이 새는 곳은 없고…, 이제 자리를 잡아야지.”

그는 바닥의 물품들을 커다란 나뭇잎으로 감싸고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헉, 허억.”

날이 거의 저물어 이동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잠도 자지 못했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

그러나 그는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후우, 오늘은 그만둬야겠군.”

이러다 사고라도 날 것 같았기에 불릿은 이동을 중단하고 나무등치를 단검으로 파기 시작했다.

팍, 팍.

“후욱, 후욱.”

그가 나무쪽에 땅을 파는 이유는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가서 자려고 하는 것이다.

나무밑의 땅에 들어가 위를 나뭇잎으로 덮으면 온도유지도 되고 은신에도 적당했다.

“본인에겐 너무 고된 일이군. 윽, 물, 물!”

꿀꺽꿀꺽…

“크으…, 후. 다시 파자.”

정령력을 쌓으려고 가져왔던 물주머니를 그대로 마시고서 작업을 진행한다.

아무래도 장소를 찾으려면 하루이틀로는 안 될 것 같아 수분부터 보충하고 본 것이다.

이윽고 땅을 다 판 불릿은 그 속에 들어가고 나뭇잎으로 위를 가렸다.

부스럭, 부스럭-.

빈틈없이 가리니 천연의 비밀장소가 완성되었다. 그는 약간 불편한 상태임에도 금세 잠이 드는 것을 느꼈다.

* * *

“헉헉, 제길, 헉헉.”

불릿은 매우 숨이 찬 듯 숨을 가쁘게 내쉬며 걸었다.

“컹! 컹컹!”

“네 이놈들! 본인 말고는 먹잇감이 없더냐!”

“컹컹컹!”

그는 현재 늑대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이건 걷는다기 보다는 흡사 경보(競步)와 같았다. 즉 빠르게 걷고 있다는 뜻.

“이런 치욕이 또 있을까!”

“아우우!”

“컹컹!”

참고로 늑대 또한 군집생활을 동물로, 절대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불릿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제발 좀 떨어지거라!”

결국 불릿은 늑대를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힘으로 해낸 것은 아니고, 중간에 고블린무리가 나타나 늑대들을 습격한 것이다.

뜬금없이 나타난 고블린들이 독침을 쐈을 때 불릿은 기겁했다.

차라리 한 대 맞는 게 낫지, 저 독침에 맞으면 분명 마비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느리게 잡히나 빠르게 잡히나 결국 죽는 것이다.

“이놈의 숲이 아주 엉망이야, 에잉!”

불릿은 결론을 내렸다. 이 숲에 안전한 곳은 없다. 차라리 민가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빠르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화전마을이라도 좋으니까….”

숲을 태워 밭을 일구는 영지의 도망자들. 영주의 횡포를 못 견뎌 도망친 이들이 대다수인 자들이다. 비록 경계심이 높고 보금자리도 형편없겠으나 그는 찬물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파사삭-

“웃, 이런 씁…….”

이렇게 그냥 숲속을 걷기만 해도 나뭇가지나 잎사귀에 베인다. 게다가 온갖 벌레는 기겁하게도 만들었으며 한방만 물려도 퉁퉁 부었다.

“가렵고, 배고프고, 힘들군. 이게 말로만 듣던 민초들의 삶인가?”

그가 결사대에서 온갖 힘든 일들을 겪었으나 이건 그것과는 또 다른 힘듦이었다.

그야말로 구질구질하게 힘들다고 할까?

“후우, 이거 체면 구기게 생겼군. 누군가 날 알아봤다면 망신살을 살 뻔했어.”

문명의 혜택을 못 받으니 숲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게다가 언제 동물과 몬스터에 습격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 팽팽했던 피부가 10년은 삭아보였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5일이 지났을 무렵, 그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오, 세상에 맙소사!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가 예상했던 최저치인 화전마을. 그러나 너무도 반가운 마음은 그곳이 궁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대번에 달려갔는데 마을입구에서 막혀버렸다.

스릉-

“넌 누구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막 농사를 짓던 도중인지 농기구에 흙투성이인 자들이 불릿을 위협했으나 그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밥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우걱우걱, 꿀꺽! 까드득, 까득!”

“처, 천천히 드시지요. 여기 물….”

탁!

“꼴꼴꼴꼴꼴!”

“허허….”

땟국이 줄줄 흐르는 불릿이 식탁에 놓인 음식을 닥치는 대로 쓸어먹었다.

그것이 안쓰러워보였는지 물을 건네주자 말도 않고 항아리에 물붓듯 들이붓는다.

이윽고 음식을 다 먹자 불릿이 내뱉는 말.

“꺼어억!”

마을입구에서 처음 말했던 ‘밥 좀 주세요!’를 제외하고 처음 듣는 음성이 트림이라니….

그는 조금 황당했으나 이내 진정하고 불릿에게 말을 걸었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최고입니다! 근데 혹시 더 없습니까?”

“그, 그 이상 드시면 저희로서도 곤란하니…….”

“쩝. 아쉽군요.”

장정 세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을 섭취하고도 모자라다는 불릿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기어코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쉽다는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움을 드러내는 불릿.

“그나저나, 어찌 이 험한 산골에서 헤매고 계셨습니까? 복장을 보아하니 꽤나 고생하신 것 같은데….”

“아, 그것 말씀입니까?”

거기까진 생각을 해놓지 않았기에 불릿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럴수록 눈앞의 인물이 의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니요? 그게 무슨….”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 기억상실증?”

상대방의 말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습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복장은 이 모양이고.”

“그래도 뭔가 단서 하나쯤은….”

“근데 누구십니까? 혹시 저를 아십니까?”

불릿이 밀고 가는 컨셉은 ‘나는 몰라요, 너는 아세요?’였다.

뻔뻔함의 극치를 달려야 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 이런 일은 익숙했다.

“아, 아니오, 모릅니다.”

“그거 안타깝군요. 제가 이곳의 주민이었다면 괜찮다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촌장격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이 마을의 대표자는 아닙니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데 말입니까?”

“그것은…….”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말투. ‘나는 모르는데, 너 아는 거나 뱉어봐라’식의 괴상한 대화방식이었으나 결과는 쓸 만했다.

그의 태도에서 불릿은 화전마을임을 확신했다. 여기가 뭐라고 밝히기를 꺼린단 말인가? 척 봐도 가난한데.

“저기, 제가 너무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씻고 잘만한 곳 없습니까?”

“에, 예?”

“오다가 오두막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요런 게 나왔어요. 뭔지 통 알 수가 없더군요.”

그러면서 그가 내민 동그란 물건은 남자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게끔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3시, 6시, 9시,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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