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133화
늦은 오후, 하준이 <암행연인>의 촬영장인 문경새재 야외세트장에 도착해 오 감독에게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 하준이 일찍 왔네!”
오늘은 밤씬 촬영이라 늦은 오후에 왔어도 빨리 온 것이었다.
“네, 길이 안 막혀서 빨리 왔어요.”
“주연 배우들이 이렇게 빠릿빠릿하니 너무 좋다. 가은이도 와 있어.”
“벌써요?”
“응, 무술 감독한테 지도받는다고 일찍 왔대. 아주 열정이 대단해. 잘 할 것 같아.”
오 감독이 심가은을 잘 뽑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무술 감독님께 가 볼게요. 오늘 스턴트 해주실 분들에게 인사도 드릴 겸······.”
“응, 그래.”
하준은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하준이 큰 소리로 인사하며 무술감독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주변의 스턴트맨들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 하준이 왔구나!”
무술감독이 하준에게 손을 흔들었고, 심가은도 하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하준아.”
“안녕하세요, 누나. 오늘 저랑 싸우는 장면 연습하시는 거예요?”
극중 세자 이훈은 몰래 암행을 나가 백성을 수탈해 재산을 불린 병조판서의 곳간을 털러 가는데, 그곳에서 같은 목적으로 온 홍수련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서로 도적이라고 생각해서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이게 오늘 촬영할 장면들 중 하나였다.
“응, 온 김에 같이 맞춰볼래?”
“네, 좋죠.”
무술감독은 두 사람에게 어떻게 합을 주고받을 건지 시범을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목검을 들었다. 첫 연습이니 안전한 목검으로 해보는 것이다.
스턴트맨들은 두 사람의 액션을 구경하기 위해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변에 모였다.
“자, 그럼 레디, 액션!”
무술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진짜 적을 마주한 것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서로를 쏘아보며 조심스럽게 옆으로 이동하다가 심가은이 먼저 하준에게 검을 내리쳤다.
하준은 심가은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며 곧바로 회전해 심가은의 뒤쪽을 노렸다.
그러나 심가은이 얼른 검으로 막아냈다.
심가은은 곧 하준의 검을 밀어내고 이번에는 더 빠르고 힘있게 목검을 휘둘러 하준을 공격했다.
하준은 서서히 뒷걸음질 치며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4번 막아냈을 때 역공에 들어가 한번에 심가은의 목검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와아!”
“잘한다!”
구경하던 스턴트맨들은 두 사람의 합이 기가 막히다며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하준 역시 심가은의 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누나, 진짜 잘하시는데요?”
“헉헉. 너야말로, 역시 <신비종>으로 갈고닦은 솜씨야. 난 진짜 온 힘을 다해서 검을 휘두르는데, 넌 되게 가볍게 휘두른다.”
“전 아무래도 남자니까 힘이 더 세서 그렇죠. 누나, 정말 잘하세요. 너무 멋지십니다!”
하준과 심가은이 서로 칭찬을 주고받고 있자, 무술감독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뭘 서로 더 잘한다고 하고 있어? 둘 다 너무 잘하는구만. 액션씬 기가 막히게 나오겠다. 둘 다 운동신경이 좋네. 아, 근데 말이야······.”
무술감독은 두 사람이 액션을 잘하니까 욕심이 났다.
“이것도 할 수 있는지 해볼래? 지금 짠 건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으니까, 조금 난이도가 높은 거 해보자. 응?”
“네? 하준이는 몰라도, 저 지금 쉽게 한 거 아닌데요······?”
심가은이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무술감독은 막무가내였다.
“보고 못 하겠으면 안 해도 돼. 근데 내가 보기에 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 한 번만 해보자!”
무술감독은 다짜고짜 스턴트맨 하나를 불러 뭐라뭐라 설명을 하더니 곧 함께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범은 벽을 타고 달리다가 검을 찌르는 것과 여러 번 회전하며 검을 맞부딪치는 것이었다.
“어때? 할 수 있겠지?”
무술감독이 시범을 마치자마자 하준과 심가은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누나, 누나는 할 수 있겠어요?”
“음, 저 벽 타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와이어 달면 모를까······ 그나마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두 사람의 의견을 들은 무술감독은 일단 하준에게 벽을 타는 걸 해보라고 했다.
하준은 심가은의 말대로 <신비종>으로 웬만한 액션은 다 소화할 수 있었다. 또한 <신비종>의 배경이 조선시대와 비슷해서 검을 쓰는 사극 액션에 더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준은 힘있게 땅을 박찬 후 벽을 타고 달렸다. 그러다 마지막에 점프를 하는 동시에 공중에서 검을 찌르는 동작을 선보이고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오오! 역시 하준이 너무 잘한다!”
무술감독은 자기가 알려준 걸 하준이 바로바로 해내니 물개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스턴트맨들도 박수를 치며 하준을 칭찬했다.
“자, 다음은 둘이 빙글빙글 돌면서 칼 부딪치는 거 해보자!”
무술감독은 흥분한 목소리로 다음 액션을 요구했다.
“감독님, 조금 느리게 해도 될까요? 방금 보여주신 건 너무 빨라서······.”
심가은이 양해를 구했다.
“그럼. 하준이랑 합만 잘 맞추면 돼. 어차피 편집할 때 속도 조절하면 되니까.”
“네, 감사합니다.”
심가은은 하준에게 몸을 돌려가며 자기가 원하는 속도를 설명했고, 하준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볼게요.”
심가은은 호흡을 가다듬고 하준과 마주 섰다.
“하나, 둘, 셋!”
심가은의 구령에 맞춰 하준은 심가은과 함께 우로 한번, 좌로 한 번 회전하며 칼싸움을 벌였다.
“봐봐, 할 수 있잖아! 아이고, 잘한다, 잘한다!”
하준과 심가은의 시범이 끝나자, 무술감독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잘한다’를 연발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 감독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 했더니, 이런 걸 하고 있었어?”
“엇, 감독님!”
“오늘 할 액션 합 맞춰보는 거야?”
“네, 두 사람 다 액션을 너무 잘해서 제가 좀 더 심화된 걸로 시켜봤는데요, 진짜 잘합니다. 아하하.”
“방금 거 말하는 거지? 나도 봤어. 무사복으로 갈아입고 하면 더 멋있겠더라. 우리 액션은 걱정 없겠어.”
오 감독도 빙긋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더니, 이제 분장을 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하준은 심가은과 분장실로 향했고, 둘 다 검정색 무사복을 차려입고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메이킹 영상을 촬영하는 스태프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얼른 카메라를 두 사람에게 들이대고 물었다.
“두 분, 블랙으로 쫙 빼입으셨는데, 오늘 촬영은 어떤 촬영인가요?”
메이킹 영상에 익숙한 하준은 얼른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이훈이 의적 활동을 하는 첫날이고요, 또 의적 활동을 하다가 홍수련을 처음 만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의적 활동이라서 앞으로 밤 촬영이 많을 것 같은데, 혹시 두 분은 아침형 인간이신가요, 올빼미형 인간이신가요?”
“저는 아침형이라서 살짝 걱정이 됩니다. 원래도 아침형이었는데, 군대에서 1년 반 동안 10시에 자서 아침 6시 반에 기상했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10시 되면 졸리고, 6시 반 되면 눈이 떠져요. 누나는 어때요?”
하준이 먼저 답하고는 심가은에게 물었다.
“저는 올빼미형이라서 밤 촬영에는 자신 있어요. 단지 밤에 촬영하면 그 조명 때문에 벌레들이 많아서 그게 힘들······ 으악!”
심가은 역시 벌레를 무서워하는지 조명으로 커다란 나방이 날아들자 단말마의 소리를 지르고는 벌레를 쫓으려는 듯 팔을 휘두르며 우다다다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다.
그 모습이 멋진 무사복과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스러워서 하준과 스태프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본의 아니게 하준 씨하고만 계속 이야기를 나눠야겠네요. 아, 하준 씨는 벌레 안 무서워하세요? 어릴 때도 안 무서워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저요? 전 괜찮아요. 벌레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는 없잖아요. 모기나 벌 같은 거 아니면 특별히 물지도 않고요. 그냥 냅두면 알아서 자기 갈 길 가더라고요.”
하준은 그저 촬영에 방해가 되는 카메라 앞쪽 벌레들만 팔을 훠이훠이 휘둘러 쫓으며 말했다.
“오, 역시 상남자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때, 오 감독이 하준과 심가은을 불렀다.
"엇, 저 이만 가볼게요! 아, <암행연인>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하준은 손 하트를 만들어 보인 후, 후다닥 촬영을 하러 달려갔다.
“자, 촬영 시작할게요! 다 준비됐지?”
“네!”
달밤의 액션 촬영은 역시나 합이 딱딱 맞아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하준은 와이어를 달지 않고도 거의 날라다니는 수준이라서 다들 깜짝 놀랐다.
“아니, 하준아,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담도 쉽게 휙휙 넘고, 지붕 위에도 맨손으로 막 올라가고. 언제 이런 연습을 다 한 거야?”
오 감독도 하준이 액션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놀라서 물었다.
“실은 저 군대에서 파쿠르 배웠어요.”
“파쿠르? 그 막 맨손으로 담 넘고 점프해서 벽 타고 그런 거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아니, 요즘 군대에서 그런 것도 가르쳐 줘?”
“아뇨, 그게 아니라, 군대 동기 중에 파쿠르 선수가 있어서 제가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액션 연기할 때 도움 될 것 같아서요.”
“와, 그랬구나! 어쩐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어. 잘했네. 여러 가지로 이번 작품은 네 매력 종합선물세트가 될 것 같다. 아하하.”
오 감독은 멋진 장면이 많이 나올 것 같다며 매우 흡족해했다.
“그럼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할게요!”
조감독이 스태프들에게 외쳤고, 단체로 이동이 시작됐다.
하준이 이동하며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이었다.
‘어쩐지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했어······. 아, 이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지?’
하준은 자신의 볼을 가볍게 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김유택이 물었다.
“하준아, 너 졸리지?”
“엇, 형,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너랑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모르겠냐? 이거 마셔.”
김유택이 하준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저 커피 안 마시는데······.”
“이게 커피로 보이냐? 잠 깨는 약이야. 이른 아침 출근에, 야근 밥 먹듯이 하는 직장인들의 필수품. 이거 없으면 우리나라 안 돌아간다?”
“근데 쓰잖아요.”
“내가 널 위해서 시럽 좀 타 왔어. 달달하게. 물론 난 안 달게 그냥 먹지만.”
“으음······. 커피도 중독된댔는데, 괜찮을까요?”
“하루에 한 잔은 괜찮댔어. 이건 연구 결과에 나온 거야. 그리고 너 지금처럼 졸린 상태에서 액션 연기하다가 큰일 난다?”
이건 김유택의 말이 맞았다.
하준은 이번엔 김유택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하준은 커피를 한번 쭈욱 빨아들였다.
쓴 맛이 좀 나지만, 시럽이 들어가서 그런지 먹을 만했다.
“어때?”
“시원해서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요.”
“조금 있으면 눈이 말똥말똥해질 거야.”
카페인을 안 먹던 하준인지라 아메리카노의 약발은 너무 잘 들었다.
하준은 아메리카노 덕분에 말짱한 정신으로 밤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
얼마 후, 하준은 <암행연인> 촬영을 가기 전에 오랜만에 구내식당 밥도 먹을 겸 월드 엔터 사무실에 들렀다.
최 대표는 하준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곧바로 하준을 구내식당으로 데려갔다.
점심을 먹으면서 최 대표가 말을 꺼냈다.
“하준아, 있잖아, 굿 뉴스하고 베······.”
“저는 굿 뉴스요.”
최 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은 냉큼 대답했다.
“아하하, 내가 뒤에 뭐라고 할 줄 알고?”
“굿 뉴스 다음은 배드 뉴스죠, 뭐. 그리고 둘 중 뭐부터 들을래? 이게 질문일 거고요. 맞죠?”
“아닌데?”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우리 하준이한테는 굿 뉴스와 베리 굿 뉴스 두 가지밖에 없어. 하하하.”
최 대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준 역시 배드 뉴스가 아니라 베리 굿 뉴스라는 말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하하, 그래도 전 굿 뉴스부터 들을래요.”
“그래? 굿 뉴스는, <유퀴스>에서 섭외 들어왔어.”
“와, 좋아요! 오랜만에 ”
“좋아할 줄 알았어.”
하준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유퀴스>를 즐겨보고, MC인 유재선과 조세후의 팬이기도 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암행연인> 홍보 겸 예능에 나가야 하는데, 그 중 <유퀴스>가 하준에게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하준은 굿 뉴스에 무척 만족해하며 곧바로 물었다.
“그럼 베리 굿 뉴스는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