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60화
“하준아, 보약 먹고 가야지!”
최선희가 막 집을 나서려던 하준을 불러세우고는 보약과 사탕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아, 맞네. 고마워, 엄마.”
하준은 단숨에 보약을 삼킨 후 사탕을 받아먹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잘 다녀와. 항상 조심하고!”
“네에!”
집을 나선 하준은 집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매니저 김유택의 차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형.”
“어, 안녕. 오늘 컨디션 어때?”
“좋아요. 방금 보약도 먹고 나왔고요.”
“잘했네. 자, 그럼 가보자. 안전벨트 매고.”
“네!”
오늘은 액션 스쿨에 가는 스케줄이라 굳이 최선희가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하준은 매니저인 김유택과 함께 액션 스쿨로 향했다.
액션 스쿨에 도착해보니 공정환과 서희수, 이민혁이 먼저 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넓은 체육관의 한쪽에 모여 앉아 배우들이 액션 연습하는 걸 입을 쩍 벌리고 구경 중이었다.
하준은 김유택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로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친구들 무리에 합류했다.
“안녕. 다들 일찍 와 있었네?”
“어, 안녕. 저기 봐, 무술 선생님들 엄청 멋있다?”
“안녕, 하준. 야, 여기 선생님들 장난 아니야. 막 날라다녀. 너도 여기 앉아서 구경해.”
서희수와 공정환이 하준의 인사를 받으며 옆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이민혁은 하준에게 힐끗 시선만 보내고는 다시 무술 선생님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준아, 우리도 저렇게 막대기 휘두르는 거 배우겠지?”
“그렇겠지? 도사들이 지팡이를 사용하니까.”
“근데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솔직히 나 운동 잘 못하거든.”
공정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이민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난 태권도 배웠지롱. 저런 건 쉬워.”
“와, 정말? 부럽다. 넌 그럼 금방 잘하겠다.”
“당연하지! 식은 죽 먹기야.”
공정환이 부러운 듯 말하자, 이민혁은 고개를 치켜들며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비웃는 표정으로 놀리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근데 너네는 고생 좀 하겠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태권도 좀 배워놓지 그랬냐.”
그러자 서희수가 짜증난다는 투로 이민혁에게 일침을 가했다.
“야, 태권도에서 저런 막대기 휘두르는 거 배우냐? 검도를 배웠으면 또 몰라.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안 그래도 저걸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이민혁이 놀려대니 확 빈정이 상한 것이다.
“잘난 척? 야, 사실을 말한 것 뿐이데 뭘 그렇게 발끈하냐?”
“어쭈? 너 8살이 어디다 대고 ‘야’래? 누나라고 안 불러?”
서희수는 하준과 공정환에게는 친구를 먹자고 했지만, 이민혁에게 친구를 먹자고 한 적은 없었다.
“뭐? 얘네는 말 놓잖아. 근데 왜 나보고만 그래?”
“얘네한테는 내가 말 까라고 했고, 너한테는 안 그랬잖아.”
“어차피 촬영 들어가면 우리 다 동갑으로 나와서 말 놓을텐데, 뭐 그런 걸 따져?”
“난 그런 거 따져. 넌 평소엔 나한테 누나라고 하고, 촬영 때만 이름 불러. 알겠어?”
“됐다, 됐어. 평소에 너네랑 말을 섞질 말아야지. 수준도 안 맞는데 내가 그래도 같이 촬영한다고 봐줬더니!”
이민혁은 어이없어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서희수는 이민혁이 가고 나자 공정환에게 말했다.
“쟤 좀 재수 없지 않냐? 첨 봤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음, 좀 잘난 척 하는 것 같긴 해. 근데 왜 뽑았는지 알 것 같지 않아?”
공정환의 말은 극중에서 삼총사를 괴롭히는 악역에 딱 어울린다는 말이었다.
이민혁이 맡은 악역 양백상은 부잣집 아들로 안하무인에 남 비웃는 것이 취미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서희수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그렇네, 인정. 아하하.”
하준도 싱크로율이 너무 높아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콧수염이 인상적인 무술 선생님이 다가왔다.
“자, 어린이들, 선생님 따라 와라. 근데 한 명 더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아, 저기 있구나. 얘야! 너도 <신비종> 출연하는 아역이지? 이리 와.”
콧수염 무술 선생님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고, 하준과 아이들은 그의 뒤를 따라 작은 연습실로 향했다.
“난 앞으로 한 달간 너희들을 훈련시킬 함고원이라고 한다. 함쌤이라고 부르도록.”
“네, 함쌤!”
네 명의 아이들은 다들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오늘 배울 건 봉술이야. 특별히 너희들에게 맞게 짧은 봉을 준비했다. 자, 하나씩 받아.”
함고원은 아이들의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봉을 나눠주었다.
아이들의 손이 작기 때문에 봉은 그에 맞춰 일반 봉보다 조금 얇은 편이었다.
“자, 봉 잡는 법부터 알려줄게. 봉의 중간지점에서 바로 아랫부분을 잡는데, 손으로 다 감싸서 잡는 게 아니라 엄지랑 검지로 잡고 나머지 손가락은 살짝 감싸고만 있는 거야. 그래야 봉을 돌릴 때 편하거든.”
함고원은 아이들에게 봉을 잡아보라고 한 뒤 한 명씩 정확한 자세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하준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다며 극찬했다.
“오, 하준이 정확해. 이렇게 잡는 거야. 잘했어.”
“아, 전 봉술 기초는 조금 배웠어요. 이 드라마에서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랬구나! 얼마나 배웠어?”
“하루요. 그냥 오디션 때 보여드리려고 잠깐 준비했던 거라······.”
“아하. 하루면 뭐 여기 애들이랑 별 차이 없겠네. 근데 하루 배웠는데도 기본은 제대로 배웠나봐. 아무튼, 좋아. 아, 하준이 외에 봉술 미리 배워온 사람 있어?”
함고원이 다른 세 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아이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오케이. 그럼 다들 처음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하나씩 알려줄게.”
이민혁은 하준이 봉술을 배웠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가 하루 배웠다는 말에 안도했다.
사실 이민혁은 태권도는 배운지 1년도 넘었고, 봉술도 오늘 연습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미리 배워왔다.
하지만 봉술을 배웠다는 건 비밀로 했다.
비밀로 해야 자기가 천재로 보일 테니까.
“자, 선생님 하는 거 잘 봐. 이렇게 몸에 봉을 스치듯이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가면서 8자를 그린다고 생각하고 돌려주는 거야.”
함고원이 시범을 보이자, 공정환과 서희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탄했다.
“우와!”
“멋있어요!”
“아하하. 역시 애들 반응이 어른들보다 훨씬 좋다니까. 멋있지?”
함고원은 아이들이 신기해하니 기분이 좋은지 한 번 더 멋지게 봉을 돌리며 물었다.
“네에!”
“너희들도 연습하면 이렇게 멋있게 할 수 있어. 자, 한 명씩 해보자. 일단 하루라도 배워본 하준이가 제일 먼저 해볼까?”
함고원은 하준에게 좌우로 봉 돌리기를 한 번 더 보여준 다음 따라하게 시켰다.
하준은 이건 미리 배웠던 거라 손쉽게 해냈다.
“와! 너무 잘했어. 자세가 딱 나오네. 하루 배웠는데 이 정도면 재능이 있구나.”
“요기까지 배웠어요.”
“그래도 하루 배웠는데 폼이 예사롭지 않아. 엄청 오래 배운 사람처럼 자연스러워. 아! 하준이 춤도 잘 추지 참. 그럼 이런 것도 잘하긴 해. 춤을 잘 춘다는 건 몸을 잘 쓸 줄 안다는 거거든. 자, 박수.”
함고원은 하준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면서 칭찬했다.
다음으로 공정환의 차례가 되었는데, 공정환은 굳은 자세로 서서 군인처럼 딱딱하게 팔을 휘둘렀다.
손이나 팔도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해서 봉은 8자를 그리지 못하고 자꾸 중간에 끊겼다.
“몸이 너무 굳어 있어. 좀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하면 좋을 것 같아.”
“저도 아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연습하다 보면 될 거야. 사실 우리는 진짜 액션을 하는 게 아니고 화면으로 봤을 때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걸 연습하는 거야. 그러니까 보기에 자연스럽고 멋있어야 돼. 그걸 염두에 두도록 해. 자, 다음 서희수.”
“네!”
서희수는 앞으로 나와 봉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의욕이 앞서서 봉을 세게 돌리려다가 손에서 봉을 놓치고 말았다.
서희수의 손에서 벗어난 봉은 하준이 서 있는 방향으로 휘릭 날아갔고, 함고원은 얼른 봉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봉은 함고원의 손에 닿지 않았다.
대신 하준이 눈앞에 날아온 봉을 왼손으로 탁 잡아냈다.
“오! 다행이다. 잘했다, 잘했어. 못 잡았으면 다칠 뻔했는데. 하준이 반사신경이 엄청 좋구나!”
함고원은 안도하며 하준을 칭찬했다.
서희수는 얼른 하준에게 달려와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미안······. 내가 너무 세게 봉을 돌렸나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하준이 빙긋 웃으며 서희수에게 봉을 돌려주었다.
‘쳇. 나도 저 정도는 잡을 수 있는데.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구만 왜들 호들갑이래.’
이민혁은 하준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봉 돌리기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민혁이 해보자.”
이민혁은 의기양양하게 봉을 들고 나와 기본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봉을 돌리기 시작하려는데 손목이 콱 쑤셔왔다.
“아악.”
“민혁아, 왜 그래? 손목 삔 거야?”
함고원이 다급히 다가와 이민혁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민혁은 함고원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시 해볼게요.”
이민혁은 사실 어제도 봉을 돌리는 연습을 했다.
봉 돌리기는 손목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연습하면 손목이 아플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손목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안 돼. 하준이보다 잘해야 돼. 제발 지금은 아프지 마라.’
이민혁은 아프더라도 봉 돌리는 것만이라도 끝나고 아프라고 속으로 간절히 자기 손목에 부탁했다.
이민혁은 다시 자세를 취하고 봉 돌리기를 시작했다.
“윽.”
하지만 한번 통증이 온 손목은 계속 통증이 이어졌다.
“민혁아, 운동 안 하다가 해서 근육이 놀랐나보다. 민혁이는 오늘은 그만하자.”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저 운동 많이 하거든요?”
함고원이 말려도 이민혁은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계속된 손목 통증으로 이민혁은 봉을 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함고원은 이민혁의 봉을 강제로 빼앗았다.
“너 그러다 큰일나. 넌 오늘 연습하지 말고 옆에서 구경만 해.”
“이씨······.”
이민혁은 자기 실력을 뽐내지 못한 것이 짜증이 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목이 아프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힘없이 벽에 기대앉아 삼총사의 수업을 구경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자, 다음으로 머리 위로 봉 돌리기 가르쳐줄게.”
“오, 하준아, 이것도 배운 거야? 아니야? 와, 근데 하준이는 정말 운동 신경이 뛰어나구나!”
“다음은 공격 배워볼 건데, 짧게 치는 단타부터 해보자.”
“역시! 다들 하준이 하는 거 잘 보고 따라해봐. 이렇게 하는 거야. 오, 그렇지! 정환이도 슬슬 자세 나온다. 희수는 힘이 좋아서 돌리는 거보다 단타를 잘하네!”
이민혁은 맨날 하준에게 연기로 밀려서 오늘 액션 스쿨에서는 본때를 보여주리라 벼르고 왔는데, 이렇게 앉아서 하준을 칭찬하는 소리만 주야장천 듣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 질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이민혁은 입이 댓 발 나온 채 멍하니 삼총사가 연습하는 걸 지켜보았다.
봉술 연습이 끝나고, 다음으로 연습하게 될 것은 와이어 액션이었다.
이민혁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와이어 액션은 손목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와이어 액션은 민혁이도 같이 해보자.”
함고원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이어 액션을 연습하기 위해 아까 성인들이 연습하던 넓은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이 와이어를 달고 채비를 하고 있자, 연습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배우들이 아이들에게로 다가왔다.
“<신비종> 주연 애들이죠?”
“하준아, 안녕! 반가워!”
“귀여워라! 하준아, 이따가 누나랑 사진 찍어주라, 응?”
그들은 다들 하준만 알아보았다.
공정환과 서희수는 원래 아역 배우가 아니었고, 이민혁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으니까.
배우들은 하준에게 인사하더니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간식을 이것저것 잔뜩 챙겨주었고, 와이어 액션 연습도 잘하라며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하하, 역시 하준이가 인기 엄청 많네. 간식은 이따가 와이어 액션 연습 끝나고 먹자. 괜히 먹고 하면 속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가보자.”
함고원은 삼총사와 이민혁을 데리고 바닥에 푹신한 매트가 깔린 곳으로 이동했다.
배우들은 꼬맹이들의 와이어 액션이 궁금했는지 주변에 앉아 쉬면서 아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