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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만 걷는 천재스타-47화 (47/150)

47화

47화

주연들 외에는 특별히 기사가 많이 나진 않았기 때문에 하준에게 대부분은 잘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남은호는 성인 베토벤의 트리플 캐스팅 배우 중 한 명이라서 기사로 얼굴을 접했기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익숙했다.

그래서 하준은 그의 옆에 앉기로 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준이 남은호를 따라 발을 한 발짝 옮기는데, 뒤쪽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하준의 다른 손을 탁 잡았다.

“잠깐만, 하준아. 내 옆에 앉는 건 어때? 형이 하준이 엄청 좋아하는데!”

뒤를 돌아보니, 하준에게도 꽤 익숙한 얼굴이다.

그는 바로 가수 출신 뮤지컬 배우 정해진.

정해진은 가수일 때부터 인기가 많아서 티켓파워가 센 편이었다. 그래서 뮤지컬 쪽으로 옮겨오자마자 곧바로 주인공을 맡으며 꽤 잘 나가고 있었다.

이번 뮤지컬도 정해진은 맨 처음부터 주연으로 캐스팅이 확정되어 있었다.

남은호 같은 경우는 원래 뮤지컬 배우로 시작한 사람으로, 단역, 앙상블, 조연을 거쳐 이번에 처음으로 주연으로 캐스팅된 배우였다.

그는 이번에 뛰어난 피아노 실력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주연을 맡게 되었다.

“어······.”

난감해진 하준은 두 사람에게 양손을 빼앗긴 채 중간에서 망설였다.

그때, 여주인공 조세핀 역할을 맡은 배우 중 하나인 윤아영이 불쑥 나타나 절충안을 냈다.

“그냥 지금 그대로 셋이 쫘라락 앉으면 되겠네. 안 그래?”

“아, 그럼 되겠다. 누나, 좋은 생각이야!”

정해진은 윤아영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그러자, 윤아영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으, 징그러! 야, 넌 어째 아직도 그렇게 능글능글하냐? 기름지다, 기름져.”

“아, 왜? 내 팬들은 내가 윙크하면 얼마나 좋아한다구.”

“그러니까 그건 네 팬들한테나 가서 해. 난 정중히 사양한다. 아, 하준이한테 느끼한 거 가르치진 말고. 하준아, 안녕! 귀여워라.”

윤아영은 정해진에게는 허물없이 틱틱대며 구박을 했지만, 하준에게는 돌변해서 활짝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정해진과 윤아영은 이미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본 터라 꽤 친했다.

물론 윤아영은 남은호와도 친했다. 그녀는 남은호처럼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로 시작한 사람이었으니까.

윤아영이 남은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학벌도 좋고, 얼굴도 예뻐서 금방 주연급이 되었고 현재는 탑급 뮤지컬 배우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하준이 보기에 남은호와 정해진은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준의 양옆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오로지 하준에게만 말을 걸 뿐.

“하준아, 너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친다며?”

남은호가 하준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아, 엄청 잘 치는 건 아니구요, 이번에 공연할 수 있을 정도는 쳐요.”

“음악감독님이 엄청 칭찬하시던걸?”

“그러셨어요? 헤헤······. 아! 근데 은호 형도 피아노 잘 치신다고 기사에서 봤어요. 맞죠?”

“아, 내가 피아노 덕에 이번에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됐지.”

“아하, 축하드려요. 저도 형 피아노 치는 거 보고 싶어요.”

“정말? 하하. 우리 본격적으로 연습하면 볼 수 있을 거야.”

남은호와 하준이 피아노를 공통점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정해진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하준아, 너 노래 진짜 잘하더라. 범우 형 콘서트에도 게스트로 나온다며? 나도 범우 형이랑 친한데!”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노래 엄청 잘하세요. 범우 삼촌 콘서트는······.”

하준이 말을 이어가려는데, 정해진이 하준의 말을 끊었다.

“아니, 왜 나는 선배님이야? 나한테도 형이라고 해줘.”

남은호한테는 형이라고 했는데, 자기한테는 선배님이라고 해서 삐진 모양이었다.

“아, 그, 선배님은 원래 가수셨어서 저도 모르게······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요. 해진 형.”

“그래, 훨씬 듣기 좋네. 하하. 아, 네가 범우 형이랑 듀엣한 거 너무 좋았어. 그래서 이번에 어린 베토벤에 네가 캐스팅 됐다는 얘기 듣고 진짜 잘 됐다 싶었지.”

“감사합니다.”

남은호는 인기도 많고 항상 주연을 맡는 정해진의 말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준과 정해진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변의 아는 사람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잠시 후, 모든 배우들이 연습실에 모였고, 총감독인 송석원과 음악감독, 무대감독, 안무감독 등 주요 스태프들이 앞쪽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이번 <루드윅 반 베토벤>의 총감독 송석원입니다.”

송석원 총감독을 필두로 주요 스태프들이 각자 자기 소개를 간단히 했고, 인사를 할 때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스태프들의 소개가 끝나자, 이제 배우들의 자기소개 차례가 되었다.

“먼저 주인공인 베토벤 역들, 조세핀 역들 앞으로 나와주세요. 어린 베토벤들도요.”

송 감독의 지시에 따라 주인공들이 앞으로 나갔다.

베토벤, 어린 베토벤, 조세핀은 모두 트리플 캐스팅으로 총 9명.

뮤지컬 공연은 한번 시작하면 한두 달 정도 거의 매일 공연하게 되는데, 이 공연들을 모두 한 명의 주연이 소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보통 주연은 서너 명 캐스팅해서 돌아가면서 공연을 했다.

어린 베토벤 역할 역시 트리플 캐스팅으로 하준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루드윅 반 베토벤>에서 루드윅을 맡은 이종훈입니다. 반갑습니다.”

베토벤 역들이 먼저 인사를 시작했다.

사실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성이고 우리가 아는 베토벤의 이름은 ‘루드윅’이었기에 극 중에서 베토벤은 루드윅으로 불렸다.

“안녕하세요. 루드윅 역할을 맡게 된 정해진입니다. 함께 즐겁게 연습하고, 좋은 공연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루드윅 역을 맡은 남은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베토벤 역할을 맡은 세 사람은 모두 출신이 달랐는데, 이종훈은 배우 출신, 정해진은 가수 출신, 남은호는 순수 뮤지컬 배우였다.

그래서 은근히 세 사람은 경쟁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종훈이나 정해진은 기존에 가진 팬덤이 있었고 남은호는 거의 팬덤이 없었기 때문에, 남은호는 이번에 어떻게든 뛰어난 모습을 보여서 주연급으로 자리를 잡아야 했다.

다음으로 여주인공인 조세핀 역들이 인사했고, 마지막으로 어린 베토벤 역들이 인사할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어린 루드윅 역할을 맡게 된 하준입니다. 뮤지컬은 처음 해보는 거라 걱정이 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하준이 인사하자,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큰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귀엽다!”

“반가워!!”

하준은 열렬한 환호에 다시 한 번 배꼽인사를 했다.

하준에 이어 다른 어린 베토벤 아이들도 자기소개를 했고, 배우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주연급의 자기 소개 후에는 조연들, 앙상블 등을 맡은 배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소개와 인사를 했다.

하준은 그들이 소개할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역과 이름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배우들 외에 피아니스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성인 베토벤들을 대신해 무대 아래서 피아노를 쳐주는 역할이었다.

물론 남은호는 피아노를 잘 쳤기 때문에 모두 직접 연주할 예정이었지만, 피아노를 잘 못 치는 정해진은 모든 곡을 이 피아니스트가 대신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아노의 건반이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돌려놓고 연주하는 척을 하면, 피아니스트가 연주해서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종훈 역시 너무 어려운 곡은 치지 못했기에 일부는 피아니스트의 도움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가볍게 대본 리딩만 좀 해보고 갈게요.”

송석원 총감독의 말에 다들 대본을 악보 보면대에 펼쳐 놓았고, 곧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주연들이 여럿이었기에 송 감독은 누가 어떤 조합으로 연기를 할지 정해주었다.

“먼저 하준, 남은호, 윤아영 조합으로 시작합시다.”

가장 첫 장면은 베토벤의 가족들이 함께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척하며 합창하는 장면으로, 베토벤의 가족과 베토벤의 환경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배우들은 무반주로 가볍게 각자의 파트를 돌아가면서 노래했다.

하준은 단독으로 부르는 파트는 없어서, 합창 부분만 조용히 함께 불렀다.

다음 장면은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이 모차르트의 소식을 듣고 와 어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연습하도록 강요하는 장면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를 연주해서 돈을 엄청 벌었단다! 너도 열심히 해서 제 2의 모차르트가 되는 거야! 자자, 얼른 피아노 앞에 앉아.”

“모차르트는 신동이잖아요. 전 못해요.”

하준이 기죽은 목소리로 연기했다.

“아니야, 루드윅!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우리 베토벤 집안은 대대로 음악을 해왔잖니. 네 피엔 음악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넌 모차르트를 잇는 음악의 신동이 될 거야. 명예와 부를 얻는 거지!”

요한 역의 배우는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다음 노래인 ‘명예와 부를 위해’를 열창했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지문으로 ‘어린 베토벤이 피아노를 치고 있고 요한은 그걸 감상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피아니스트가 가볍게 피아노를 쳐 주었고 요한은 중간 중간 연주를 끊고 “다시! 다시!”를 외쳤다.

“네, 좋습니다. 다음.”

송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다음 장면은 하준이 오디션을 봤던 어린 베토벤이 피아노를 치면서 ‘작곡은 나의 즐거움’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하준이 막 연기를 시작하려는데, 정해진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감독님, 이 곡은 아역 오디션 곡이었던 걸로 아는데요, 피아노도 있겠다, 하준이가 직접 피아노 치면서 부르는 거 보고 싶습니다. 그쵸, 여러분?”

“네! 맞아요. 보고 싶어요!”

정해진의 말에 다른 배우들도 환호하며 동조했다.

그러자 송 감독이 하준에게 물었다.

“하준아, 할 수 있겠니?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돼.”

사실 피아니스트가 중간에 피아노 연주를 넣어주긴 하지만, 자기 호흡과는 맞을지 몰라서 하준도 속으로 차라리 혼자 다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안 그래도 피아노랑 노래를 같이 연습해 둬서 따로 하려니까 좀 어색할 것 같았거든요.”

“와아!!”

하준의 승낙이 떨어지자, 배우들과 구경하던 스태프들까지 환호했다.

하준이 피아노로 다가가자, 피아니스트는 얼른 일어나 하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하준의 ‘작곡의 나의 즐거움’을 본 사람은 심사위원이었던 주요 스태프들 대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대부분의 스태프들과 여기 있는 배우들, 그리고 피아니스트까지 모두 기대에 한껏 부푼 표정으로 숨을 죽이고 하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준은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떨리긴 했지만, 연습을 많이 해서 몸에 익은 터라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준은 운명 교향곡의 도입부를 치며 강렬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곧이어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하준의 맑은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연습실의 공기를 황홀하게 바꿔놓았다.

연습실 안의 사람들은 배우건, 스태프건, 피아니스트건 다들 입을 반쯤 벌린 채, 하준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 누가 막아도~ 설사 내 귀가 먼다 해도~ 난 작곡을 할 거야~ 작곡은 나의~ 즐거움이니까!”

하준이 노래를 끝마치자, 연습실의 황홀했던 공기는 서서히 사라졌고, 마법에 홀린 듯 멈췄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법에서 풀리며 감탄을 토해냈다.

“와······!”

“미쳤다······.”

“너무 잘해······.”

조용한 감탄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박수갈채와 연습실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와아!! 하준이, 미쳤다!”

“진짜 잘한다! 진짜 베토벤 같았어!”

“대박이다, 대박!”

하준은 기립박수를 받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송석원 총감독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웃으며 한마디 했다.

“자, 다들 하준이 정도로 잘 해야 됩니다. 어린이보다 못하면 안 되잖아요. 아시겠죠?”

“아아······.”

송 감독의 말에 한 차례 탄식이 나왔지만, 하준에게 자극을 받긴 받았는지, 곧 배우들의 눈빛이 돌변하며 더 열정적으로 대본 리딩에 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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