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35화
사실 이 대표는 하준이 원하는 옷을 주려고 일부러 코디를 해 달라는 핑계를 댄 것이었는데, 하준이 코디를 너무 잘해서 코디 아이디어까지 얻게 된 것이었다.
“응, 이거 다 네 거야.”
“아니에요. 이건 너무 많아요······.”
“하준이한테 고마워서 꼭 주고 싶어. 그리고 이 옷들 하준이가 입어주면 자연스럽게 우리 옷 홍보도 되는 거니까 전혀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원래 연예인들한테 의류 업체들에서 홍보해달라고 옷 협찬해주고 그래.”
이 대표는 하준이 이 옷들을 다 받아도 되는 나름의 이유를 붙여주었다.
하준은 홍보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하니 더는 거절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열심히 입고 다닐게요.”
“응, 고마워, 우리 모델.”
이 대표는 많은 옷들을 잘 챙겨갈 수 있도록 커다란 캐리어도 2개나 준비해주었고, 직원들이 하준의 차에 직접 옷이 담긴 캐리어를 실어 주었다.
“그럼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참, 그리고 이거······.”
이 대표는 봉투를 2개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최선희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아, 하나는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이고요, 다른 하나는 뷔페 포함 호텔 숙박권입니다. 놀이동산은 신나게 놀라고 준비했고, 호텔 숙박권은 쉴 때 호캉스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어머, 옷도 이렇게 많이 주셨는데······.”
최선희는 거절하려다가 하준을 위한 선물이니 하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하준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놀이동산······! 와······.”
분명 놀이동산에 무척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때, 이 대표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건 우리 회사 직원들한테도 자주 주는 선물이에요. 하준이는 우리 회사 모델이니까 직원이나 다름없죠. 그러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회사 복지 같은 것이니까요. 하준아, 이거 가지고 가서 신나게 놀아. 알겠지?”
이 대표가 하준에게 봉투를 건네자, 하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봉투를 덥석 받았다.
그러고는 봉투가 2개라 그런지 배꼽인사를 2번 했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재밌게 놀게요.”
최선희는 하준이 놀이동산을 엄청 가보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조만간 날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다음 날 하준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노은지 작가와의 미팅을 위해 최선희와 함께 MBS 방송국으로 향했다.
“하준아, 정말 괜찮겠어?”
방송국으로 가는 도중 최선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괜찮아, 엄마. 근데 엄마 그거 벌써 3번째 묻는 거야.”
“네가 힘들까 봐 그렇지. 엄마도 예전에 연기해봐서 아는데, 어두운 역할은 그 잔상이 오래 남는단 말이야.”
최선희가 걱정하는 이유는 이번 노은지 작가의 드라마에서 하준이 맡을 역할이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난 1화에만 출연하는 거니까, 하루 이틀이면 촬영 다 끝나잖아. 엄마, 아역은 어릴 때만 할 수 있는 거고, 이런 역할도 자주 있지 않으니까 난 경험해보고 싶어.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싫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정말 괜찮아. 엄마랑 아빠가 있으니까. 난 너무 행복한 아이라 이런 슬픔에 더이상 휩싸이지 않거든.”
최선희가 계속 괜찮냐고 물어서 지겨울 법도 한데, 하준은 최선희가 자기를 걱정해서 그런다는 사실을 알기에 엄마를 안심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어른스러운 하준의 말에 최선희는 감동을 받았다.
“어머······. 그래, 알겠어. 우리 하준이 벌써 많이 컸구나.”
최선희는 하준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깨닫고 하준을 믿기로 했다.
방송국에 도착해 약속된 장소로 들어가자, 노은지 작가와 이번 드라마의 책임프로듀서인 함재건 CP, 연출을 맡은 김학수 PD가 미리 와서 하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하준이 왔구나! 안녕. 안녕하세요, 어머님.”
노 작가가 가장 먼저 하준을 반기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하준의 인사에 노 작가는 활짝 웃으며 귀엽다는 듯 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을 소개했다.
“실제로 보니까 더 멋있고 귀엽네. 자, 이쪽은 함 CP님, 김 감독님이셔.”
하준은 함 CP와 김 PD에게도 인사하고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하준이 눈치를 보아하니, 자신을 캐스팅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쪽은 노 작가님 같았다.
왜냐하면 다른 두 사람은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준에게 막 적대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노 작가님에 비해 딱딱한 느낌이 있었다.
“하준아, 1, 2부 대본 봤지?”
노 작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네, 봤어요.”
“어땠어?”
“음, 어둡지만 재밌었어요. 초능력이 있는 설정도 좋았고요. 뛰어난 청력을 가진 게 부럽더라고요.”
극중 주인공은 뛰어난 기억력과 청력을 가진 형사였고, 하준은 이 주인공의 아역 역할이었다.
“뛰어난 기억력은 안 부러웠어?”
“아······ 그것도 부러웠어요.”
사실 하준은 이미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부분은 딱히 부럽지 않았지만, 자기도 남부럽지 않은 기억력을 가졌다고 말하기엔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그냥 부럽다고 해버렸다.
“하준이가 느끼기에 어린 태산은 어떤 성격인 것 같았어?”
“음,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청력 때문에 어른들의 모든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사람들을 잘 믿지 않고 의심? 경계? 하는 성격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심성도 많고, 인내심도 있고요.”
“오, 맞아. 역시 연기 잘하는 애들은 캐릭터 분석도 잘한다니까. 그쵸, CP님?”
노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란 듯이 함 CP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죠. 연기 잘하는 게 다 캐릭터를 잘 이해해야 되는 거니까. 근데 또 캐릭터를 잘 이해한다고 꼭 연기까지 잘하는 건 아니기도 하죠.”
“아휴,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하준아, 연습은 좀 해봤니?”
은근히 삐딱선을 타는 함 CP의 말에 노 작가는 살짝 짜증을 내며 답한 후, 하준에게는 얼굴을 바꿔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
“네, 대본 다 외워왔어요.”
“오, 벌써? 잘했다, 잘했어.”
노 작가는 하준을 칭찬했으나, 함 CP는 뭘 벌써 대본을 다 외워왔냐며 구시렁댔다.
함 CP는 하준이 아직 고작 드라마 아역 한 작품, 그것도 사극을 했을 뿐인데 노 작가가 무조건 하준을 아역으로 하겠다고 선언해서 불만이 있는 상황이었다.
노 작가의 고집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고, 하준의 연기에 대한 확신도 아직 없었기에 함 PD는 하준을 조금 고깝게 보고 있었다.
노 작가는 그런 함 CP를 무시하고, 하준에게 연기를 해보라고 주문했다.
“씬 34, 진수정의 집, 수정에게 안겨 있는 태산, 눈물을 삼키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한다. 이 부분 대사 기억해?”
“네, 해보겠습니다.”
노 작가가 장면 설명만 읽어주었는데도 하준은 바로 연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최선희에게 엄마 역할을 부탁했다.
최선희는 하준을 끌어안았고, 하준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내가 다 기억······해. 구멍으로 봤어. 단추 하나가 떨어진 검은색 자켓, 검은색 마스크······, 손등에는 불로 지진 것 같은 동그란 흉터 2개가 있었어······.”
하준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넋이 반쯤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눈물을 삼키는 듯 말을 멈추고 대사를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밖에서는······ 금방 처리된다고 다른 한 사람이 전화로 말하고 있었어. 전화의 상대방은 빨리 처리한 다음에 전화번호 바꾸고 숨으라고 지시했고. ······그 너머에서 검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그리고, 그리고······ 아빠는 마지막에 나만 들리게 말했어. 절대 복수하지 말라고······ 다친다고······ 그냥 내 삶을 살라고.”
마지막 대사를 거의 울먹이듯이 마무리한 하준은 마침내 눈물을 와락 터뜨리며 엄마 품에 머리를 묻었다.
최선희는 비록 연기였지만, 하준의 흐느낌에 마음이 아려와 눈물을 글썽이며 하준을 더 꼭 안았다.
하준이 흐느끼는 얼마간 미팅장에는 하준이 흐느끼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정적의 이유는 하준의 연기를 본 노 작가, 함 CP, 김 PD가 모두 놀라움에 입을 쩍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하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을 때,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함 CP였다.
“노 작가, 미안합니다. 노 작가의 안목을 믿지 않은 것을 사과하겠습니다.”
함 CP는 대뜸 노 작가에 사과부터 하더니, 눈물을 닦고 있는 하준에게도 사과했다.
“미안, 하준아. 네가 이 정도일 줄을 정말 몰랐어. 너 정말 연기 천재구나!”
“감사합니다.”
하준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하준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사람이 자기 연기를 보고 이렇게 태도가 180도 돌변하자, 기분이 좋으면서 왠지 모를 희열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자기가 이런 훌륭한 재능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또 기뻤다.
“하준이는, 진짜네요. 와······ 이 긴 대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운 것도 신기한데, 목소리 떨림까지 연기하고, 숨소리 하나 허투루 쉬어진 곳이 없이 완벽하네, 완벽해!”
김 PD 역시 그야말로 극찬을 쏟아냈고, 노 작가도 자기가 뭐랬냐는 듯 벅찬 표정으로 칭찬을 이어갔다.
“표정은 또 어떻고요. 다들 보셨죠? 이렇게 모든 걸 다 갖춘 아역배우 찾기 쉽지 않아요. 하늘의 별 따기, 아니다, 하준이 외에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니까요!”
함 CP와 김 PD는 이번에는 밝은 표정으로 노 작가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끄덕임을 보여주었다.
“어린 애한테 이런 말하기는 좀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하지만, 하준이의 연기는 오랫동안 연기해서 생긴 깊은 내공이 있는 느낌이에요.”
“맞습니다. 이건 타고난 연기 천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비주얼도 타고났고요.”
“노 작가가 역시 안목이 있군요. 뭐, 이건 이제 필요 없겠어요.”
함 CP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A4용지 여러 장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이 A4 용지들은 하준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들 경우를 대비해 그동안 검토해오던 아역 배우들의 프로필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그런데 하준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연기력을 입증해 보였으니 더이상 이 프로필들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다들 작가님의 이야기에 놀라고, 하준이의 연기력에 또 한 번 놀랄 겁니다. 난 이렇게 시청자들 놀래키는 게 너무 좋더라. 하하.”
김 PD가 껄껄 웃으며 벌써부터 기대감을 표출했다.
“감독님이 연출도 잘해주실 거잖아요? 그럼 우리 드라마 진짜 대박나겠어요. 호호.”
노 작가까지 함께 김칫국을 마셨고, 미팅장의 모두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대본 리딩 때 뵙겠습니다.”
미팅을 마친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하자, 이번에는 아까 하준이 들어올 때와는 달리 김 PD와 함 CP도 노 작가처럼 하준에게 달려와 적극적으로 배웅을 해주었다.
“잘 가, 하준아. 대본 리딩이 기다려진다. 나머지 연기들도 너무 보고 싶어서 말이야.”
“잘 부탁한다, 하준아.”
“조심해서 가고, 대본 리딩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번에도 연기력으로 사람들을 홀딱 홀려버린 하준은 최선희의 손을 잡고 방송국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