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5화
리딩실 문을 열자마자, 안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윤기철과 하준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먼저 사람들은 감독인 윤기철에게 인사를 한 뒤, 곧바로 하준에게 관심을 보였다.
”얘가 걔죠? 안녕?”
“와, 애가 진짜 잘생겼네요!”
“너무 귀여워요. ‘누나’라고 해볼래?”
“꺄아, 저 눈망울 봐. 깨물어 주고 싶네!”
“이렇게 멋있는데, 연기도 엄청 잘한다면서요?”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너무 많은 관심을 받으니 하준은 자동적으로 윤기철 뒤쪽으로 몸이 움직였다.
“다들 진정해. 애가 무서워하잖아. 하준이에 대해 내가 간략하게 설명해 주자면, 하준이는 잘생겼고, 귀엽고, 연기도 엄청 잘해. 됐지?”
“와, 연기 정말 기대돼요.”
“김지숙 선배님이 너무너무 예쁘고, 연기도 너무너무 잘한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데, 빨리 보고 싶어요.”
하준이 맡게 된 ‘도진’ 역은 거의 한 달 만에 확정된 아역이었다.
한 달 전에 모든 역할이 캐스팅 되었는데, ‘도진’ 역만 딱 맞는 배우가 없어서 영화 촬영을 진행하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들 이 아역 배우가 반가울 수밖에.
“자, 하준이는 여기 내 옆에 앉으면 돼.”
윤기철은 하준이 사람들을 낯설어 할 것을 염려해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하여 홍 피디, 감독인 윤기철과 하준은 흔히 왕 자리라 불리는 긴 테이블의 짧은 면에 함께 앉게 되었다.
원래 시나리오 작가가 있으면 이 자리에 같이 앉게 되는데,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는 감독인 윤기철이 직접 썼기에 작가 자리는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테이블의 긴 양쪽 면에는 배우들이 줄지어 앉았는데, 관례적으로 감독에게 가까운 쪽에 중요한 배역들이 앉고, 멀어질수록 조연들이 앉았다.
“안녕? 네가 하준이구나. 내가 도진이 아빠 역할을 맡은 차우민이야. 반갑구나.”
감독과 피디의 가장 가까이 앉은 주연배우 차우민이 하준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차우민은 이번 윤기철의 영화 <죽지 않는 백화점>에서 좀비가 가득한 백화점에 갇힌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찰특공대원 안주환 역을 맡았다.
“안녕하세요, ······아빠.”
하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차우민의 손을 잡았다.
“하하, 진짜 너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다. 잘해보자.”
“네.”
차우민은 하준이 귀여운지 호탕하게 웃으며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민 씨는 요즘 부쩍 아들, 아내 이런 얘기 많이 하던데, 결혼하고 싶나 봐?”
얼마 전 차우민의 인터뷰가 떠오른 윤기철 감독이 웃으며 물었다. 차우민은 아내 역으로 나오는 김지숙과 동갑인 38세로, 미혼이었다.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이번 겨울은 옆구리 시려워 죽겠네요. 이번 영화 크랭크 인 기다리느라 쉬어서 그런가······.”
“미안하게 됐어. 우리 우민 씨가 대배우라 캐스팅도 많이 들어왔을 텐데. 일정 차질 생긴 건 아니지?”
윤 감독이 우민을 띄워주며 기다림에 지쳤을 그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다음 작품 여유 있게 잡아놔서 이제부터 달리면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뭐, 저도 오랜만에 푹 쉬어서 컨디션도 좋고요. 안 바쁘니까 잡생각이 많이 들어서 외로웠겠죠. 이제 바빠지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컨디션 좋다니 다행이네. 이제 정말 달려야 하거든.”
원래 작년 12월 초에 촬영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벌써 오늘이 1월 10일이었다.
윤 감독은 영화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아역 배우 캐스팅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니 앞으로는 별문제 없이 촬영을 쭉쭉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잠시 후, 모든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죽지 않는 백화점>의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첫 장면은 차우민이 경찰특공대로서 동료들과 편의점 인질 사건을 진압하는 장면이었다.
차우민이 연기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댔다.
대본 리딩 현장 사진은 홍보용으로 기사를 내기 위한 사진이었다.
하준은 차우민의 박력 있는 연기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나중에 자기도 어른이 되면 저런 멋있는 연기를 하게 될까 상상하면서.
“다음, 씬 15 들어갈게요. 안주환의 집, 늦은 밤,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주환, 아들 도진을 보고 반색한다.”
드디어 하준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왔다.
다른 배우들은 하준의 연기를 보고 싶어서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하준을 쳐다보았다.
먼저 차우민이 아들을 보고 반색하는 대사를 했다.
“아이구, 우리 아들!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아빠, 오늘 또 잊어버린 거지?”
하준이 입을 댓 발이 나와서는 성질을 냈다.
“오늘? 오늘, 뭐······?”
차우민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자, 하준이 서운한 감정을 다다다 쏟아냈다.
그것도 대본은 한 번도 안 보고, 차우민만을 쳐다보면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엄마가 아빠가 바빠서 못 온다고, 대신 선물 보내줬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지? 완전 잊어버린 거잖아! 유치원 공연에는 안 와도 졸업식에는 올 거라고 약속했잖아! 아빠, 미워!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으아앙.”
점점 감정이 고조되며 하준의 목소리가 높아지다가, 마지막에 하준은 차우민을 째려보며 원망의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좋아요, 좋아! 하준이도 아주 잘했어.”
숨죽여 하준의 연기를 구경하던 배우들은 윤 감독의 칭찬과 동시에 난리가 났다.
“와아······!”
“진짜 연기 신동이네요, 신동!”
“정말 연기 한 번도 안 해본 애가 저렇게 연기를 한다고요?”
“심지어 저 긴 대사를 다 외워서 하네. 크으.”
“머리도 엄청 좋은가봐. 눈물 연기도 기가 막히고!”
배우들 말고도 벽 쪽에 쭉 둘러앉은 배우들의 매니저들도 감탄사를 내뱉으며 웅성거렸다.
차우민도 꽤나 놀랐는지 입을 떡 벌리며 한마디 했다.
“연기 경력이 15년인 나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하하. 지금도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데, 크면 진짜 엄청나겠어요. 내가 한참 먼저 태어나서 다행이네.”
약간의 과장이 들어있었지만, 그만큼 하준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이었다.
하준은 곧 눈물을 닦고 배시시 웃으며 칭찬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하준의 해맑은 웃음을 놓칠까 싶어 카메라 위치를 빠르게 이동하며 하준을 향해 플래시를 반복해서 터뜨렸다.
기자들도 하준이 심상치 않은 연기력에서 황금빛 떡잎을 알아본 듯했다.
‘신난다!’
하준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칭찬받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자기가 잘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 너무 뿌듯했다.
양부모님과 살았을 때는 뭐든 잘 못한다고 구박을 많이 받았고, 그 결과 스스로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좌절했었기 때문이다.
“조감독, 계속하지.”
윤 감독의 말에 술렁임은 잦아들었고, 다시 대본 리딩이 이어졌다.
그런데 얼마 후 중간 쉬는 시간이 되자, 하준이 윤기철 감독에게 물었다.
“저, 아저······ 아니, 감독님, 왜 다른 아역 배우는 없어요? 대본에 보면 몇 명 나오는 애들 있던데······.”
“아, 그 애들은 잠깐씩 나오는 애들이라서 나중에 촬영장에만 와. 다들 한 장면씩만 나오니까,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거든.”
“아······.”
“왜, 다른 친구들 없어서 심심하니?”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애들도 있을 줄 알았거든요. 괜찮아요.”
솔직히 하준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하준은 보육원에서도 김대욱 때문에 친구가 없었고, 양부모에게 입양돼서는 유치원도 다니지 못하고 거의 집에만 있어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주연 아역 캐릭터는 오로지 하준 하나였다.
그런데 그때, 고등학생 역으로 캐스팅된 20대 신인 여배우 유송이가 하준에게 다가왔다.
“하준아,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누나? 호호. 이모 아니고?”
“누나 몇 살인데요?”
“누나는 22살.”
“음, 그래도 누나예요. 누나 같아 보이니까요.”
하준이 이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어 보이자, 유송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꺄, 귀여워라! 너 연기 정말 잘하더라. 난 그 나이 때 연기 진짜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하준과 유송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여기저기서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배우들은 하준에게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너 8살이라고 그랬지? 연기 진짜 처음 하는 거 맞아?”
“네, 처음 해봐요.”
“와, 천재 맞네! 아, 올해 8살이면 3월에 학교 들어가겠네?”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되도록 촬영은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 아, 근데 엄마는 같이 안 오셨니?”
한 조연 배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냐하면, 아역 배우들은 보통 엄마들이 매니저를 겸해서 항상 애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었다.
하준은 잠깐 뜸을 들였지만 곧 솔직하게 답했다.
“저 부모님 안 계세요.”
하준의 대답에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더니 곧 다들 측은한 눈빛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어엇······ 미, 미안.”
질문을 한 조연 배우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자, 하준은 의젓하게 답했다.
“아니에요. 지금 저는 윤기철 감독님네서 지내고 있어요. 감독님이 엄청 잘해주세요.”
“아하, 감독님이랑 같이 사는구나.”
“8살인데도 애가 의젓하고, 멋있네.”
“하준아, 배고프지 않아? 초코바 먹을래?”
“여기 귤도 있는데, 귤 좋아하니? 귤 먹을래?”
배우들은 하준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잘해주려고 애썼다.
“네, 초코바도, 귤도 다 좋아해요.”
하준은 배우들 한가운데 앉아 초코바도 먹고 귤도 먹고, 사랑도 듬뿍 받았다.
‘다들 너무 잘해주시네. 헤헤.’
또래 친구가 없어도 모두들 자신을 챙겨주니 하준은 심심할 틈도 없고, 행복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윤 감독은, 하준이 배우들 한가운데에 앉아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대본 리딩이 계속되었다.
후반 대본 리딩에서도 하준은 주연인 만큼 분량이 꽤 많았다.
그럼에도 모든 장면을 대본을 보지 않고 술술 해나갔고, 하준이 연기를 할 때마다 탄성과 박수가 뒤따랐다.
“자, 이로써 대본 리딩을 마치겠습니다. 크랭크인 하는 날 봅시다. 오늘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대본 리딩이 끝나자, 배우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하준에게로 또다시 몰려왔다.
“오늘 연기 정말 잘했어. 촬영 날 보자.”
“우리 하준이 보고 싶어서 첫 촬영이 너무 기다려지네.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누나가 그때 맛있는 거 사 올게. 잘 가.”
“안녕, 하준아. 또 보자.”
배우들은 한 명씩 하준에게 인사하고 대본 리딩실에서 퇴장했다.
그런데 일부 매니저들과 기자들은 퇴장하지 않고 윤 감독에게 와서 물었다.
“하준이 소속사 있습니까?”
“혹시 계약 안 했으면, 우리 하이엔터와······.”
“아니지, 우리 CNT엔터랑 계약하는 건 어떠십니까?”
“우리는 아역 배우 하다가 아이돌 쪽으로도 키워줄 수 있는데······.”
매니저들은 얼굴도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는 하준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때.
“강하준 군은 이미 우리 월드 엔터테인먼트 소속입니다.”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최원상 대표였다.
“어? 아저씨, 어떻게 오셨어요?”
하준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그러자 최원상은 하준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하준이 프로필 사진 촬영 바로 가야 하거든. 그래서 데리러 왔지. 가자!”
매니저들은 하준을 놓친 것을 무척 아쉬워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반면 기자들은 하준과 최원상을 붙잡으며 인터뷰를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