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4화
“어이, 최 대표, 잘 지냈지?”
윤기철이 월드엔터테인먼트 대표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윤 감독! 오랜만이야. 나야 잘 지냈지.”
최원상은 불쑥 찾아온 윤기철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은 대학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둘은 힘찬 악수를 나눴다.
“근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지나는 길에 들렀어. 보여줄 사람도 있고 해서.”
“보여줄 사람?”
“응, 네가 아주 좋아할 거야. 앞으로 우리나라 연예계를 사로잡을 꿈나무거든.”
“꿈나무?”
최원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밖에서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왜 저렇게 웅성거리면서 모여 있어? 잠깐만.”
최원상이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기엔 웬 귀엽게 잘생긴 아이가 하나 서 있었다.
직원들은 그 아이를 둘러싸고 귀엽다며 말을 걸고 있었다.
최원상은 아이를 보자마자, 윤기철을 홱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얘가, 그 꿈나무?”
윤기철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철은 하준을 잘 키워줄 수 있는 소속사로 월드엔터테인먼트를 선택했다.
비록 아직은 중소 기획사이긴 하지만, 월드 엔터의 최원상 대표는 인간성도 좋고 믿을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흠, 애가 귀엽긴 한데······. 너도 알잖아, 우리 아역 배우 안 키우는 거.”
“이참에 키워봐. 얘가 무럭무럭 자라서 월드 엔터를 진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줄지 혹시 모르잖아?”
“네가 보기에 얘가 그 정도야?”
최원상은 윤기철이 신인 배우들 중 뜰 인재를 잘 알아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끔 둘이 한잔하면서 기철이 눈여겨보고 있다는 신인배우들은 좀 지나서 보면 급부상해 있곤 했기 때문이다.
“딱 한 번의 기회만 있어도 홈런 칠 타자, 얘가 그런 애일걸?”
윤기철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최원상은 일단 하준과 윤기철을 대표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최원상은 소파에 앉은 하준을 한번 스윽 훑어보고는 물었다.
“이름이 뭐니?”
“강하준이요.”
“그래, 하준아, 넌 뭘 잘하니? 춤? 노래? 연기? 아니면 전부 다?”
“저 연기 잘한대요. 다른 건 못해요.”
“흠, 요즘 연기만 잘해서는······.”
그때, 윤기철이 끼어들었다.
“다른 끼는 없고 연기만 잘하는 애들이 왜 성공 못 하는 줄 알아? 그거, 연기를 웬만큼만 잘하기 때문이야.”
“얘는 그 웬만큼을 뛰어넘는다는 말이야?”
최원상의 물음에 윤기철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 그 뛰어남으로 내 이번 영화에 캐스팅 됐지.”
“설마, 이번에 네가 준비한다던 그 좀비 영화? 제작사 측에서도 결정 난 거야?”
“그럼! 우리 하준이가 메소드급 연기력으로 제작사 모두를 한방에 사로잡았거든.”
“허허, 네가 자꾸 그러니까, 얘 연기 실력이 아주 궁금해지는데? 그럼 한번 테스트해봐도 되겠어?”
“얼마든지.”
최원상은 곧 캐스팅 팀장을 포함한 각 부서의 팀장들을 오디션장으로 모았다.
“아까 그 아이네요?”
“근데요, 대표님, 저희 아역 배우는 안 키우잖습니까?”
“애가 참 아역 배우 뺨치게 잘 생겼긴 한데······.”
최원상이 아역 배우 오디션을 보겠다고 하니, 팀장들이 의구심을 표했다.
“원래 난 식물은 안 키워. 근데 길을 지나는데 황금빛 싹이 보이는 거야. 그럼 자네들이 나라면, 가져가서 키워보겠나, 안 키워보겠나?”
“당연히······.”
“키워봐야죠.”
단번에 설득된 팀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지. 강하준 군, 할 줄 아는 연기 있으면 해볼래요?”
최 대표의 말에 하준은 오디션장에 함께 들어와 있는 윤기철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윤기철이 하준의 옆으로 스윽 와서 물었다.
“제가 강하준 군 상대역 좀 해줘도 되죠?”
최원상이 당연히 오케이했고, 곧 하준의 불꽃 연기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분노 연기.
“아빠, 이 아줌마 누구야?”
“하준아, 이제부터는 이 아줌마가 네 엄마야.”
“아니야! 왜 이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하준이 마치 캐스팅 팀장이 자신의 엄마 자리를 꿰찬 아줌마인 양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밀치는 흉내를 내며 대사를 이어갔다.
“저리 가요. 전 아줌마 싫어요! 난 우리 엄마랑 살 거라고요!”
“너, 아줌마한테 이게 무슨 버릇없는 짓이야!”
“아빠도 싫어! 난 우리 엄마랑 살 거야!”
“아빠 말 안 들을 거야? 엄마는 이제 아빠랑 안 살아. 너 버리고 멀리 떠났다고!”
여기서부터는 하준의 충격받은 연기가 이어졌다.
“아니야, 엄마가 잠깐 어디 갔다가 온다고 했어······. 엄마는, 나 버리고 안 가!”
“진짜 갔다니까! 이제 여기 이 아줌마가 엄마니까, 엄마라고 불러.”
“아니야! 아빠가, 아빠가 엄마 쫓아낸 거지? 나도 엄마 따라갈 거야.”
“이 놈의 자식이. 가긴 어딜 가!”
윤기철이 달려나가려는 하준을 꽉 붙들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하준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오열 연기를 펼쳤다.
“나 엄마한테 보내줘. 엄마한테 갈 거야, 엄마, 엄마아!”
엄마를 찾으며 숨넘어갈 듯 우는 하준을 지켜보는 오디션장의 사람들은 모두들 무척 충격을 받은 표정.
‘아이구, 잘한다, 우리 하준이!’
윤기철은 이제 하준이의 황금빛 떡잎을 다들 알아봤을 거라 확신했다.
“와······ 전, 저렇게 감정 연기 잘하는 애 처음 봤어요.”
“정말, 지금 바로 드라마에 출연해도 손색없는 연기에요!”
“무엇보다 쟤 눈망울이 정말······ 우는 거 마음 아파서 못 보겠어······.”
깜짝 놀란 팀장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하준의 연기를 칭찬했다.
그런데 최원상 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최 대표님은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우리 하준이 연기가 너무 충격적이었나······.”
윤기철이 자신감 넘치게 물었다.
그러자, 최원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구상 중이야. 저 황금 나무를 키우려면 뭐가 필요한지 말이야. 아, 아니다, 그건 회의해서 차차 기획하기로 하고, 일단 다른 데서 먼저 캐가기 전에 우리 회사에 심자, 심어. 김 팀장, 계약서 가지고 내 방으로 와. 윤 감독도 빨리 하준이 데리고 들어와.”
최원상이 후다닥거리며 대표실로 달려갔다.
윤기철은 하준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대표실로 향했다.
“아니 근데, 윤 감독, 어디서 이런 황금 나무를 발견한 거야?”
“햄버거 가게에서. 하핫.”
“햄버거 가게?”
윤기철은 최원상에게 하준을 만나게 된 이야기와 하준의 사정을 설명했다.
“딱한 사정이 있었구만······. 하준아, 아저씨랑 계약하고 나서는 꽃길만 걷자.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하준의 얼굴에 꽃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 계약서는, 여기 보면······.”
윤기철은 하준을 대신해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몇 가지 추가 조건을 제시했다.
“모든 활동은 강하준의 동의하에 진행한다는 조건을 넣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어떤 활동인지 하준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도 추가해주고. 또······, 하준아, 너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거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니?”
윤기철은 하준이 혹시라도 고아라는 것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거나 알려져서 힘들어 할까봐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걸 비밀로 하면, 부모님이 계신다고 거짓말을 해야 되죠?”
“그렇지. 그리고 결국 나중에는 알려지게 되긴 해.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까. 그래도 네가 일단은 숨기기 원한다면 회사 측에서 최대한으로······.”
“그럼 그냥 솔직히 말할래요.”
하준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배웠다.
그리고 부모님이 없는 건 내 잘못도 아닌데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는, 부모님 대신 이렇게 자신을 이렇게 든든하게 돌봐주는 후견인 아저씨가 있으니, 슬플 것도 없었다.
“그래, 대신, 최 대표, 우리 하준이 소속사에서 잘 지켜줘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윤기철은 최원상을 믿지만, 그럼에도 신신당부했다.
“걱정 마.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우리 울타리 안에 들어온 거니까, 책임지고 지켜줄 거야.”
“감사합니다. 저도 꼭 잘 자라서 황금 나무가 될게요.”
“하하. 귀여운 녀석. 그래, 잘해보자!”
최원상은 팔을 엑스자로 꼬아 오른손은 하준에게, 왼손은 하준의 후견인인 윤기철에게 내밀었다.
“잘해보자!”
“네!”
윤기철과 하준도 최원상의 손을 맞잡았고, 세 사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
“하준아, 준비 다 됐니?”
윤기철이 나갈 채비를 하며 하준에게 물었다.
“네, 옷 다 입었어요.”
하준이 대답하더니 곧 윤기철의 아내 최선희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하준은 상의는 옅은 체크무늬 남방에 베이지색 니트, 하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 하준이 너무 멋있는데?”
“그치? 안 그래도 잘 생겼는데, 이렇게 입으니까 장난 아니지?”
최선희가 뿌듯한 표정으로 신이 나서 말했다.
“응, 옷 이쁜 걸로 아주 잘 골랐네. 난 애들 옷은 어떻게 입혀야 할지 모르겠던데, 당신은 어쩜 그렇게 잘 알아?”
최선희는 어제 윤기철이 일을 나간 동안, 하준을 데리고 아동복 매장에 가서 옷을 몇 벌 사주었다.
“사실 나도 애들 옷은 잘 몰라. 그래서 그냥 하준이가 좋다는 거 샀어. 근데 애가 스타일을 아는 거 있지! 패션 센스도 있는 거 같아. 매장 사람들이 다들 막 칭찬하고 난리였어.”
최선희는 마치 자기 자식은 뭐든 잘하는 영재라고 자랑하는 엄마 같았다.
그런 최선희를 바라보는 윤기철은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우리 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사실 윤기철과 최선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둘이 서른일 때 결혼해서, 결혼한 지 10년 차.
돈 벌면 낳자고 미루다가 2년 전 영화 하나가 잘 돼서 아이를 계획했다.
그런데 애가 들어서지 않아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봤더니, 윤기철에게 문제가 있었다.
최선희가 얼마나 아이를 원했는지 아는 윤기철은 미안함에 그녀를 떠나보내려 했었다.
하지만 최선희는 아이보다 윤기철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만 바라보며 살기로 했다.
“여보? 왜 그래?”
최선희가 갑자기 멍하니 있는 윤기철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늦겠다, 가자, 하준아. 다녀올게, 여보.”
윤기철이 최선희에게 가볍게 뽀뽀를 했다.
“응, 잘 다녀와. 하준아, 잘하고 와. 파이팅!”
최선희는 윤기철에게 인사를 한 뒤, 하준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팔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제스처였다.
하준은 금방 눈치를 채고 최선희의 손바닥을 작은 손으로 찰싹 때리며 최선희를 따라 힘차게 외쳤다.
“파이팅!”
하준은 누구와 이런 파이팅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최선희와 하준은 서로 눈을 맞추고 밝게 웃었고, 윤기철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윤기철과 하준은 제작사에 도착해 대본 리딩실로 향했다.
대본 리딩실 문 앞에서 윤기철은 하준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하준아, 오늘 아저씨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랑 스태프들이 모여서 다 같이 연기 맞춰볼 건데, 사람들이 엄청 많을 거야. 카메라도 있을 거고.”
“전에 제가 연기 보여줄 때보다도 많아요?”
“응. 저 안이 거의 꽉 차 있을 거야. 그렇지만,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돼, 알겠지?”
“네.”
“그럼 들어가자.”
윤기철은 한 손으로 하준의 손을 꼭 잡았고, 다른 손으로 문을 힘있게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