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92화 (292/305)

131, 성소 싹쓸이.

131, 성소 싹쓸이.

남천휘에게 있어서 깨달음이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단순히 모르는 것을 아는 수준의 이야기였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하나 강호의 깨달음이란 극한의 경지까지 파고들은 후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천휘는 천하제일이 될 수 있을지언정 천하제일의 사부는 될 수 없었다.

깨달음 대신 퀘스트를 통해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령신을 붙잡고 될 때까지 두들기려 했다. 그 결과 백파신공의 일곱 초식에 대한 틀은 정립할 수 있었다.

하나 초식을 아는 것과 펼치는 것은 별개였다.

익힐 수 있을까?

남천휘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냉정하게 짚어봤다.

평범한 무인과 성장의 궤가 다르지 않던가.

‘과연 그럴까요?’

사령신을 인벤토리에 넣은 사이 재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는 갑자기 튀어나와도 감흥이 없구나.

‘무슨 소리야?’

‘주인님에게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재이는 허공에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

그 안에 혈인도가 생성됐다.

남천휘는 자신의 혈인도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거 뭐?’

‘이것은 백파도 남추의 혈인도입니다.’

‘아닌데.’

재이는 설명 대신 또 하나의 혈인도를 띄웠다.

그리고 그것을 겹쳤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개의 혈인도는 마치 같은 사람처럼 덧씌워지는 것이 아닌가.

‘키와 몸무게, 근육량과 밀집도는 다르지만, 혈도를 통한 혈맥의 구조가 일치합니다.’

재이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남천휘는 그저 자신의 그림자와 같은 혈인도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쪽은 그림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너무 비슷해.’

그 순간 무언가 뇌리를 스쳤다.

백 년 전 남추가 활용했던 시스테이 왜 하필 자신에게 전해졌을까. 남천홍과 남천익도 있고, 전대의 혈족도 있지 않던가.

‘나는 할아버지를 꼭 빼닮은 걸까?’

재이는 잠시 말을 아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또 나왔다!

애매모호한 말투.

하나 한 번 트집 잡기 시작하면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던가. 결국 울며 똥 먹는 기분으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뭐 피의 이끌림이라고 생각하자! 어쩐지 비운고에서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남 같지 않았어.’

재이는 잠시 말을 아꼈다.

반면 남천휘는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지었다.

어찌됐든 사령신을 상대로 수련하는 건 틀린 방법이 아니란다.

그럼 해야지.

‘소환.’

사령신이 허공에서 나무토막처럼 떨어졌다.

녀석은 인벤토리 내부에 적응이라도 한 것일까.

예전과 달리 땅에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쌍심지를 켰다.

“크허허허! 이 개자식아!”

빠각!

남천휘의 주먹이 백파신공의 천(穿)의 묘리로 꽂혀들었다. 사령신은 두 눈을 멀뚱히 든 채 쌍코피를 흘리며 튕겨나갔다.

사령신도 남천휘와 같다.

남천휘가 지치지 않고, 사령신도 죽지 않는다.

하나 두 사람 모두 지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력과 활력은 내공의 양이나 육신의 단련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령신은 인벤토리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강제로 즐겨야 하지 않았던가.

피폐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아으으! 이 비겁한 새끼!”

남천휘는 코웃음을 쳤다.

“너 요즘 나랑 친해지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라. 지금도 검색하면 너한테 죽은 명단이 수백 개나 돌아다녀. 쓰레기 같은 새끼야.”

단순히 정마의 논리로 접근하지 않았다.

남천휘가 겪은 정파의 무인 중 멀쩡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면 겪어 보지 못한 사마외도의 무인 중 쓸만한 자는 또 몇이나 될까.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저 무적자일지언정 사람의 도리로 판단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지 않던가. 최소한 심심하다고 죽이고, 재미있다고 죽여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령신은 최고의 샌드백일 터였다.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대.

쾅!

남천휘에게 있어서 사령신은 이미 죽은 존재였다.

“똑바로 서라. 사령신!”

“크흑, 남천휘.”

“분하냐? 너한테 죽은 이름 없는 마을의 이름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분했겠냐?”

사령신은 코를 훔치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줄 아느냐? 다 이유가······.”

남천휘는 사령신을 걷어차고, 올려치고, 귀퉁배기를 후려갈겼다.

콱콱!

“너희 악당 새끼들은 항상 말이 많아.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더라.”

벌을 줬다.

애초에 이할의 공력도 회복하지 못한 사령신은 남천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팔을 베이고, 가슴을 뚫리고, 목이 삼분지 일이나 잘렸다.

‘피를 저렇게 흘리고도 멀쩡한 걸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지.’

죽을 염려는 없으니 해가 질 때까지 두들겨 팼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사령신은 인벤토리에 넣었다.

남천휘는 늦은 저녁을 차린 후 즉묵노주를 들이켰다.

“하아, 심심한 것 빼면 지상낙원이로다.”

대두동에 발을 들이고 삼일이 흘렀다.

한데 백파신공의 성취는 벌써 1성에 이른 상태였다.

성장 자체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이쯤 되면 농담 삼아 이야기 했던 ‘피의 이끌림’이 진짜로 있을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오늘은 별 일이 없으려나?’

남천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정보창을 띄워 놨다.

당금 강호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무림대회였다.

무림맹은 천중산과 대별산의 중간 지점인 여남의 들판에 거대한 비무대와 연무장을 만들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시가가 만들어졌다.

무인들은 매일 같이 여남으로 몰렸고, 상인들은 큰 이문을 남겼단다.

그리고 곡부남가가 강소성의 패주인 칠계의 복속했다. 사마의는 무림맹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하게 칠계를 재편하고 있었다. 하나 재이가 뿌려놓은 나노플라스트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곡부남가는 산동과 하북 일대, 호북과 안휘성을 넘어 강소성까지 영역에 뒀다. 소혜가 추진하고 있는 무한상사는 하루가 다르게 지소를 확장했고, 최소한 강동 쪽에서는 무림맹의 지부보다 정보의 습득이 빨랐다.

재이의 나노플라스트는 중원과 동해 쪽을 중심으로 퍼져 있다. 그렇기에 서쪽과 남쪽의 소식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신강의 오로목제와 토로번에서 싸움이 일어났어? 전쟁이라도 벌어진 건가?’

만 리 밖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남천휘는 각성의 새로운 정보를 하나씩 살펴보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무림은 오늘도 맑은 뒤 흐림이로구나.’

주인이 숙면을 취하는 와중에도 남위기는 매순간 갱신됐다. 신강의 성도라고 할 수 있는 오록목제가 불탔고, 토로번에서 일어난 전쟁의 불씨가 성 전체로 퍼졌다.

하나 아직 그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

1. 백파신공 14일 차 수련 보고.

- 사령신의 투기는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 그 덕에 아침부터 시작된 싸움은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 백파신공의 숙련도가 2성에 이르렀다.

2, 백파신공 16일 차 수련 보고.

- 백파신공보다 중양칠도에서 실마리를 찾다.

- 결국 중양칠도는 백파신공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화 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 이틀 사이 신공의 숙련도가 3성에 이르렀다.

- 3성에 이르는 순간 스킬 대신 알람이 울렸다.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의 제 3막 신마행의 첫 번째 단락이 완성되었습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결국 제3막 신마행(神魔行)은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통해 백파도 남추의 행적을 쫓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사령신을 통해 3성에 올랐으니 선물이 주어졌다.

◎ 백파도 남추의 생전 영상이 재생됩니다.

남천휘는 재빨리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즉묵노주를 시원하게 들이킨 후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과연 어느 시점일까?’

현재 남추의 영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중원에 첫 발을 들인 시기와 신마대전을 막던 시기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중요했다.

‘가자.’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대화동 주변에 안개가 자욱했다. 사령신의 천사강림보다 짙은 안개의 흔들림에 잠시 시계가 어지럽다.

그리고 안개가 서서히 퍼져나가면서 등장한 건 산 아래 초옥이다. 남추는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채로 초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서 만나 봐도 될까?”

대화의 대상은 분명 재이일 터였다.

허락이라도 받은 걸까.

남추가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래,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어차피 연료도 모으고, 재정비도 하려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해. 그러니까 잠깐 얼굴을 비추고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누구를 보러 가는 거지?’

그 때 초옥의 문이 열리며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남추를 보자마자 경계의 빛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를 등 쪽에 숨긴 채 게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마당 한쪽에 놓인 낫 근처까지 간 후에야 물었다.

“누구세요?”

남춘는 예상 외로 경계하는 여인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아! 여기가 혹시 곡부에서 가장 큰 포목점을 지닌 남 공의 댁인가요?”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하, 저는 남공의 먼 친척입니다.”

남추는 슬쩍 손을 뒤로 하더니 쥐락펴락 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보퉁이가 나타났고, 그것을 낚아챈 후 여인에게 내밀었다.

“상행 때문에 근처를 지나다가 인사차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남공이 계시지 않으면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여인은 굳은 표정을 풀고, 아이를 가슴에 안았다.

“아, 그러시군요. 들어오세요. 남가의 가훈은 손님을 박대하지 않거든요. 하물며 친인을 그냥 보냈다가는 제가 혼쭐이 날 겁니다.”

남추는 빙긋 웃으며 들어섰다.

“큰 포목점을 지니신 것치고는 검소하시군요.”

“돈은 재앙이 근원이니 베풀어야 된다고 배웠거든요. 찬은 많지 않지만, 식전이라면 함께 드시지요.”

여인의 말에 남추는 기꺼이 엉덩이를 붙였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방문인 듯했다.

“이 아이가 초봉이로군요.”

여인은 남추가 아이의 이름까지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연복아. 연복아.”

시동으로 보이는 아이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손님이 오셨으니 가주께 다녀오너라. 이름이······.”

“남추, 남추라고 합니다.”

연복이 싸리문을 열고 나서려던 참이다.

마을 쪽에서 중년의 사내가 헐떡거리며 달라왔다.

“양 부인! 양 부인. 큰일났소.”

“비 총관, 무슨 일이기에 호들갑을 떠시나요?”

하나 여인은 비 총관이 지척에 이르자, 표정을 굳혔다. 머리카락은 산발을 했고, 옷자락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마교, 마교도들이 마을에 들어왔소. 지금 돈이 되는 것은 죄다 뺏고, 거슬리는 자를 모두 죽인다오. 한데 가주께서 막아야 한다고······.”

쨍그랑-

여인이 소반을 떨어트렸다.

“마교라니요. 여기는 산동이잖아요. 천산에 있을 마교도가 만 리 밖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모르겠소. 사마천세가 어쩌고 하면서 갑자기 나타났소이다. 설마 북쪽의 장성이 뚫린 건 아닐지······.”

남추는 수저를 놓았다.

“그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비 총관은 남추를 보고 경계의 기색을 드러냈다.

“누, 누구요?”

“가주의 먼 친척분이세요.”

여인의 말에 비 총관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렇다면 잘 됐군. 이보시오. 양 부인을 부탁하네. 일단 산에 올라가서 숨어 있으시오. 나는 저쪽에 있는 비격문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겠소.”

남추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상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비총관이 말을 보탰다.

“죽는다고. 이 사람아. 어서 피하시오.”

여인의 말에 남추는 쓴웃음을 흘렸다.

손을 쥐락펴락 하는 순간 보퉁이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은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막대가 나타났다.

“저도 살기 위해서는 하는 일입니다.”

그는 싸리문 앞에 서더니 고개를 꾸벅였다.

“남공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기광이 번뜩였고, 문이 닫혔을 때 남추는 보이지 않았다

솨아아아아아-

남천휘는 안개 대신 밤하늘이 다시 등장하는 순간 장탄식을 흘렸다.

“하아, 할아버지가 아니었네.”

즉묵노주를 아무리 들이켜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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