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오늘도 내가 천하제일. (2)
*
성소(聖所).
이것이 남천휘가 검흥주가를 선택한 이유였다.
검흥주가의 성세는 천목십이회 내에서도 중상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 그것은 일반적인 강호의 평가였다.
남천휘만의 평가로 따지자면 천목십이회의 구멍은 다름 아닌 검흥주가인 셈이다.
‘역사가 가장 짧지.’
성소는 시대와 사람의 교류를 통하여 깊이를 더한 장소일수록 획득 시간이 길다. 그런 의미에서 삼십 년 전 개파(開派) 한 검흥주가의 성소가 가장 낮은 등급인 것은 당연했다.
무려 F등급이다.
백 년 역사의 곡부남가가 E 등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 F도 잘 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분명 주변에 성세를 자랑하고, 천목십이회를 통하여 영향력을 미친 사정이 더해졌으리라.
하나 남천휘에게는 F등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검흥주가의 가치는 없다시피 했다.
등급이 낮을수록 획득이 빠른 건 기정사실.
남천휘의 예상대로 검흥주가의 초석에 앉는 순간 성소 획득 시간이 표시됐다.
3시간 45분.
두 시진 남짓한 시간만 버티면 성소가 활성화될 터였다. 그리고 성소의 연계로 인하여 누적된 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검흥주가의 위치는 전략적으로 봤을 때 최고라 할 수 있지.’
천목십이회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검흥주가의 사건이 알려진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 터였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저들은 분명 완벽한 포위망을 통하여 남천휘를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라 믿을 터였다.
하나 남천휘는 정벌대에 호언장담한 것처럼 하루 만에 천목십이회를 병탄할 요량이었다.
‘일거소탕이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소흥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즉묵노주에 비해 취기가 없다시피 했다.
반면 마이와 성시는 적과의 싸움을 대비하여 절제하는 중이다. 하지만 천수련과 연하연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회, 회주! 적입니다. 적이 나타났어요!”
남천휘는 탄성을 내뱉었다.
“호오, 생각보다 빠른 걸?”
“새카맣게 몰려왔습니다. 오백 명도 넘을 것 같아요.”
담장 위에서 밖을 경계하던 오공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회주.”
남천휘는 마이의 부름에 대답 대신 소흥주를 동이 째 기울였다. 그러나 눈으로는 수많은 정보창을 확인하는 중이다.
‘자랑하기 위해 내세운 기록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겠지.’
대부분의 방파는 당연하다시피 성세를 자랑했다.
무슨 대를 구성했고, 어느 무인이 소속됐는지를 내세웠다. 이름값만으로 싸움을 피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위기에 등록된 정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천목십이회의 총원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칠천이라.’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절강성의 폐쇄성으로 인해 천목십이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그렇기에 무인이 되려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니 등록된 명부 외에도 추가 조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천목십이회를 통째로 먹어치우려면 아직 부족해.’
한 번의 승리로 저들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짓밟아야 할 터였다.
남천휘는 손을 내저었다.
“저들이 공세를 취하기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공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지만, 결국 밖을 살피는데 열중했다.
잠시 후 그가 천여 명을 알렸고, 검흥주가 밖은 각양각색의 무복을 걸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어! 가주의 깃발인 것 같은데요. 이제 한 시진하고 이각이 지났을 뿐인데······.”
마이가 침음을 흘렸다.
“흐음, 아무래도 막간산을 지날 때 우리의 행적이 알려진 듯하군. 그렇지 않다면 저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을 리가 없지.”
“회주는 예상했던 것 같은데?”
성시의 말에 남천휘는 부인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장수를 잡아야지요. 가주 깃발이 등장한 이상 곧 모두 모이게 될 겁니다.”
천수련이 맞장구를 쳤다.
“한 몸처럼 움직이기로 맹약을 했으니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겠네.”
“그렇지.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차후에 무슨 불이익을 받을지 알 수 없으니까.”
남천휘는 술잔을 기울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성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한 변동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그렇기에 머릿속으로는 무당산의 진무성흔에서 얻어낸 일곱 개의 난제(難題)를 떠올렸다.
‘중양칠도.’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다.
중양칠도는 백파도 남추가 남긴 것이 아니었다면 곡부남가의 가솔들조차 익히지 않았을 도법이다. 곡부남가 내에서도 남천휘에게 중양칠도가 아닌 북풍대주 조상의 검법을 추천했을 정도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삼류를 갓 벗어난 도법과 진무성흔의 깨달음을 비교하는 것조차 무례한 짓이다.
그런데 닮았다.
단순한 도법의 투로라면 애당초 비교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 다만 중양칠도의 일곱 초식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진무성흔의 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 때는 무슨 마음으로 익혔더라?’
남천휘는 중양칠도의 수련을 떠올렸다.
시스템을 얻은 후에도 비천무상도를 얻기 전까지는 매일 같이 수련을 해왔다. 하나 이류도법을 익혔을 때의 마음가짐이 생각날 리 만무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남천휘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냉정하게 짚어봤다.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초절정을 지나 절대지경에 들어섰음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사령신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
하나 그것은 시스템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다.
또한 사령신의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이가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남천휘의 무위는 강호의 상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수련법이라고 말이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이 상대라면 시스템의 힘으로 패배하지는 않으리라. 하나 승리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처리하려면 제대로 수련을 해야 해.’
시간과 방법이 문제였다.
남천휘가 궁리하는 사이 오공의 일갈이 들려왔다.
“회주! 천목십이회가 모두 모였습니다.”
“깃발이 열한 개야?”
오공은 다급히 외쳤다.
“네. 저 새끼들이 이쪽으로 오는데요. 이러다가 거리를 적당히 좁히면 한 번에 달려들 것 같습니다.”
마이와 성시는 검을 확인했고, 천수련과 연하연은 내공을 운용하여 주독을 빼냈다.
‘2분 남았네.’
남천휘는 시간을 확인한 후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정벌대를 제지했다.
“저 혼자 갑니다.”
“뭐라고?”
연하연은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반말로 외쳤다.
“나 혼자 갈 거야. 마 형, 성 형. 여기를 지켜주십시오. 여기, 이만큼!”
남천휘가 바위를 가리키며 원을 그리자, 정벌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전에서 농성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뻥 뚫린 공간에서 바위를 지키라니 어리둥절할 터였다.
“저 믿지요? 이 바위만 부서지지 않으면 우리가 이깁니다.”
마이는 남천휘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투명하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묘한 눈빛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고금을 통틀어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없을 걸세. 그런 진귀한 경험을 포기할 수는 없지.”
빈말이 아닌 듯 당장 검을 뽑고, 바위를 등지는 것이 아닌가. 성시와 두 여인 역시 바위가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오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마이의 곁에 섰다.
남천휘는 기지개를 켰다.
‘남은 시간은?’
◎ F 등급 성소 ‘검흥주가’와의 동조화가 12초 후 종료됩니다.
‘10, 9, 8, 7, 6······.’
잠시 후 경쾌한 알림과 함께 검흥주가 인근의 지도가 확장됐다. F등급인 만큼 성소의 영역은 정문 밖 삼십여 장도 되지 않았다. 하나 성소와 성소가 연계된 이상 신경쓸 까닭이 없다.
‘성소 잔여 포인트 십팔만.’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내공으로 뿜어낸 소흥주의 주독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한데 희뿌연 주독은 흩어졌음에도 더욱 짙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마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읊조렸다.
“안개?”
오공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거 야 원, 무슨 불어라! 동남풍도 아니고.”
잠시 후 남천휘가 안개에 휘감긴 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천수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중지봉 때와 비슷한 걸요.”
“천 소저, 무슨 의미인가?”
마이의 물음에 천수련은 팔을 들어 힘을 주는 척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곰 같은 힘이 솟는 기분? 하루 종일 싸워도 지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 무조건 이길 것 같은 기분?”
오공은 혀를 내둘렀다.
‘온통 비정상이야. 그나저나 진짜 이 느낌은 뭘까?’
성시가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어쩐지 삼 일 안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도요.”
*
안개가 서서히 뭉쳐든다.
가까운 곳은 흐릿하고, 먼 곳은 짙다.
천목십이회에 속한 무인들은 안개가 자욱할수록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은 이미 검흥주가를 점거한 자들의 면면을 파악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절강성을 쥐락펴락 하기 위해 거미줄과 같은 정보망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잘 됐군.”
“남천휘는 현재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자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잘 됐다는 게요. 놈을 살려뒀다가는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게요. 어차피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강성 밖으로 소식이 나갈 리 없소. 그러니 오늘 놈을 죽이고, 이 자리에서 진실을 묻어버립시다.”
“가능하겠소?”
금의를 걸친 노인이 연초를 깊이 빨아들인 후 연기를 뿜었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이곳에 모인 무인들만 해도 이천 명이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모이겠지. 결국 사는 건 우리가 될 것이외다.”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키득거렸다.
“클클, 림주의 말을 듣자하니 아주 좋은 기회 같구려. 이렇게 된 이상 검후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을 뻔했소.”
금의노인은 연초를 버리며 웃었다.
“그 계집은 주산군도의 보타암에 있다지 않소. 제아무리 검후가 대단하다고 해도 바다 위에서는 한낱 여인에 불과하오. 소산검파와 해염방이 대기하고 있다가 배를 가라앉힌다면 계집도 살아날 방도가 없소.”
적의노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허, 역시 천무호림의 림주는 문무를 겸비한 천하제일의 재사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구려. 가히 천목십이회의 대회주답소!”
“과찬이외다.”
금의노인은 슬쩍 뒤를 가리켰다.
“시작은 여섯 대 정도 보냅시다. 상황을 살핀 후 추가로 무인들을 보내면 될 게요. 벽 단주!”
눈매가 부리부리한 무인이 다가왔다.
“명하시지요. 림주.”
“자네를 수장으로 하여 지금 돌입토록 하게.”
“존명!”
두 노인은 벽 단주를 뒤로하고 막사로 향했다
“따뜻한 차나 한 잔 합시다.”
“그러고 보면 천목십이회의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어차피 검흥주가의 빈 자리를 채우려면 한 번쯤 모였어야 했소. 자, 먼저 들어가시지요.”
“허허, 천하의 천무호림주가 걷어주는 장막이라니. 말년에 이런 호사도 누립니다.”
두 노인이 막사에 들어서는 순간 아홉 명의 노인들이 일제히 아는 척을 했다. 그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수하들이 의자를 가지고 막사로 들어왔다.
“일단 앉아서 얘기합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싸움이 될 테니까요.”
적의노인은 자리에 앉은 후 미간을 좁혔다.
사람은 열한 명이거늘 의자가 열두 개다.
“이런 멍청한 놈들! 검흥주가의 의자는 눈치껏 뺏어야지.”
한데 의자를 가지고 들어온 무인이 냉큼 빈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닌가.
“아! 내 의자야.”
천무호림주는 범상치 않은 청년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너 누구냐?”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제도 천하제일, 오늘도 천하제일, 내일도 천하제일이 될 남천휘라고 한다. 이 늙다리 노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