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북조산(北朝山).
107, 북조산(北朝山).
현월회(弦月會) 탄생!
백여 년 간 정체되었던 산동 강호에 피바람이 불었고, 전통의 강자였던 삼정은 모조리 무너졌다.
황보세가와 신공부의 봉문.
그리고 산동성 동부에서 군림하던 청도문은 아예 문주가 사망한 후 멸문했다. 제아무리 산동성이 강호의 변방이라고 해도 풍부한 물산으로 인해 강호인의 출입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현월회의 탄생은 강호의 이목을 독차지했다.
한 마디로 파란을 일으켰다.
명문거파는 신마대전을 겪었다는 자부심으로 백 년 간 군림하다시피 했다. 변방인 산동은 기득권의 지배체제가 더더욱 공고한 지역이었다.
한데 그런 곳이 불과 반 년 사이에 경천동지할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곡부남가의 약진.
삼정의 몰락과 더불어 현월회의 대두.
강호인의 웅심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산동에서 일어난 나비의 날갯짓에 수천 리 떨어진 사천까지 영향을 받았다. 중소방파들의 이합집산이 격렬해지고, 그 와중에 자부심만 남았던 거대방파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에 들이닥치는 파발은 날이 갈수록 숫자를 더했고, 방파의 움직임은 이내 개인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방구석에서 칼만 갈던 이들이 강호출도를 결심했다. 그리고 허명만 얻었던 이들은 후기지수의 명예를 드높이는 먹잇감이 되었다.
그야말로 백 년 간 고요했던 강호가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남천휘로 인해 만들어진 변화였다.
그렇기에 강호명숙이나, 후기지수들은 남천휘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했다. 하나 남천휘와 현월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현월회의 창립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한데 고요했던 현월회에 바람이 불었다.
시작은 소혜였다.
그녀는 입술이 열리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주목.”
수십 명이 동작을 멈췄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월회주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그녀였다. 게다가 산동성의 상단과 표국을 총괄하여 정보체계를 완성했다. 또한 군사 사마의의 조언자로서 가솔들이 소군사라고 부르는 상황이었다.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매서운 눈매를 지닌 중년인이 포권을 했다.
“존명.”
그는 소혜에게서 등을 돌린 채 수하들을 바라봤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여 절예자(切銳子)라 불리는 그였다.
“십칠 축사와 이십일 축사의 담당자는 나오라.”
두 명의 중년인이 손을 모았다.
“축사의 청결함과 토끼의 발육 상태가 훌륭했다. 가장 상위의 것을 열 마리씩 골라서 내오라.”
토끼 축사의 담당자인 양포와 이자방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절예자는 반대편에 모인 십여 명의 여인과 십여 명의 사내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물을 끓이고, 재료를 다듬어라. 육항! 그대가 직접 감수한 후 밑간까지 책임을 져라.”
주방에서 두 번째 실권을 지닌 육항이 고개를 끄덕인 후 수하들과 함께 이동했다.
절예자는 다시 소혜를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소군사, 계획대로 묘시 말에 조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가하겠습니다.”
소혜는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자른 고기의 결이 살아 있으며, 육즙의 간은 천상의 미주보다 달콤하다지요. 제게 있어서 최고의 숙수는 절예자, 당신입니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남천휘의 식사는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곡부남가는 사내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세 아들은 미혼이었고, 안주인인 안자영은 남운군과 함께 신공부의 재건을 돕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가문 내에서 집안일을 도맡아할 여인이 부족했다. 막 총관마저 집안의 일이라면 소혜에게 물어보라며 손사래를 치는 형국이다.
그렇기에 소혜는 큰일을 마무리한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잠깐 쉴 수 있을까?’
하나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소군사, 이것 좀 봐봐.”
군사 사마의가 죽간을 한 아름이나 내려놨다.
“사 군사까지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까?”
소혜의 말에 사마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하! 좋잖아. 동질감도 느껴지고. 그나저나 이것 좀 살펴봐. 동문의 비사문과 운중방의 계보도일세. 비사문의 총관인 견부와 운중방의 부방주인 견이는 사촌 지간이야. 한 마디로 비사문과 운중방은 한 몸일 수도 있다는 거지. 한데 한쪽은 현월회에 가입을 했고, 한쪽은 안했어. 한 곳만 가맹비를 내고, 두 곳 모두 현월회를 뒷배로 삼으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네요.”
“그렇군.”
사마의는 소혜의 싸늘한 눈빛에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하찮은 일거리로 붙잡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함께 자리할 시간조차 뺄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은 바빴다.
“끝인가요?”
소혜의 힘 빠진 한 마디에 사마의는 슬그머니 죽간을 주워들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사 군사.”
사마의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남천휘가 현월회의 이름을 허락했을 때만큼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공자께서 군사를 만나 자방이나 공명이 부럽지 않다고 하셨어요. 이제 공자는 혼자의 몸이 아니라 일문을 이끄는 수장이 되셨잖아요. 그러니 군사께서 큰 그림을 그리고, 음양으로 보필을 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마의는 소혜의 진중한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크흠, 주군께서 그리 말씀하셨던가.”
소혜의 눈동자가 슬쩍 돌아갔다. 하나 감격에 겨워 있던 사마의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공자는 지금도 불철주야 큰일을 하시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오늘도 밤새 거처를 비우셨잖아요. 잠시 후면 날이 밝을 것이니 군사께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으면 좋겠네요.”
“크흠.”
“동문의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시고, 산동을 넘어 중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밑그림을 그려주세요. 그것이 곡부남가의 가솔로서 군사께 드리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사마의의 패배였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처소로 돌아갔다.
소혜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한 놈이 갔으니 다른 놈이 올 차례였다.
아니나다를까 모퉁이를 돌자마자 검을 휘두르고 있는 양대안이 나타났다.
“엇! 소군사. 좋은 아침입니다.”
“이런 곳에서 수련을 하시는 건가요?”
황보세가에서 현월회에 내어준 연무장만 해도 다섯 곳이다. 한데 은밀하고, 조용한 곳을 내버려둔 채 주방 근처에서 수련을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양대안은 호방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갑자기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무인에게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지요. 장소는 중요치 않습니다.”
소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그럼 계속하세요.”
양대안은 소혜가 발길을 돌리려하자, 황급히 뒤따랐다.
“아! 소군사.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혜는 나직이 한 숨을 흘렸다.
돌아서는 그녀의 눈빛이 매섭다.
“현월회의 힘을 상징하는 건 칠야대와 창월대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칠야대의 대주를 맡고 계시니 사소한 일은 아니겠지요?”
칠야대주인 양대안의 눈빛이 총기를 잃었다.
그는 황급히 머리를 굴려 소혜가 관심을 가질만한 일거리를 찾아냈다.
"하하, 당연하지요. 바로 화협 천 소저와 연영검 연 소저에 대한 일입니다.“
소혜는 미간을 좁혔다.
검후의 제자인 천수련은 용봉쟁투를 통해 화협(華俠)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 후에도 산적을 퇴치하고, 사마외도를 척살하며 꾸준하게 명성을 쌓아왔다. 그렇기에 천수련이 현월회에 손을 보태는 것만으로도 우호의 시선을 보내는 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화협과 연위 사이에 문제가 있나요?”
연하연은 봉황곡을 떠난 후 스스로 백봉이라는 별호를 지웠다. 하여 사람들은 남천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녀를 빗대어 연영검(燕影劍)이라 불렀다.
“제가 말하는 건 조금 그렇군요.”
두 사람은 산동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였고,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 한데 그런 두 명의 미녀가 남천휘를 따르고 있으니 별의별 소문이 자자했다.
소혜는 미간을 좁혔다.
‘공자의 식욕을 감퇴시키는 일이 벌어지면 안 되는데······.’
추문(醜聞)이 돌면 신경이 쓰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밥맛이 없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디 있나요?”
“회주의 연무장입니다.”
소혜가 잰걸음으로 떠나가자, 양방언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오늘도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살짝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대주.”
양천중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신교대 1기 출신으로 수석 졸업을 한 그는 승진을 거듭하여 칠야대 부대주에 이르렀다. 게다가 양대안과는 의형제까지 맺은 지기였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 맙시다. 대신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바라봅시다.”
“그게 뭔데?”
양천중은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출렁거리는 근육을 자랑했다.
“초! 절! 정!”
양대안이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양천중의 말처럼 소혜와 정을 쌓는 것보다 초절정의 고수가 되는 편이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자! 남자는 힘이다.”
“오오! 역시 나의 대주!”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한 채 연무장을 향해 달렸다.
높다란 산봉우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태양이 그들을 축복하는 듯했다.
*
천수련은 미간을 좁혔다.
“연 소저. 못 보던 검이네요.”
연하연은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아, 제가 쓰던 검은 청도문주 때문에 부러졌거든요. 한데 며칠 전 은공께서 선물로 주셨답니다.”
“그걸 선물로 줬다고요?”
“네. 내력을 원활하게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 상당한 명검 같아요. 제게 과분한 보검이네요.”
천수련은 어색하게 웃었다.
‘과분하겠지. 저건 천영검이잖아.’
그녀는 명가의 제자였다.
그렇기에 구파오가의 중요 인물과 기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해야 했다. 그런 그녀의 혜안으로 살펴봤을 때 연하연이 들고 있는 검은 남궁세가의 이인자인 이검 남궁재야의 독문병기였다.
‘천영검은 천하십팔대 명검이잖아. 그런데 저걸······.’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저간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남궁재야가 천영검을 순순히 내줬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좋지 않은 방법으로 빼돌렸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저 검을 보라.
손잡이의 가죽만 바꿨을 뿐 누가 봐도 천영검이 아니던가.
그 때 연하연이 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은공은 제 목숨을 살려주셨지요. 그것도 두 번이나. 몸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랍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호위를 자처했잖아요.”
천수련은 연하연의 넋두리에 눈을 끔뻑였다.
‘누가 물어봤냐?’
한데 연하연이 경악할만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제게는 하늘이나 다름없는 그분의 그림자가 되겠다는 의미로 천영검이라 이름 붙였어요.”
천수련의 가뜩이나 작은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안 돼!”
연하연은 슬쩍 검을 안은 채 천수련을 바라봤다.
일견하기에도 경계심이 가득했다.
“천 소저는 검후의 제자로 강호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지요. 하나 이것은 은공께서 제게 주신 물건입니다.”
천수련은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부러워서 그러는 줄 알아?’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장신구를 내밀었다.
“이게 뭔줄 알아?”
연하연은 화살촉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천수련은 으스대듯 말했다.
“남 소협이 나한테 선물로 준 거야. 자기가 보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라면서 주더라고.”
연하연은 미간을 좁혔다.
화살촉이란 본래 세 방향이 날카로워야 한다.
한데 저것은 마치 오랜 세월 물속에 있었던 것처럼 매끄럽지 않은가. 일견하기에도 매일 같이 손안에서 굴려온 것이 분명했다.
“검이란 본래 신외지물이지. 그래서 내가 봤을 때에는 말 그대로 선물인 것 같아요. 연 소저도 자신의 목숨은 이제 스스로 지켜야 하잖아요.”
천수련의 날 선 한 마디에 연하연이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저뿐 아니라 은공도 지킬 수 있답니다. 어디 천 소저께서 시험해보시겠어요?”
“때마침 나도 몸이 찌뿌듯했는데 잘 됐네요. 아침 먹기 전에 함께 몸이나 풀어봐요.”
두 여인이 방실방실 웃으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서서서 새벽의 냉기가 와류를 그리듯 퍼져나갔다.
솨아아아-
하나 연무장을 장악할 것만 같았던 냉기는 금세 사그라졌다.
소혜가 입구에서 헛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천수련은 친분을 자랑하듯 손을 흔들었다.
“어머, 소혜야. 일찍 일어났구나.”
연하연은 살짝 억울한 듯 손을 모았다.
“소군사.”
소혜는 두 여인을 보며 명판관처럼 한 마디로 기세를 가라앉혔다.
“영웅에게 삼처사첩은 흠이 아니라고 했어요. 하나 그것을 결정하는 건 오직 영웅의 마음이랍니다.”
그녀는 두 여인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 후 돌아섰다. 하나 이미 사위에 가득했던 어둠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그녀는 쪽잠을 포기한 채 황보세가 서쪽의 북조산을 바라봤다.
‘저기서 도대체 뭘 하시는 건지······.’
*
콰쾅!
쉼 없이 맞부딪쳤던 두 사람이 떨어져 나왔다.
달파란은 당황한 듯 물었다.
“괜찮아?”
질풍뇌격궁이 반으로 쪼개졌다.
괜찮을 리가 없다.
“후.”
“그거 중요한 건가?”
남천휘는 안절부절 못하는 달파란을 뒤로 한 채 자리에 앉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했으나, 눈에 보이는 건 온통 무덤이다.
달파란은 무덤에 몸을 기댄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 사기! 죽은 자의 냄새만큼 투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없지.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내가 공동묘지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남천휘는 부러진 질풍뇌격궁을 매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닥쳐! 이 대머리.’